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16화 (114/250)

의혹 (3)

* * *

“어찌, 나와 함께 종남산을 조사하겠는가?”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는 듯, 용진명이 서문경에게 의중을 물었다.

서안의 지부대인으로서 서문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한결 편해지리라는 심산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문경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있었다.

“저는 화산파로 가고자 합니다.”

“음? 왜인가?”

“종남산을 불태운 괴한이 한곳에 머무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의맹에 관련하여 볼일도 있고요.”

“……흐음.”

잠시 턱을 만지작거린 용진명이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동행해도 되겠나?”

“저야 괜찮습니다만, 화산의 산세가 험하여 힘드실 겁니다.”

“허허. 서문세가만큼은 아니어도 이 자리까지 오면서 호신법은 늘 익혀 왔네. 하물며 여기 있으면 내 눈치를 보느라 조사는 뒷전이지 않겠나?”

“그러겠지요.”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산의 화재를 조사하러 온 사람이 무려 서안부의 지부대인이라면 수많은 사람이 수레를 끌고 찾아올 게 뻔했다.

용진명의 얼굴에 얼핏 지긋지긋한 환멸이 스쳤다.

“여기선 내가 빠져 주는 게 조사에 열중하기 좋을 걸세. 그동안 화산에 가서 천도제 의식에 관한 이야기도 필요하고, 자네 말처럼 괴한이 그곳으로 향했을 가능성도 논해야겠지.”

“대인의 옥체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녹봉을 먹으면서 언제까지고 안온하게 지낼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가뜩이나 북적이나 왜구, 남만의 야만인들이 들끓고 있거늘.”

용진명은 진심으로 대명의 혼란이 심려스럽다는 투로 몇 가지 걱정거리를 중얼거렸다.

듣는 서문경으로선 그저 맞장구치는 것이 한계였다.

‘아무래도 무림의 일에 집중하면서 공적인 문제는 아버지한테 떠넘겼으니…….’

그러나 몇 가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황도에서 벌어지는 암투(暗鬪)가 생각보다 과격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정체조차 불분명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여자의 외모가 경국지색이라고 불린다는 것 역시.

서문경은 어렵지 않게 여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흑향인가.’

척안룡이 유독 증오스럽게 여기던 칠로두이자 전생에선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여인.

그녀의 존재를 서문이현과 여러 관인에게 이르긴 했지만, 용진명에게도 귀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리도 혼란스러운 시기에 경국지색이 나타났다면 의심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리 생각하네만, 미색만큼 지혜 또한 뛰어나서 얼굴과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자가 드물다는군.”

“으음.”

“부디 황상만은 꾀이지 않았으면 좋겠군그래.”

용진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서문경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관인 사이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대사부 주백경과 처음 보는 얼굴인 성하민.

자연스레 눈가가 가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허, 홍가와 파혼했다더니 저 소저 때문이었나?”

“오해입니다.”

서문경이 곧바로 정색하자 용진명도 끌끌 웃으며 농담을 접었다.

그 대신 화산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각만 기다려 주게. 그 뒤에 함께 화산파로 가지.”

“그러지요, 대인.”

서문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용진명과 나눴던 대화를 하나둘씩 곱씹었다.

‘고관대작치고는 흐릿한 인상에 서문세가에게 호의적인 문관이라…… 희한한 일이 있군.’

문관과 군관은 예로부터 줄다리기하듯 힘 싸움해 온 천적.

이 때문에 부패한 관리를 척결할 때도 서문세가는 여러 차례 불상사를 겪어야만 했다.

한데 문관의 중심에 위치한 용진명이 저리 호의적으로 다가올 줄이야.

일찍이 청해성에서 관리의 변절을 겪은 서문경이기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권력의 중심에 있는 서안부 지부대인이?’

서문경은 일행에게 손짓으로 의구심을 전달했다.

그걸 본 성하민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백경은 뜻이 달랐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짚지 못한 문제점을 짚어 주었다.

-공자님,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

그날 밤.

서문경은 용진명의 시선을 피해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 * *

며칠 뒤.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화산에 도착했다.

“……흐음.”

등을 펴고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 웬만한 성목(成木:다자란 나무)의 중간에 도달하니.

시력 또한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아, 사내는 화산파가 위치한 중턱을 흘낏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쿵, 쿵!

두 발이 달린 암석이 있다면 이러지 않을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등산로에 자국이 남아, 몸이 잔뜩 불어난 멧돼지보다 컸다.

그의 둔탁한 걸음은 화산에서 가장 유명한 협로(峽路)에서 멈췄다.

“좁군.”

새끼줄 몇 개로 만들어진 판잣길.

길의 왼편에는 낭떠러지, 오른편에는 절벽.

참으로 위태로운 협로이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매화잎의 비가 화려하게 흩날리니.

웬만한 강심장이어도 건널 용기가 나지 않아 등을 돌리는 협로이자 화산의 특수한 지형이 만들어 내는 절경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다른 것을 보았다.

“너무나 좁다! 이딴 터무니없는 길, 다 자란 사내가 지나기에 비위가 상해! 화산파가 가진 도량이 겨우 이 정도인가?”

