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5)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바람 좀 쐬고 온다고 했다는 것이 전부인데…….”
독살당한 병사와 친하게 지내던 남자가 치도곤을 당할까 싶어 벌벌 떨었다.
기침 한 번에 산이 날아간다는 서안부의 지부대인이다.
홧김에 꺼내는 한마디에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남자는 기억을 최대한 쥐어짰다.
“최, 최근에 도박 빚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목숨이 간당간당하다고 했으니 뭐든 하지 않겠습니까?!”
“도박 빚? 어디서 진 빚인가?”
“호북성에서 그랬으니…… 흑도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으음.”
용진명이 턱을 매만졌다.
호북성에 존재하는 흑도가 워낙 많아 꼬리를 잡기 어려운 데다, 마교가 자칭했을지도 모르는 일.
서문경이 보기에 그의 고민이 제법 깊어 보였으나 신뢰하진 않았다.
‘저 위치에 있는 관인이면 속내를 숨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첫 만남부터 전서구를 붙잡은 지금까지도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러다 문득 서문패가 지나가듯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정의맹을 만든 이후로 황도에서 서문세가가 역심을 품을지도 모른다고 간언하는 놈팡이가 많다더구나. 도발에 쉽게 걸려들지 마라.”
관인에게 서문세가의 권세를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역심을 드러낸다는 꼬투리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으니.
서문경은 서문패의 조언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씰룩였다.
‘설마 용 대인이 서문세가를 의심하고 있나?’
마교인 척 종남산을 불태워서 정의맹으로 더욱 구심하게 만드는 작전이라.
참으로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만이 떠올릴 수 있는 의심이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화산파로 가는 걸 늦추려는 계책일지도 모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종남산을 태운 놈이 아무 세력이 없을 리가 없지요. 충성하는 놈 한둘을 여기다 두고, 자길 뒤쫓거나 방해하려는 걸 견제하려고 두었을 겁니다.”
“더욱 주의하는 수밖에 없겠구만.”
용진명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한순간 보인 서늘함에서 서안부의 지부대인이 되기까지 걸은 혈로가 언뜻 보인 듯했다.
그날 이후.
“바퀴가 빠졌습니다!”
“관도에 나무가 쓰러져있으니, 당장 치워라!”
집요한 방해가 계속해서 찾아왔다.
용진명이 인원을 추린다면 먼저 앞으로 가서 길을 막아서겠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그동안 서문경은 일행에게 용진명을 비롯해서 다른 병사들과 주변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생길수록 군기가 엄격해져 숨소리마저 내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는 건드려봐야 눈물만 흘리겠는데.’
그렇다면 정말 외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왜 용진명은 주변의 전서구를 잡았던 걸까?
서문경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 한 줄기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이보게, 서문 공자.”
“……예, 용 대인.”
“혹시 내가 의심스럽나?”
이리도 갑자기 치고 들어올 줄이야.
서문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표정을 숨기는 법을 더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정무에 한창 바쁘실 분이 이렇게 화산행에 동참하실 때부터 이상했으니까요.”
“하하, 내 보기에도 자네도 나이답지 않게 음흉한 사람일세. 천하제일이니 대륙 정벌을 꿈꿀 나이가 아닌가? 한데 홀로 적진으로 나아가서 정의맹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건…… 싸움이 아니라 치세(治世)이니 말일세.”
“군관답지 않았습니까?”
“소가주라는 좋은 자리를 나가서 하는 짓이 무림인과 어울려 마교와 싸우자는 단결이니까. 황도에서 어찌 보였을지야 조언하는 이가 많았겠지.”
서문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용진명과 속내를 터놓을 시간이 된 것 같아, 마음이 가볍기도 했다.
“그때가 열넷이긴 했지만, 마교와 엮인 일이 워낙 충격이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자네 부친께 들은 조언인가?”
“저 스스로 했지요.”
“하하, 공자가 스스로 생각해 보게.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아이가 어찌 자기 멋대로 소가주에서 내려가서 무림으로 가, 마교와 싸울 세력을 만들겠나?”
“…….”
“곡해하지 말아 주게. 내 생각이 아니라 황도나 어디 지부대인끼리 떠드는 말이니까.”
서문경의 행보는 서문이현을 중심으로 한 군문(軍門)의 계책일 것이다.
용진명은 대놓고 시꺼먼 의제를 내놓고서 부드럽게 웃었다.
“전서구를 한번 붙잡아 본 것이 그 시험이었네. 공자가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거든.”
“……허.”
서문경은 안 내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조가 고와도 내용은 서문세가를 잠시 역도로 의심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자기 속내를 밝힌 까닭은 오직 하나일 터.
“내 사과를 받아 주겠나?”
“진짜 역도가 나타나서 대인의 목숨을 위협하니 일단 접어두자는 겁니까?”
“뭐, 공자나 일행이나 마차 주위에서 떠나질 않았으니 말일세. 외부서 사람을 데려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도 오늘 아침에 의심을 지웠거든.”
주변의 관리를 이용해 자신의 행적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봤다는 뜻.
서문경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여기선 제가 짜증 좀 부려도 되겠지요?”
“허허…… 문제는 섬서의 도맥을 망가트리려는 놈을 붙잡는 거지 않겠나?”
자연스럽게 시급한 일을 짚어서 넘어가려는 행동 또한 여느 관인과 같아서, 서문경은 그 점을 꼬집었다.
“이번 일은 빚으로 지우겠습니다.”
“그리하게. 악연과 인연 모두 맥(脈)이지 않겠나?”
용진명이 끌끌 웃으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자기 위치라면 서문경과의 마찰을 무마하고 서문세가와 친분을 다질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지만, 글쎄.
