백야흔 (6)
갈라진 지반 사이로 드러난 석양이 하늘에 불을 지폈다.
말갛게 타오르는 색 사이로 연분홍색 매화잎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불사(不死)의 마인, 백야흔을 상대하고 있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화려한 풍경.
서문경은 그 정경(情景)을 어깨에 얹은 채 웃었다.
“찾아오는 것이 늦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같잖은 것과 만나서.”
한가로운 목소리였다.
눈앞에 백야흔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처럼, 느긋한 어조로 대화의 문을 열어젖혔다.
“건방지게 어딜 감히……!”
백야흔의 인상이 인왕(仁王)처럼 잔뜩 일그러지던 그때.
서문경이 고개를 까딱이자, 곁에 있던 주백경이 나무 상자를 열어 앞으로 젖혔다.
백야흔에게 보라는 듯.
오는 도중에 만난 같잖은 것이 누구였는지 알려 주겠다는 것처럼.
“……용진명이 죽었구나.”
사납게 일그러지던 백야흔의 눈가가 한순간 멈췄다.
폭풍이 찾아오기 전의 고요가 바로 이런 것일까?
찰나를 몇 조각 쪼개어 낸 후, 지금.
까득.
백야흔의 엄지발가락이 대지를 깎아 내고 주먹으로 공간을 비틀었다.
권압(拳壓)에서 퍼지는 진동이 대기를 통(通)하여 사물을 부술 수준의 힘이라.
그야말로 신화에서나 나올 만한 괴물.
천하의 대지를 마음껏 짓밟고 다녔다던 거인이 바로 백야흔이었다.
“목숨이 아깝지는 않더냐?”
“뒈지려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내 분노를 사서야 쉬이 죽지 못할 텐데, 안타깝게 되었구나.”
“속에도 없는 소릴 내뱉는구나.”
뭐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건지.
서문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백야흔을 쳐다보았다.
척 봐도 사지를 찢어서 어디다 내걸어놓고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산 채로 씹어 먹겠다는 선포였다.
‘전생에서 어떤 고수한테 그 짓거릴 했었지, 아마.’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가볍지는 않을 테지.
백야흔이 얼마나 잔혹한 마인임을 알지만, 서문경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진무신검 어르신과 스승, 거 괜찮습니까?”
“쿨럭! 빨리도 왔다 이놈아!”
지반에서 터져 나온 먼지 때문에 기침을 연거푸 해대는 무영신투와 침중한 표정의 진무신검.
용태가 좋아보이진 않았다.
특히 진무신검은 백야흔의 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털썩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문경에겐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전생에서 백야흔을 쓰러트린 사람이 바로 저 영감님이었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위독하고 노화하여 지팡이 잡을 힘조차 없다고 여겨졌던 오걸, 진무신검.
그는 한 고수가 참혹하게 죽은 것을 보고 홀로 백야흔을 찾아갔었다.
지금처럼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백야흔이 칠로두 중 최강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말이다.
‘백수(白壽:99세)의 나이에 그 기적을 보이고 돌아가셨지만, 그때의 기록은 머릿속에 남아 있어.’
마교와 이기기 위해서라면 뜬소문이라도 외우던 시기였으니까.
서문경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모두, 전술을 준비하십시오!”
그 말에 수십 명의 무인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때 잠시, 거의 감겨져 있던 진무신검의 눈이 가늘게 열렸다.
* * *
‘이미 죽은 것인가?’
발바닥의 살점이 거의 뭉개지듯 하여 감각이 없었다.
백야흔의 강격을 몇 번이고 받아 내다 보니 생긴 상처가 뼈를 뒤틀고 근육을 상하게 했다.
그 고통은 바로 옆에 번개가 쳐도 정신을 명정하게 유지하던 진무신검마저도 버티기 어려웠다.
‘노승을 괴롭히는 마군(魔軍)이 이런 걸지도 모르겠어.’
이대로 검을 놓으면 고통이 끝난다.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리던 것이 이제는 몸을 지배하려고 들었다.
하물며 이제는 수많은 무인이 얼핏 보였다.
‘허상이군, 허상이야.’
자신마저도 버티기 힘든 이곳에 어찌 무인들이 모였겠는가?
목숨이 아깝지 않은 이상, 백야흔의 힘을 보고도 대적할 생각을 품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묘한 계책을 가지고 있었다.
쿠궁, 쩌적!
백야흔이 딛고 있는 대지에 무공을 펼쳐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거나.
피잉!
장거리에서 화살을 쏘아 오금이나 눈가를 맞춰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한다.
그 두 가지에서 백야흔에 대한 이해가 엿보였다.
‘강대한 힘을 지닌 강자일지라도, 그 힘을 쓰지 못한다면 약자와 다를 바 없으니…… 도문(道門)이구나. 태극의 가르침이야.’
진무신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당장 쓰러질 듯 위태롭고 힘겨운 찰나의 연속에서 반가운 것을 마주했으니, 시원한 물을 들이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선배.”
어디선가 들어 본 듯, 기억속에 파편으로 남아 있는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눈이 침침하고 기감마저 무너져 상대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저 목소리에 담긴 호의는 절친을 만난 듯 상냥했다.
“도우러 왔습니다. 들리십니까?”
“……들리네.”
“혼원을 검에 담을 수 있다면 만물(萬物)을, 만종(萬宗)을 태극 아래에 둘 수 있다고 하셨지요.”
“내가 그랬던 적이 있던가?”
