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17화 (115/250)

의혹 (4)

떼구르르…….

등산로를 타고 구르는 것이 있어, 진무신검이 허리를 숙였다.

한데 그 정체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원시안진……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졌다고 한들, 어찌 도교의 영산에 피와 살점이 떨어지는가!”

흉하게 찢어진 손가락 마디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전진교의 선인(仙人), 학대통 선자께서 터를 잡은 화산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진무신검은 스스로 한쪽 무릎을 꿇어 손가락을 수습하고 깨끗한 천으로 닦았다.

“부모가 낳고 기른 몸을 산짐승이 집어삼키게 둘 순 없는 노릇이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손가락이지만,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어서 직접 챙겼다.

진무신검은 아주 짧은 순간 하늘을 향해 묵념하고 기원했다.

부디 손가락의 주인이 살아 있기를, 용한 의원을 만나서 다시 붙일 수 있기를.

진심을 다해 염하고는 발을 가볍게 놀려 화산파로 향했다.

“…….”

위로 오를수록 붉게 물들어 가는 초목과 시체를 탐하려는 산짐승이 얼핏 눈에 띄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진무신검은 가볍게 옷을 찢어서 손가락으로 튕겼다.

따악, 소리가 산짐승의 이마에서 울렸다.

“나는 불가(佛家)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살을 내줄 수가 없구나. 네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겠느냐?”

공력을 담아 진언하니 산짐승도 격차를 느끼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렇게 산짐승이 풀숲 너머로 사라지자, 진무신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도망치지만, 사람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마련이라. 참으로 애석하고 존경스럽구나.”

화산파의 도인도 산짐승처럼 도망쳤길 바랐지만, 저 위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다시 보신경을 펼치던 그때.

진무신검은 소란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만 멈추어라.”

저벅, 저벅.

용천혈에 진기를 한가득 담아서 걸었다.

여름의 뜨겁고 습기 찬 바람에 청명한 기운이 뒤섞였다.

척사멸마.

마공과 반향(反響)하는 무당파의 기공에 저 너머에서 벌어지던 살육이 멈췄다.

녹색 풀잎을 시뻘겋게 물들이던 무언가가 등을 돌렸다.

“지긋지긋한 노인네가 여기까지 왔느냐?”

“……백야흔.”

“흥, 날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체구가 거대한 장한, 백야흔은 양손을 크게 펼쳤다.

그의 손끝에서 끈적끈적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목숨을 잃은 도사의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화산파 도사들의 얼굴에 진노가 가득했다.

어디 그뿐이랴?

백야흔은 피로 물든 손으로 가슴팍과 얼굴에 기이한 형상을 그렸다.

“오히려 잘됐다. 네놈의 간을 처먹을 기회니까!”

간합(間合).

일 초식을 이루기도 전에 백야흔의 질주가 진무신검을 향했다.

“조심하시오!”

“등이 비었다! 진무신검에게 가세하라!”

아까 전부터 백야흔과 싸우고 있던 화산파 도사들이 진무신검에게 경고하고 가세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있었다.

오걸이라고 한들, 진무신검은 외팔이에 반로환동을 이루지 못한 노인.

끝을 모르는 힘을 지닌 백야흔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야흔에게 계속해서 패배하여 무공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무공은 본디 강자를 꺾기 위한 궁리.

그 점에서 진무신검은 몇십 년 전에 마교와 싸우기 위해 지극히 궁리했던 도사였다.

“유유무극(幽幽無極).”

한없이 광대한 태극의 이치 아래에 백야흔이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티끌일 뿐.

외팔의 백전노장, 진무신검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백야흔에게 악의 짙은 미소를 보였다.

“되돌려받게.”

그렇게 유유무극이 담긴 칼끝이 반원을 그리며 정과 동이 반전.

당장 진무신검을 깨부수기 위해 휘둘러졌던 백야흔의 오른팔이 역으로 휘어졌다.

아니, 적어도 화산파 도사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큭! 또 이런 잔재주를.”

자기 주먹에 얻어맞은 백야흔은 콧김을 들썩였다.

검치가 검마이던 시절에도 진무신검은 참으로 기묘한 검법을 가지고서 칠로두와 대적했다.

처음에는 검법이 특이하다고 여겨서 아예 검을 뺏기도 했다.

저렇게 물러 터진 성격이라면 빈민(貧民)을 구하기 위해서 검을 내줄 거란 청마의 계산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검을 뺏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얇고 짧은 나뭇가지여도 유유무극의 검세는 변함없이 이루어진다.

‘심상만으로 대우주의 법식을 답파한다니, 미치기로는 무림인 중 이놈이 제일이야.’

소우주로 대우주를 답파(踏破)한다는 무림인의 허세.

허황된 꿈을 그대로 이룬 남자가 바로 진무신검이었다.

하지만 백야흔도 지난 세월 동안 놀기만 하지 않았으니.

“……쓰읍!”

숨을 한 번에 크게 들이쉬고서 주먹을 내질렀다.

그것만으로 초목이 휘청거리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먼지가 위로 분연히 날아오른다.

내공이나 마공이 없는 백야흔의 유일한 무기가 바로 순수하게 타고난 몸뚱이였다.

‘따라갈 수 없이 빠르고, 막을 수 없이 강하면 돼.’

백야흔의 주먹질에 진무신검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제아무리 힘을 흘리고 되돌린다고 해도 여파는 남기 마련.

무릎의 슬개골이 쓰라리고 칼바람이 살갗을 찢을 듯이 휘갈겼다.

그러나 진무신검은 물러섬 없이 강건했다.

