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흔 (4)
강호 전역에 방을 붙인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명예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 자기가 아는 지우마저도 혀를 찰 광경일 것이다.
서문경은 명숙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
“어디서 어깨 좀 으쓱이고 다니는 사람 같은데, 이런 불의를 보고도 겁을 집어먹을 거라면 그냥 집구석에 가만히 박여있는 게 낫지 않겠나?”
“아니, 가만히 듣자 하니 너무 방자하군!”
“나중에 무슨 욕을 하고 다니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여기서 죽치고 있느니 함께 위로 올라가자니까?”
“서문세가라는 배경과 공자의 무위가 그리 대단한가! 당장 내 지우를 동원하여…….”
“거 참, 말 많네.”
서문경은 발끝으로 명숙의 마혈을 짚었다.
고수를 점혈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좌중이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에 명숙의 멱살을 붙잡아 등 뒤에 앉혔다.
“자, 당신의 지우가 몇이나 나서나 볼까?”
“…….”
“아무도 안 나서네? 뻥뻥 소리치던 거랑 다르게.”
“……이 일은 절대!”
“하라니까, 나중에.”
명숙의 불만을 한쪽 귀로 흘러넘긴 서문경이 좌중을 바라보았다.
말 위에서 엄청난 기세를 흘리는 신진고수.
그 나이가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청년에 불과했으나, 전장의 선두에 선 장군과 다르지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따라오시오.”
서문경이 주먹을 꽉 쥐고 흔드는 모습에 성하민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왜 저러는 걸까?
억지라는 걸 알면서,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까지 끌고가는 이유가 불분명했다.
이에 주백경이 성하민에게 전음했다.
-적이 화산에만 있지 않다는 걸 경계하는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이미 겪어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
서안부의 지부대인, 용진명이 북적의 사교인 적성에 속하지 않았던가?
명망이 드높은 지부대인마저 외적과 한패였는데 이곳에 모인 명가나 명숙이라도 한들 떼놓고 볼 수 없었다.
주백경은 스산한 눈빛을 드러냈다.
-어쩌면 공자님이 자리를 비우시고 나면 이곳에 칼부림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 죄를 덮어씌울 가능성이 크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요?
-설마라니요, 이미 그보다 더한 경우를 보면서 왔는데.
-…….
그 말에 성하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용진명이 사교에 속한 마인이었어도 관인과 무관의 정치가 남아 있는 한, 서문세가에 군소리할 곳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혼란스러운 천하에 발을 푹 담군 이때.
화산 주위에 모인 명숙에게 한두 마디 더 한다고 어디 달라지겠는가?
-수틀리면 아예 화산에 불을 지를지도 모르지요. 얼핏 공자님께 듣기로 이곳에 있을 마인은 몸이 튼튼하다고 했으니까.
-불이라니…….
성하민의 시선이 화산으로 향했다.
산세가 깎아지를 듯 날카롭다고 하여 검산(劒山)이라고 불리는 곳에 불을 지르면 어떻게 될까?
최상부를 제외하면 완전히 고립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고 불이 꺼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성하민은 저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저들이 같이 올라가서도 불을 지르면 어떡하죠?
-공자님께 답이 있겠지요.
주백경은 늘 그렇듯 서문경의 판단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은 어처구니가 없고 의아하기까지 하지만, 언제나 바른 길을 향해 나아가니까.
이번에도 저 괴팍한 언사에도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주백경의 신뢰 깃든 시선에 서문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 저리 부담스럽게 본대?’
주백경의 생각과는 다르게 서문경에게 대단한 계획이나 뜻은 없었다.
화산이 저 꼴인데 겁이 나서 미적거리고 있는 게 짜증 나서가 첫 번째고, 칠로두 중 일인을 잡는 자리를 증언할 사람이 필요한 게 두 번째였다.
세 번째 이유도 있긴 하지만, 전장의 기세를 올리는 데 적장의 목만큼 뛰어난 게 어디 있겠는가?
‘처음으로 마주한 게 백야흔이라서 다행이야.’
화산이 반쯤 무너져 가고 있음에도 서문경의 얼굴에는 여유 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서문경에게 백야흔이란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칠로두였다.
* * *
“……나와 같이 화산으로 갈 사람 없나?”
서문경 덕분에 살아남은 병사들 중 선임병사가 던진 낯선 제안.
이에 다른 병사들이 가까스로 가라앉았던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뭔 갑자기 헛소리야?”
“미쳤어? 언제는 한꺼번에 이동하자며?”
“그 꼴을 보고도 뭔……!”
서문경과 용진명의 싸움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겨우 군문에서 몇 수 배운 걸로 저런 싸움에 끼어들 수 없으니, 다시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와중이었다.
한데 갑자기 화산으로 가자니 그게 무슨 말인가?
“죽으러 가자고?”
“내가 말을 잘못했구만, 길을 나누잔 말이야.”
“……?”
“몇 놈은 그대로 관가로 가서 이 상황과 화산의 변고를 알리고, 다른 몇 놈은 나랑 화산으로 가서 그 어린 것을 돕잔 말일세.”
“그걸 왜 이제 와서…….”
