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흔 (1)
비로 젖어 축축한 하늘 한쪽이 석양으로 물들어 발갛게 타올랐다.
또옥, 똑.
나뭇잎을 타고 내려온 빗방울이 천하를 두들겼다.
서문경과 용진명, 둘을 제외하고도 모든 사람을 적시는 빗줄기가 축축한 냄새를 불러왔다.
한데 그 사이에 비릿한 혈향이 뒤섞였다.
뚜둑, 뚝.
용진명의 얼굴에 빗방울이 맞닿을 때마다 껍질 같은 것이 한 꺼풀 벗겨졌다.
“의심이 너무 많아 무림에서 오래 살 팔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스스로 단명을 자초하는구나.”
온후한 성정의 장년인이자 지부대인이라는 가면이 벗겨지는 광경.
용진명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서문경은 검을 쥐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주백경이 후위(後衛)를 자처하고, 성하민의 눈동자가 주위를 가볍게 훑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부대인! 따로 부른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가 절반.
“…….”
“그동안 제법 정들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친구.”
살인자의 눈빛을 흘기는 자가 절반.
그들은 대부분 천막 주위에 깔아 둔 병사였다.
서문경 일행을 기만한 채 천천히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술책이었을 터.
뿌우우-!
어느새 가까워진 뿔피리 소리가 초목을 두드렸다.
나뭇잎 위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땅으로 튕겨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니.
“언제까지 안락한 대지에 안주해 있을 작정이었느냐?”
본색을 드러낸 용진명이 두 팔을 벌렸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눈빛은 축축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별이 된 초원의 형제에게 너희의 심장과 간을 뽑아 바칠 것이다.”
인신공양.
사람을 바쳐 힘을 얻는 사특한 교리.
전생에 보았던 참혹한 흔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위치가 섬서였던가?
서문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북적 출신의 야만인이 지부대인까지 올라갔을 줄은 몰랐군.”
“야만인? 하하, 참으로 독선적인 표현이군. 한족이 아니면 전부 남만이니 북적이니 하는 말로 매도하는 것이 말이야.”
“적어도 생사람을 잡아서 바치는 풍습은 없거든.”
서문경은 북적의 야만적인 풍습을 꼬집으며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나 용진명의 얼굴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쌓은 비틀린 신념과 광신.
서안부의 지부대인이 되기까지 숨겨 왔을 야심이 지금 이 순간, 서문세가의 일공자에게 분노의 형태로 쏟아졌다.
“네놈만 없었어도 순탄하게 흘렀을 것이다. 네놈이, 망나니 새끼 따위가 대업에 흙탕물을 튀기고 있단 말이다!”
분통을 토하는 용진명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지부대인은 빗줄기에 씻겨 사라지고 북적의 표상이 떠올라 있었다.
‘가관이군.’
서문경은 그의 울부짖음을 한쪽 귀로 흘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북적의 정예가 활을 강하게 당긴 채 용진명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 덕지덕지 바른 얼굴 화장이 빗물에 흘러내리면서.
“허, 정말 말세야. 관인의 중추에 북적이 숨어 있을 줄이야. 그리고 망나니? 언제 적 별명인데.”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이런 소규모 정예를 주변에 대기시켰을까?
‘애초에 이곳에 올 것을 알고서 그랬겠지.’
지부대인의 위치에 있으니 관도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쯤은 쉽게 알아냈을 터.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대명의 군병은 들으라.”
낮지만 묵직한 음성.
서문세가의 동공에서 비롯된 내공이 소리를 멀리 울리게 했다.
무지하게 퍼붓는 빗줄기 사이에서도 서문경의 목소리가 들렸을 정도였으니까.
잔뼈 굵은 병졸들은 서문경이 외견에 비해 고강한 경지임을 알아차렸다.
“예!”
“분부하십시오!”
그들의 외침에 어리숙하고 어린 병졸들도 눈치껏 따라 했다.
자연스레 방패를 든 채 서문경 주위로 이동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군권을 장악한 서문경은 용진명과 기마 부대를 손짓했다.
“섬서의 중추까지 침투한 저 야만인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이미 불탄 종남산에 이어 화산파가 불타고 장강에 독을 탈 것이다. 고향에 있는 누이와 부모까지도 그 참상을 피할 수 없겠지.”