“예전처럼, 하루 종일 놀아 볼 테냐?”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예전은 무슨.”

마지막으로 싸운 뒤로 지난 것이 십하고도 수년.

진무신검의 노화는 멈추고 않고 가속했다.

정심한 내공을 지니고 있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심상으로 태극혜검의 완성을 깨달았다면 반쯤 선인(仙人)에 도달한 셈이니.

속세에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 몸을 남기지 않고 승천했을 터.

“다 죽어가도 속세에 할 일이 남았으니, 바로 너희다.”

진무신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극혜검을 펼치는 의지가 쇠하지 않도록, 의지가 검식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백야흔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유유무극으로 되돌리면서 선명한 적의를 불태웠다.

“너희가 심심풀이로 움직이고 사람을 괴롭히는데 수백, 수천이 시름하고 고통을 받는데 어찌 나 혼자 떠나갈 수 있겠느냐?”

“흥! 그깟 선의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게 생겼구나!”

예전이면 몰라도 저렇게 늙어 버려서야 시간을 끄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백야흔은 진무신검의 한계를 일찍이 눈치채고서 히죽 웃었다.

등 뒤에 화산파 도사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늙은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즐겁겠구나!”

“……!”

진무신검이 반응하기도 전에 백야흔은 등 뒤를 공격하던 도사 하나를 때려죽였다.

그가 한 일이라곤 등에 생채기를 내는 것뿐.

백야흔의 타고난 힘과 피부, 근육을 뚫는 건 최소한 십대고수가 절기를 펼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자, 그 몸으로 날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안 된다!”

진무신검의 외침이 닿기도 전에 백야흔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까부터 날벌레처럼 거슬리던 화산파 도사를 전부 죽여 버리고 진무신검이 스스로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괴롭힐 작정이었다.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린 화산파 도사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검진을 펼쳐라!”

“예!”

장로로 보이는 도사가 결사항전의 뜻을 보였지만, 검진은 백야흔에게 무력하게 찢어지기만 했다.

진무신검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스윽, 촤악!

심상을 담은 태극혜검으로 백야흔의 발목을 베고 등을 찢었지만 큰 상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크게 날뛰며 화산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너희가 목숨을 바쳐 가며 이러는 이유가 설마…… 후기지수를 내빼려는 것이냐?”

“……!”

“하하, 뻔히 보여!”

잔인한 미소를 지은 백야흔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오솔길이 있어, 미처 지우지 못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당장에 잡아와서 사지를 잘라서 찢으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지는구나!”

“……모두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라!”

화산파 도사들과 진무신검은 서로 힘을 합해 백야흔의 급소를 노렸다.

그중 화산파는 온전히 백야흔의 공격을 받아 내는 것에 집중했다.

어차피 치명상은 진무신검만이 입힐 수 있으니, 목숨을 버려서라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진무신검의 몸은 백야흔과 대적하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늙어버린 것이 애석하구나!’

하늘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진무신검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무력감과 허망함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이럴 때 검치와 무영신투가 있었다면 달랐을 것인데……!’

과거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과 무영신투가 쩔쩔 맬 때 검치가 이끌어 주었다.

하물며 낭왕이라도 있었다면!

‘이대로는 안 된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백야흔의 살생을 막아야……!’

진무신검이 진원진기에 손을 대려던 그때.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자네는……!”

진무신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군.

다급하게 뛰어온 듯, 무영신투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었다.

* * *

화산파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며칠 전.

“혹시 공자께서 전서구를 날렸나?”

“…….”

서문경은 용진명의 손아귀에 잡힌 새를 쳐다보았다.

발에 묶은 쪽지는 아직 읽지 않은 듯했지만, 솜씨 좋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펴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서문경의 얼굴에 불쾌함이 피어났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변에 전서구가 돌아다닌다고 하여 잡았네. 가뜩이나 종남산이 불타서 시끄럽지 않나? 혹시 악한들끼리 연락을 나누나 했지.”

“내용을 읽으셨습니까?”

“내가 설마 그랬겠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서문경은 용진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가 잡은 전서구는 어차피 가짜.

진짜는 이미 며칠 전에 보냈다.

종남산 주위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작정하고 잡아들이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리란 계산이었다.

‘출발하자고 약속한 직후에 보내서 다행이지, 조금만 늦게 움직였으면 바깥으로 연락을 못했을 거야.’

한편으로는 용진명의 진의가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전서구를 잡으면서까지 예민하게 구는지, 굳이 나중에 왕림해도 되는 화산파를 왜 자신과 함께하는지.

‘지금 당장 따져 묻기엔 지체가 높은 관인이니, 동행하면서 지켜볼까.’

서문경은 속으로 의문을 갈무리했지만, 그날 밤에 아주 커다란 의혹에 직면해야 했다.

-공자님, 이거…….

-알아. 독이 들어가 있네.

종남산에서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장난질인가?

서문경은 헛웃음을 지은 채 검게 물든 은침을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네와 나를 노리는 적이 있는 모양일세.”

서문경뿐만 아니라 용진명의 은침도 검게 물들어, 모든 음식에 독이 들어가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서안의 지부대인과 서문세가의 일공자를 노린 독살.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기에 서문경의 경계심이 한층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성하민의 독심이 바짝 올라왔다.

“일단 저녁을 차린 사람부터 문초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말이 문초지 붙잡아서 죽이자는 어조였으니.

진정하라고 말을 덧붙인 용진명이 병사를 찾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런.”

저녁식사를 차린 병사가 풀숲에서 독살당해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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