“지부대인이라는 놈도 대가리가 돌아가서 그 짓을 벌였는데, 거기서 다른 놈이 없으리란 보장 있어?”
선임병사가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나도 머리가 나빠서 이제 떠올린 일이야. 그 공자가 화산으로 올라갔을 때, 누가 안전을 보장해 주냔 말이지.”
“……목숨을 구해 준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할 의리가 어딨다고.”
“맞아, 그게 맞지.”
선임병사는 클클 웃으며 고향이 있는 북서쪽을 가리켰다.
“내 가족은 돌림병 때문에 다 죽어 버려서, 어차피 돌아가도 혼자거든.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있느니, 내 아들과 나이가 비슷했을 공자나 도와주자는 게 취지야. 어때?”
“…….”
그 말에 두 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선임병사와 똑같은 처지였다.
마교가 돌림병이나 우물에 독을 풀어 생긴 피해자들.
그들은 마인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로 군문에 투신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스스로가 약해서였다.
하나 이제라도 서문경을 도와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이렇게 패자처럼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나도 가지.”
“나도.”
두 병사가 대열에서 이탈했다.
살아남은 숫자에 비하면 극소수였으나, 같은 처지를 공유하는 복수자였다.
비록 무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각오는 똑바로 선 자들.
선임병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허망하게 뒈져도 내 탓은 하지 말라고.”
“알았으니까 길 안내나 해.”
“좋아.”
그렇게 세 병사가 무리에서 이탈해서 화산으로 향했다.
서문경 일행과 백야흔을 비롯한 적성.
그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병력이 폭풍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 * *
쿠쿵, 꽈광!
등산로를 오를 때마다 미약한 진동이 발아래에서 흔들렸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싸움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전신이 떨릴 수준이었다.
“미쳤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서문경과 근접한 전열에서도 이런 혼잣말이 나도는데 후열은 어떻겠는가?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었다.
하물며, 이미 보신경을 펼쳤다가 주백경에게 붙잡힌 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싸울 의지조차 없는 군세였으나 서문경은 그들을 화산파 정상으로 인도했다.
“저기 있을 놈이 무섭나?”
“…….”
그 말에 수많은 시선이 서문경에게 향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적의와 분노가 한껏 담겨 있어,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칼을 뽑고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들의 심상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놈보다는 내가 만만해 보여서 한바탕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
“사실이라면 뭐 어쩔 거냐!”
침묵하는 자와 분노를 터트리는 자.
크게 두 갈래로 나뉜 그들에게 서문경은 담백하게 말했다.
“그럼 덤벼.”
“뭐?”
“내가 만만하다며, 그럼 덤벼서 자기 분수도 알아야지. 적어도 나한테 깨지면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 거 아냐.”
“이런 미친……!”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무인 하나가 서문경에게 칼을 뽑아 들었을 때쯤.
쿠콰쾅!
전보다 더 큰 충격이 지반을 강타했다.
그 탓에 중턱에서 날아온 낙석이 서문경을 비롯해 수많은 무인, 명숙들에게 향했다.
“피해!”
“막아라!”
인지를 초월한 광경에 대부분이 우왕좌왕하여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서문경과 주백경, 성하민은 각자 침착하게 무기를 뽑아 들고서 낙석을 맞이했다.
스슥, 카가강!
베거나 흘리고, 마주서서 튕겨 낸다.
저 대응에서 관록이 묻어 나왔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왔는지 명숙들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단 한 명의 마인이 일으켰다는 낙석까지도.
‘여기서 물러나면 정말 도망칠 곳이 없겠구나.’
‘단 한 명으로 천재지변을 일으키다니…… 마교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이야.’
의지를 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교에게 두려움을 품다 못해 굴복해 버린 사람이 있다.
전생에서 숱하게 본 변화에 서문경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대충 표정만 봐도 구분이 갔다.
칠로두의 신위를 보고 나면 제아무리 감정을 잘 수습하는 사람이어도 격동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 대충 알겠지? 물러날 곳이 없다는걸.”
“……어린놈이.”
분노에 가득했던 무인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몇 마딜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마교에게 굴복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일까?
서문경이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 입술을 달싹이자, 주백경이 칼을 휘둘렀다.
스걱!
“……커헉!”
무인 서너 명의 목이 베였다.
극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살인에 일제히 몸을 움츠리고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여러분 사이에 마교의 간자가 있어서 베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굴만 보고도 구분이 간다.
그 뜻은 백야흔의 신위를 보고 두려움이나 의지를 다지는 사람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남몰래 비웃는 자들을 구분할 줄 안다는 소리였다.
“믿기지 않는다면 소지품을 뒤져 보든지 하십쇼.”
“그러지.”
그 말에 담대한 성정을 가진 무인이 죽은 사람의 안섶이나 주머니를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깜짝 놀라 뒤로 주저앉았다.
“이건……!”
핏물을 수십 차례 먹인 듯 탁한 색의 인장.
아무리 봐도 공적에서 쓸 만한 물건이 아닌지라, 서문경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앞으로 마교에 투신할 사람 있으면 저렇게 죽을 테니까 각오하시고.”
서문경은 가벼운 어조로 엄포를 놓았다.
이제는 서문경을 보고 어리다거나 건방지다거나 중얼거리는 이도 없어졌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