‘내가 서문세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실하게 조사하진 못한 모양이네.’
바깥에서는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간 일공자이자 고수.
이 정도겠지만 서문세가 내부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서문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버지와 삼촌한테 제대로 일러바쳐야지.’
아직 겉모습이 어리기에 부릴 수 있는 폭거.
용진명에게 후일 톡톡히 받아 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뭐, 그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나야 좋지.”
용진명은 부드럽게 웃으며 화산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화산까지 전속력으로 달려라.”
“예!”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이 크게 외쳤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서문경은 마음속에 품었던 웃음을 지웠다.
용진명의 진의를 듣고 나니 새로운 것이 보였던 것이다.
‘……방심하면 안 되겠어.’
서문경은 웃음 대신에 칼을 품었다.
* * *
명의 행정은 예로부터 부(府)로 분리하여 거느릴 수 있는 권세와 군부를 한정했다.
황도를 제외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서안부의 지부대인이라도 한계는 있다.
요컨대 다른 부에 속한 군병을 데려다 쓰면 황상이 정한 대명률을 범하는 것이다.
‘지부대인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룻밤 뒤.
화산이 머지않은 곳에서 서문경은 몇 가지를 고민했다.
‘복식의 표식을 보면 서안부에 속한 군병이 맞는데, 쓰는 말씨가 조금씩 다르고 어색해. 대명률을 피하기 위한 편법인가?’
여기서 용진명에게 의중을 물으면 대놓고 반목하자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청렴한 관리여도 대명률의 한둘쯤은 어기게 되기 마련이니까.
역으로 서문세가에 대대적인 복수가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독살 시도와 바퀴가 빠지는 불상사가 있었으니, 가까운 곳에 적이 있다는 소리이기에.
-너흰 어떻게 생각해?
-저는 당장 소상히 밝히게 하는 것이…….
-주 무사한테 괜히 물어봤다. 하민이는?
-적어도 요즘은 방해가 별로 없잖아?
화산파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뒤에는 별다른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성하민은 그 점을 짚었다.
-굳이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가도 되지.
-흐음…….
-설마 지부대인이 마교에게 붙었겠어? 게다가 서안인데?
서문세가에서 지낸 삼 년 동안 성하민도 많은 것을 공부했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들은 구역이 바로 섬서성 서안부.
황도에서 지내는 제사가 많아서 무당파와 함께 가장 가까운 도맥이었다.
용진명이 가진 권세란 웬만한 왕족과 비견될 터.
그만한 힘을 지닌 자가 마교에게 변절했을까?
‘합당한 소리긴 한데, 왜 마음에 걸릴까.’
서문경은 깊게 고민하다가 물방울이 뺨을 두들기는 걸 느꼈다.
토독, 톡.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가 뜨거운 지면을 식히고 피부를 두들겼다.
병사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천막을 세우자, 용진명이 그곳으로 향했다.
“흐음.”
서문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여태까진 마차와 천막을 분리하여 지냈지만, 한번쯤은 동태를 몰래 엿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날 의심해서 전서구까지 붙잡았을 정도면, 나도 한 번쯤 되갚아 줘야지.’
서문경은 운룡대팔식을 펼쳐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아직 운룡대팔식이 미숙하여 소리가 날 뻔했지만, 빗소리가 적절히 숨겨주었다.
자신이 마차 안에 있다고 속이는 건 주백경이 알아서 하기로 했다.
“주 무사!”
‘……내 목소리가 원래 저렇게 얄미웠나?’
인상을 찡그린 서문경은 발을 가볍게 놀렸다.
정확하게는 천막 위에 있는 나뭇가지.
그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공으로 청력을 돋워, 저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잡아챌 작정이었다.
‘저번의 대화로 의심은 풀었다고 여기면 좋을 텐데.’
이럴 수 있는 것도 한두 번일 뿐.
우연한 계기로 용진명에게 들킨다면 아예 서문세가와 반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마음을 다잡은 채 기척을 죽였다.
그사이에 천막 안쪽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의심이 많아서 대하기가 쉽지 않군. 천무신동이 아니라 천무흉심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이런 식으로 뒷담을 듣네.’
마교와 대적하다 보면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서문경은 쓰게 웃었다.
용진명의 말에 확실히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듣고 숨을 죽였다.
“이래서야 대업에 차질이 있겠어. 그놈이 얼른 제 할 일을 끝내야 할 텐데.”
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경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쩌적, 쿵!
천장이 무너지며 천막이 푹 꺼졌다.
그러나 용진명에게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불청객을 나무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서문 공자.”
“대업이니 그놈이니, 오히려 내가 먼저 물어야 할 말이 아닌가?”
“허허, 가진 무공이 뛰어나다고 예의를 잃었군.”
“애초에 병사들도 서안부에 소속된 사람은 아닌 듯한데…… 이거부터 변명하지 그래.”
“…….”
그 말에 용진명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찔린 듯했다.
“허, 너 같은 애송이가 어찌 그걸 판별했단 말이냐?”
“나 스스로?”
“자기 애비한테 참으로 많이 배웠군. 하기야, 그러니까 정의맹 같은 역도 집단이나 만들었겠지!”
껄껄 웃은 용진명이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여기서 네가 죽어야 좋을 것 같구나.”
때앵, 땡!
가까운 곳에서 울린 종소리에 이어,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두들겼다.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그 광경은 서문경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러다 갑자기 한 이름이 떠올랐다.
“적성(赤星)이냐?”
북적으로 이루어져 식인과 인신공양을 저지르는 사교.
그 이름을 들은 용진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여기서 죽여야겠어.”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