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20화 (118/250)

백야흔 (2)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북적의 정예가 화살을 쏜다한들 주백경과 성하민이 있는 한, 터럭 하나 스치지 않으리란 신뢰가 있었다.

그 믿음이 서문경에게 용진명을 관조할 여유를 만들어 줬다.

핏발이 선 눈과 분노로 가득한 얼굴.

가슴팍에 새긴 흉물스러운 문신.

인신공양으로 채운 사기가 저 안에 한가득 담겨, 무공을 수련하지 않아도 신체를 강건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렇군.”

서문경은 안법으로 시퍼렇게 물든 눈으로 용진명의 흐름을 읽었다.

적마나 청마처럼 고유(固有)한 마공을 익혔으면 몰라도 대명의 눈을 속이기 위해 평범한 관인처럼 굴던 그였다.

“사람을 쥐어짜서 만든 게 겨우 단단한 육신뿐이라니, 무공을 익힐 노력도 하지 않은 건가?”

“기예는 약자나 익히는 것이지.”

틱.

용진명의 손끝에서 무언가가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극히 짧은 순간, 서문경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관자놀이를 스치는 파공성이 귀를 쓰라리게 하고 쇠 냄새가 인중을 스쳤다.

소림사의 탄지공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저 신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탄성만으로 거대한 암석을 부수고도 남을 파괴력을 토한 것이다.

용진명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살인자의 미소였다.

틱, 틱!

쇠 구슬 두어 개가 서문경의 무릎과 정강이를 노렸다.

‘운룡대팔식을 막으려는 건가?’

의도가 훤히 보였기에 서문경은 검을 사선으로 기울였다.

무공이라는 큰 나무가 있다면 검법이라는 가지에서 열매까지 맺어 본 남자가 바로 서문경이었다.

스르륵…….

용진명이 튕긴 쇠 구슬을 검면으로 받아 내는 기예.

화경을 접목한 움직임에 용진명의 미간이 깊어졌다.

“잔재주를……!”

“누가 할 소릴.”

서문경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공간을 지르밟았다.

운룡대팔식의 네 번째 발걸음.

사식(四式)을 행하며 검면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검을 기울여 받아 냈던 쇠 구슬이 용진명을 향해 쏘아졌다.

“이것이 기예고, 무공이야.”

인신공양으로 몸을 강건하게 만들지 않아도 그들과 비등하게 만드는 힘이자 궁리.

서문경이 적성의 미개한 사술을 비웃는 사이, 용진명은 쇠 구슬을 피하며 굴욕을 맛봤다.

“……놈!”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용진명은 손톱으로 쇄골을 강하게 긁었다.

순식간에 옷깃이 피범벅이 되어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인신공양의 사술이 새겨진 문신이 있는 그 가슴팍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사지를 찢어 놓아야 속이 시원하겠구나!”

“…….”

축축하고 찝찝한 살기가 서문경의 전신을 엄습했다.

가뜩이나 불쾌하게 달라붙던 사기가 빗줄기처럼 얼굴을 두드리는 것 같았으나, 눈빛은 여전히 냉정했다.

‘자기 피까지 문신을 통해 제물로 바치는 거군. 지금껏 누린 사기가 혈맥에 스며들었을 테니까 좋은 여물이겠지.’

용진명의 사기가 신경과 근육을 강화하고 피를 빠르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적마의 적혈마공보다는 저급하지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힘인 건 사실이다.

‘북적을 통합한 적성뿐만 아니라, 남만야수궁이나 왜구도 마공을 풀었을 거야.’

마교가 어떻게 외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방식이 참으로 저열해서 치가 떨렸다.

타인의 목숨을 쥐어짜서 힘을 기르는 형태라면 언젠가 자기들끼리 상잔(相殘)할 테니까.

그마저도 마교의 계산 아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만, 용진명도 저 내막을 알고 있을 터.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까지고 높은 지위에 있을 것 같아서 마교에게 마공을 이어받았느냐?”

“…….”

용진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은 곧 긍정.

미래를 아는 서문경으로선 참으로 어리석게 보였다.