“그러셨습니다.”
“희한하군. 이제 막 알 듯 말 듯했던 고민을 남에게 말하다니.”
삼봉진인이 창안한 태극혜검의 속뜻을 찾아가는 과정을, 어찌 타인에게 말했겠는가?
진무신검은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꾸짖지는 않았다.
방금과 마찬가지로 호의와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건가?”
“설마요. 제가 얼마나 잘났다고 선배를 가르치려고 들겠습니까?”
이번에는 진심이 한껏 담겨있었다.
감히 자신에게 검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들려서, 끌끌 웃었다.
“내가 생애 마지막으로 꾸는 헛꿈이든, 진짜이든 간에 말일세. 여기까지 온 것 자체로 자네는 우둔한 사람이 맞네.”
“……예?”
“목소리를 듣자하니 젊고, 저들을 부리는 것이 영특한 사람인데 무슨 명예를 누리자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마교와 싸운다고 한들 누가 추앙하겠나?”
상대에게 던지는 말이자, 진무신검이 무당산에서 줄곧 품고 있던 자조였다.
남들에겐 외팔이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은 거짓이었다.
후회하지는 않아도 내심 절망했다.
한쪽 팔로는 무공의 끝을 볼 수 없다고 여겼기에 다른 길을 모색했다.
양의를 품고 있는 태극의 이치.
그것이라면 팔 하나 없는 몸뚱이로도 하늘 끝에 오를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글쎄.
“지금도 두 팔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후회하고 있네. 남들이 말하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그렇게 살았다면 달랐을까 하고 말이야.”
“…….”
“추하지 않나? 다 늙어서, 젊은 날의 용기를 만용으로 되새기고 있다는 것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네가 뭐라고 그리 확신해서 말하나?”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쏴붙였다.
진무신검은 늙은 도사의 가면을 벗어던지고서 분노를 토했다.
“대체 뭘 안다고 그리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냔 말이야!”
“선배의 가르침이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진무신검은 눈에 힘을 잔뜩 줬다.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와, 백야흔과 싸우고 있는 무영신투와 무인들이 보였다.
쿠쿵, 꽈앙!
거대한 힘을 가지고도 허공을 헛때리는 둥, 몸이 시시각각 기울고 있는 백야흔.
저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워서 입술이 비틀어졌다.
“태극권이구나. 태극의 가르침을 진으로 승화했구나.”
“예.”
“하지만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선배한테 직접 들은 가르침은 아니지요.”
“시원스럽게 인정하기는. 그래. 비급도 남기지 않은 내가 대체 언제 자네한테 말했단 말인가?”
“일생(一生).”
“……뭐?”
“선배가 살아온 일생을 알아보고, 행적에 있던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물어봤던 적이 있습니다. 저한테 우둔하다고 하셨지만 그 누구보다 우둔하셨던 게 선배 아닙니까?”
젊은 날엔 팔을 잃고, 늙어서는 병자를 위해서 맨손으로 비에 젖은 절벽을 열 개나 오르고.
그 때문에 끔찍한 몸살을 앓다가 지병이 생겼지만, 정(情)을 버리질 못해 등선을 포기하여 초라하게 늙어가는 인생.
그걸 가만히 듣던 진무신검이 검을 쥐었다.
“지병이 생겼다는 건 또 어디서 들었나?”
“제가 귀가 좀 밝고 행동력이 좋습니다.”
“천하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적지. 서문경. 자네인가?”
“……예.”
“본도를 비롯한 오걸이나 다른 고수에게 관심이 많다고 들었네만, 직접 듣고 보니 조금 불쾌하군그래.”
“하지만 그 덕택에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걸 어찌 내가 가르쳤다고 할 수 있나.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진무신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서문경이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밀을 품은 젊은이라는 것은 첫 만남부터 알았지만, 이만큼 비범할 줄은 몰랐다.
“도와주겠나?”
“선배를 모시려고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그것 참 미안하군. 내가 많이 지쳐 있어서 말일세.”
“저도 멀리서 오느라 지쳤으니, 서로 비슷합니다.”
“그런가?”
진무신검이 가볍게 웃고는 검을 쥐었다.
일곱 살.
처음 목검을 쥐고 느낀 무게감이 손바닥 안에서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그 감각이 참으로 생경하고 반갑기도 하여, 물끄러미 검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가세.”
“예.”
짧은 대화가 오가고 난 뒤, 두 검객이 백야흔을 향해 돌진했다.
“……더럽게 늦긴!”
무영신투가 볼멘소리를 토했다.
백야흔의 공격을 받아치기를 수십 초.
그동안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무신검의 기력을 돋기 위한 희망이나 줬겠지 싶었다.
하지만 전과는 무언가 달랐다.
“후우…….”
진무신검이 숨을 내쉬고 들이키는 과정에서 혼원의 기운이 얼핏 안법에서 보였다.
피에 젖은 몸과 후들거리는 손목.
철검의 무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노인의 모습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했다.
“혼원, 또 태극, 돌고 돌아서.”
누가 들어도 알지 못할 소릴 중얼거리는 것이 깨달은 현인(賢人) 혹은 우자(愚者)에 가까웠다.
그러나 서문경은 알았다.
아흔아홉 살에 백야흔과 동귀어진한 미래의 진무신검을 알기에 내심 격동했다.
“저것이…….”
무당파의 진정한 검.
진무신검이 피 젖은 발걸음으로 백야흔에게 다가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