“갑자기 연설인가? 허튼짓을 하는군.”
용진명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속내는 서문경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사방팔방을 정예로 휘감고서 활까지 겨누었는데 저리 침착할 수 없는 것이다.
[쏴라.]
용진명의 손짓에 가장 은밀한 곳에서 숨어 있던 정예가 시위를 놓았다.
피슛-!
하늘에서 퍼붓는 빗줄기를 꿰뚫는 화살 하나.
시야는 어둡고 좁아지고, 쏘아지는 소음조차 빗소리에 잠긴다.
자연이 만들어 낸 정체절명의 위기에서 서문경은 천주심경의 가르침을 따랐다.
“……후우.”
금강심(金剛心), 부동경(不動境).
공동파의 옛 도사가 창안한 신공에 따라 초조함을 가라앉히고서 주변에 감각을 집중했다.
손끝으로부터 삼 장.
그 공간만큼을 구의 형태로 다스렸다. 수십, 수백의 빗줄기마저도 손가락으로 찌를 수 있을 정도로 훤했다.
그러니, 어찌 화살 하나 따위가.
“되돌려줘야겠지.”
탁!
서문경은 화살을 잡아채고서 역방향으로 내던졌다.
“……끅!”
먼 곳에서 숨통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게 화살을 쏜 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허, 헉!”
“저것 봐라! 저런 고수가 우리 편이다!”
북적의 정예일지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경지라면 처음 본 아군조차 매료될 테니까.
큰 국면에서 승리란, 승기가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걸 용진명도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그깟 재주로 한 명을 꺾었다고 한들, 여기가 묫자리인 건 변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놈들 모두 산 채로 찢어서 바칠 테니까!”
용진명이 기세를 꺾기 위해 잔인한 말을 내뱉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인신공양 절차까지 주절거릴 것 같아, 서문경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악!
세차게 퍼붓던 빗줄기가 사선으로 크게 베였다.
비검절우(飛劍絶雨).
서문의 쾌검이 용진명을 양단하는 듯했지만, 과연 적성의 강자라는 걸까?
용진명이 양팔을 교차하여 검기를 막아 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근육은커녕 살집조차 보이지 않는데…….’
사교 특유의 이질감이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하물며 내공을 운용하는 수순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인신공양으로 얻은 무언가가 용진명의 몸을 강건하게 만든 듯했다.
당장 서문경의 머릿속에 몇 가지 사술이 떠올랐다.
“주 무사, 우리가 오래 살 팔자는 아니야. 그렇지?”
“공자님만 따라다니면 이런 꼴이 나니까요.”
주백경은 쓰게 웃었다.
어딜 가도 마교나 사파가 따라붙어, 각자 더러운 목적을 가지고서 서문경을 겁박하거나 죽이려는 세력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삼 년 전에는 뭐가 이리 불운하나 싶었지만, 그와 함께 다니다 보니 한 가지가 명확해졌다.
“삼 년 전에는 무림이고, 이번에는 관인입니까?”
“……뭐, 이렇게까지 대놓고 목을 치러 올 줄은 몰랐지만.”
서문경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삼 년 전에 천무학관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수학하며 무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이번 진의(眞意)는 달랐다.
‘대외적으론 구파일방을 정의맹에 합류시키기 위한 설득이지만, 이왕 밖으로 나가는 거 한번에 처리하는 게 나으니까.’
마교는 무림에만 세를 집중한 것이 아니다.
전생에서 알게 모르게 정의맹에 거짓 정보를 보내거나 희생을 강요한 관인이 많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완전히 척결하려는 뜻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래도 관인의 중추까지 썩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버지가 이를 보았다면 무슨 탄식을 흘렸을까?
서문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용진명을 노려보았다.
축축한 살기가 전신을 핥고 내려가는 듯한 불쾌함이 스쳤다.
인신공양을 통해 축적한 사기(邪氣)였다.
“네놈이 따르는 놈이 백야흔이렷다?”
“지존의 존함을 어찌 아느냐?”
“지존은 무슨, 사람이 되다 만 놈이!”
“…….”
용진명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약관도 안 된 애송이 따위가 지존을 욕보였다는 증오가 전신을 삼켰다.