“대명의 시대가 끝나면 뜨거운 물에 삶아질 사냥개가 되리란 생각은 못하는군.”

“……그건 네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이대로 밟혀 사느니 발버둥 치다 죽는 것이 낫다는 듯.

용진명의 눈가에 형형한 빛이 발하자, 서문경도 입술을 다물었다.

‘버림 패여도 괜찮다라, 설득해서 어찌 해보려는 생각은 버려야겠네.’

애초에 말과 생각이 통하지 않으니 족(族)을 구분하지 않았던가?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서문경이 아쉬움을 짓누르고서 검을 쥔 순간, 용진명이 한쪽으로 달려 나갔다.

“……?”

처음에는 저게 무슨 행동인가 했지만, 그가 향하는 위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특수하게 주물 된 철궁과 강철시(强鐵矢).

여태껏 쇠 구슬로만 보인 파괴력이 이 정도인데, 궁술까지 겸비한다면 어떻겠는가?

‘무공을 배우지 않은 건 오만해서가 아니라 장기가 따로 있어서였나.’

너무 무인처럼 생각하지 않았나.

서문경은 어느새 자신이 무림인에 가까워졌음을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시각이 좁아져서 조기에 용진명을 막아 내지 못했지만, 자신이 익힌 것은 곤륜파의 신공인 운룡대팔식.

쩌적, 쿵!

공간을 강하게 지르밟으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한순간 서문경의 신형이 빗속으로 녹았다가 나타난 것처럼 보인 탓에 주변에 있던 병사 하나가 뒤로 나자빠질 정도였다.

“허, 허깨비인가?”

서문세가의 둔탁하고 무거운 보신경에 비하면 경쾌하고 은밀하기까지 한 절학이니.

제아무리 강건한 신체를 지닌 용진명일지라도 서문경을 뿌리칠 순 없었다.

“……쯧!”

눈앞에 그림자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용진명이 한쪽 팔을 휘둘렀다.

언뜻 메마른 체형의 문사가 퍼덕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저 몸짓에 담긴 힘은 강의 수류(水流)를 바꾸고도 남는다.

후우웅!

빗줄기가 양단되며 스스로 길을 비키고 풍압이 허공을 저몄다.

이에 서문경은 대주천복마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강대한 마를 굴복시키는 검.’

복마관주가 단 하나의 검으로 그려 냈던 무수한 검형의 흐름과 아름답기까지 했던 집합을, 의념으로 펼쳤던 절기들을.

각기 다른 빛이 모이고 흩어지는 별무리와 같은 검보(劍寶)를.

모든 것을 눈으로 담았지만 똑같이 따라할 순 없었다.

공동파의 무학을 익히지 않았으니까.

서로 연계되어 이어지는 검격을 그대로 모방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을 몸으로 겪어 체득했으며…… 천주심경에 가전무공을 새겼으니.

‘중간에 비는 부분은 운룡대팔식으로 강제로 잇고, 풀어 펼친다.’

서문경은 두 번의 고행을 통해 익힌 신공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꽈악……!

어느새 손아귀에 들려 있는 무공사전을 쥐고서 몸을 뒤틀었다.

“……!”

용진명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어렸다.

필사적으로 휘두른 팔을 한 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피한 것이 여간 놀라웠지만, 주저하지 않고 활을 향해 내달렸다.

철궁으로 쏘아 내는 강철시라면 아무리 보신경이 뛰어나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잡았……!”

용진명이 철궁을 쥐고서 등을 돌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무수한 검기의 난립.

운룡대팔식으로 접힌 공간 속에서 수많은 검기가 서문검법의 형태를 이룬 채 겨누어져있었다.

무림에 관한 견식이 부족한 용진명이어도 이렇게까지 특이한 검법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대주천복마검인가!”

“…….”

서문경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스걱!

“끄아악!”

무수한 검기가 용진명의 힘줄을 베고 지나갔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지. 앞으로 수고로운 일을 해 줘야 하니까.”

“끄윽…….”

고통을 억지로 밀어 삼킨 용진명이 턱을 딱딱거렸다.

그것만으로 속셈이 훤히 보여, 서문경은 곧바로 팔꿈치를 휘둘렀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용진명의 턱이 부서졌다.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고 혀조차 날름거리지도 못하도록.

“이만하면 됐나.”

서문경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용진명을 완전히 제압하기까지 일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주백경과 성하민이 상대한 것은 말을 탄 북적의 정예.

무공이 뛰어나도 기마술을 이용한 차륜전은 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문세가에서 몇 번 훈련했어도 실전은 처음일 테니 당연히 난항을 겪고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후우.”

“이쪽도 끝났어.”

숨을 깊게 몰아쉬는 주백경.

그리고 곤륜파나 자신과도 다른 운룡대팔식을 펼치고 있는 성하민.

그 둘이 북적의 정예를 처치하고서 장병들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이네, 일행을 잘 골라서.”

서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마음 놓고 화산으로 향해도 될 것 같았다.

* * *

“노쇠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군. 그렇게 겁 없이 달려들던 놈들도 이리 약해졌으니.”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한쪽으로 무너진 화산 중턱.

그곳에서 두 절대고수가 거대한 체구를 가진 백야흔에게 대적하고 있었으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후우, 후…….”

특히 나이가 팔순이 넘은 진무신검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태극혜검의 무학이 깊고 정순하여 백야흔에게 뚫을 수 없는 장벽이었으나 무한히 펼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무영신투가 용을 쓰고 있었지만 백야흔에게 치명상을 입힐 순 없었다.

“네놈의 극변(劇變)은 기껏해야 눈요깃거리. 나한테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람이 되다만 놈이!”

“하하, 마음껏 짖어라. 되다만 놈한테 산 채로 씹어 먹힐 테니까.”

백야흔의 말엔 거짓 하나 없었다.

어차피 싸움에서 이기면 두 절대고수의 심장을 씹어서 배를 채울 테니까.

대규모 인신공양으로 태어난 재앙, 백야흔에게 있어 식심(食心)의 행위는 자연스러운 본능과 같았다.

“옛날에 놓친 아쉬움을 오늘 풀 수 있겠어.”

“……쓰읍.”

무영신투가 입술을 비틀었다.

화산파를 대피시키는 것까진 좋았지만, 어떻게 해야 여기서 몸을 빼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하물며 진무신검은 보신경이 뛰어난 고수가 아니었으니.

무영신투의 재기(才器)가 생사를 가를 열쇠였다.

‘책임지는 게 싫어서 도둑놈이 됐던 건데.’

어쩌다 보니 다시 마교와 싸우게 되고, 다시 그놈에게 복수할 생각에 가득해지고 말았다.

무영신투는 몇 년이고 이어질 전쟁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과거의 일은 과거,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자신의 지론이었다.

그걸 꺾은 건 삼 년 전 호북성에 있었던 싸움.

임시로 받은 제자, 주백경이 서문경과 함께 적마와 대적했다는 것만으로 그 뜻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음?”

“네놈이나 청마나, 사람을 아주 X같이 얕잡아 보는 꼴이 말이야. 마교의 칠로두라는 것들은 자기가 재밌자고 미꾸라지처럼 세상 물을 흐리잖아.”

“그게 나쁜가?”

백야흔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강자에게 자연히 굴종하는 것이 약자이지 않나!”

“그런…….”

“너희라고 안 그런 적이 없다고 확신하나? 그냥 걷는 것만으로 고개를 숙이고 돈 꾸러미를 건네주는 꼴을 말이야.”

백야흔의 얼굴에 짜증이 뒤섞였다.

“강자존의 무림에 사는 너희가 나를 부정해서야 말이 안 되지. 강자는 약자를 이용하고, 약자는 강자의 세력에 기생해서 어떻게든 기어오르는 게 세상사인데…… 내 편이 아닌 약자쯤이야 죽여도 되는 게 아닌가?”

“그걸 세상에선 마(魔)라고 부르는 걸세.”

진무신검은 강직한 기세를 흘리며 백야흔에게 검을 겨눴다.

“화산에 묻어 주겠네.”

“허, 나는 너흴 묻을 생각이 없는데.”

백야흔의 웃음이 두 절대고수를 압박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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