차가운 빗줄기마저도 그의 분노를 식히지 못했으니.
“쏴라.”
“귀갑방진(龜甲方陣)을 펼쳐라!”
서문경의 외침에 군병이 제각기 방패를 들어 스스로를 보호했다.
어찌 보면 의아한 판단이었으나, 주백경만은 그 뜻을 이해하고 검을 높게 들었다.
그 뒤에 수많은 화살이 빗줄기를 꿰뚫었다.
파파팍!
수십, 백에 가까운 화살이 방패를 직격했다. 끄윽, 하는 신음과 함께 발치가 핏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렇게 방패가 부서지고 팔뚝에 화살을 맞았을지언정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세 무인의 압도적인 검술 덕택이었다.
“공자님께서 우릴 도우신다!”
“아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방패를 꽉 잡고 버텨라!”
군병들은 죽지 않으리란 희망을 안고서 귀갑방진을 유지했다.
이 모습을 본 주백경이 서문경에게 전음했다.
-목격자를 최대한 살려서 관인의 세를 줄일 생각입니까?
-무슨 소리야, 사람을 지키는데 계산이 필요해?
-제가 공자님의 성격을 압니다.
-……겸사겸사지 뭐. 어차피 우리끼리 말하면 거짓이라고 난리 칠 거 아냐?
어차피 터질 고름이라면 서문세가까지 더럽혀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명분을 세워고 대비해야 한다.
서문경은 그 뜻을 품고서 군병이 다칠지언정 죽지 않게 지켰다.
“이제 우리 차롄가?”
“얼른 저놈을 사로잡고 화산으로 가야겠습니다.”
“…….”
주백경과 성하민은 검을 들고서 계속해서 날려 대는 화살을 뿌리치고 정예를 향해 보신경을 펼쳤다.
그사이에 서문경이 용진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스르륵, 탁!
곤륜산에서 배운 운룡대팔식이 유려하게 펼쳐져, 허공으로 내딛는 걸음마다 생기는 기파가 용진명을 향했다.
“……놈!”
용진명의 한쪽 입술이 비틀렸다.
볼썽사납게 지어진 미소에서 인신공양으로 쌓은 사기에 대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시체마저 찾을 수 없게 산산조각 내어 지존께 바치리라!”
“역겹군.”
서문경은 허공을 땅처럼 박차며 호흡을 골랐다.
운룡대팔식이란 공간을 접어, 무한히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일찍이 승룡관주가 공간을 뒤틀어서 검력에 속도를 더했다면, 서문경에겐 또다른 방식이 있었다.
스릉!
“……!”
용진명의 팔뚝에 긴 검상이 그어졌다.
대체 언제 휘둘렀단 말인가?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데도 서문경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서문경이 운룡대팔식으로 공간을 접듯 움직였다.
스가각!
허공에서 사선으로 내리찍는 창법, 철소추.
본래 창으로 펼쳐야 할 초식을 검법으로 화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서문경의 경지는 창과 검을 가리지 않을 위치에 있었으니까.
이를 모르는 용진명에겐 그저 귀신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용진명이 헛숨을 삼키는 사이, 서문경은 걸음을 옮겼다.
삼식(三式).
운룡대팔식으로 행하는 세 번째 발걸음.
용진명의 사각을 향해 공간을 접었다.
처음에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여러 번 애를 먹었지만, 이번이 첫 실전.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시야가 한 점으로 빨리며 용진명의 어깨, 견정혈만을 주시했다.
‘일검적심.’
공간이 접히며 생기는 굴절 때문에 서문경의 칼끝이 뱀의 혀처럼 움직였다.
여러 차례 수련했던 서문경마저도 감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는데, 처음 마주하는 용진명은 어떠겠는가?
촤악!
“……큭!”
거리를 셈하지 못하고 견정혈을 찔렸다.
사특한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을 테지만, 용진명은 백야흔에게 간택받아 적성의 장로가 된 몸.
“너에게 무너질 몸이 아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강자.
점혈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껍질을 벗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문경의 생각은 달랐다.
“저리 튼튼하면 안 봐줘도 되겠어.”
웬만한 살초에도 죽지 않고 버틸 테니까.
서문경은 곤륜파와 공동파에서 익힌 무학을 시험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