협로를 두려워하거나 매화잎의 비에 감탄하지 않는다.

사내는 그저 길의 좁음과 시련의 유약함을 보고 비웃었다.

“겨우 이걸 건너는 것이 화산파의 시험이라면, 따르지 않겠다.”

사내는 입술을 씰룩이고는 판잣길이 아니라 절벽을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쩌저적, 쿵!

내공을 담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힘으로 절벽을 내리찍어 깎아 냈다.

오직 육체만으로 또 다른 길을 만들었으나, 사내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똑바르지 않아! 몸이 기울겠어!”

아직 첫 걸음이라서 미숙했는가?

사내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고는 재차 절벽을 내리찍었다.

“좋아, 이제 걸을만하군!”

새끼줄로 엮은 판잣길로 향하지 않고서 일보.

사내는 마치 평지를 걷듯이 절벽을 한 걸음마다 깎아 가며 앞으로 향했다.

화산파가 내준 숙제나 시련, 자격의 시험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웠다.

“내가 가는 길…… 어느 쪽도 치우침 없이 가리니.”

어찌 감히 도사 따위가 가르치려고 드는가?

사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스각!

수도에서 휘둘러진 풍압이 새끼줄과 판잣길을 동시에 잘라냈다.

“그나저나 꽃잎이 위에서 자꾸 거슬리게 구는군.”

매화나무도 뿌리 채 뽑아 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그때.

한 도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가던 새끼줄 위에 섰다.

끊임없이 발끝으로 내공을 수발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그 모습을 본 사내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잘랐더니 억지로 그러고 있는 이유가 뭐냐? 내공이 그리 썩어넘치냐?”

“네놈이 종남산을 불태운 괴한이더냐?”

도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적개심이 흘러넘쳤지만,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내가 먼저 물었으니 그쪽이 먼저 대답을 해야지. 어째 도사 놈은 한 번에 주절거리지 않는 거냐?”

“사문의 길을 무너뜨리고도 호의적이길 바라는 거냐?”

“이게 길이더냐? 누구 하나 뒈지라고 허술하게 만든 것이지.”

사내가 호탕하게 웃고는 뒷말을 덧붙였다.

“뭐,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내가 종남산을 불태운 놈이다.”

“……!”

“네가 상상하는 그대로 벌어질 거다.”

사내의 말에 도사가 새끼줄에서 도약했다.

칼끝에 실린 무공은 매화검법.

익히 보여 준 내공의 수발처럼 매끄러운 출수였다.

거대한 체구로는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한 검기가 오금과 겨드랑이의 힘줄을 동시에 노렸다.

그에 비해 사내의 반격은 비교적 단순했다.

“쯧!”

귀찮다는 듯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인다.

손이 닿을 만한 거리가 아닐뿐더러 수양명대장경에 내공이 흐르지도 않았다.

도사의 눈이 일그러졌다.

“감히 날……!”

얕보는 것이냐고 외치기 직전에 사내의 손끝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이건 마공이나 무공으로 가늠할 것이 아니었다.

‘무슨 힘이!’

절벽을 내리찍어서 길을 만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런 건 터무니없지 않나!

도사는 속으로 사내의 힘에 혀를 내두르며 화경의 기교를 부렸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힘 앞에서는 기교조차 무력했다.

“……커윽!”

돌풍에서 갑자기 튕겨져 나간 돌 하나.

탄지공보다 수배의 힘이 담긴 돌멩이가 도사의 가슴팍을 후려친 것이다.

한순간에 뼈가 으스러지고 숨이 막혀, 도사는 보신경을 펼칠 새도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너 같은 건 이거면 족해.”

사내가 히죽 웃으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귀찮게 구는 놈도 없어졌으니 화산파로 가서 한꺼번에 처리할 요량이었다.

“이게 강자의 방식이지.”

상대가 방심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힘으로 분쇄하는 것.

그것이 사내, 백야흔의 길이었다.

* * *

“할아버지! 식사 가져왔어요!”

어린 남매가 채소와 곡식으로 이루어진 식판을 들고 다 무너져 가는 암자로 다가갔다.

얼핏 보기엔 빈자가 사는 곳으로 보이겠으나, 실상은 달랐다.

무당파의 최고수이자 오걸 중 일인인 진무신검.

그의 일상은 소탈하다 못해 자연인과 같았다.

“물도 길어 왔고, 또…… 너무 옷이 해져서 옷감도 가져왔어요! 제가 꿰매 드릴게요!”

남매의 외침에도 암자에선 어느 말 없이 고요했다.

혹시 못 들었을까 싶어서 여자아이가 더 크게 외쳤다.

“엊그제처럼 여름이니까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고 하시지 마세요! 고수도 벌레한테 물리잖아요!”

“할아버지! 저 팔 아파요!”

다시 한번 크게 외쳐 봐도 돌아오는 것은 고요함뿐이니.

도경을 읽다가도 남매가 찾아오면 환한 얼굴로 반겨 주는 진무신검답지 않았다.

“할아버지……?”

남매 중 그나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가 암자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진무신검이 직접 남긴 편지가 있었다.

-너희에게 남긴다.

첫줄만 보더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항아리와 옷감을 내려놓았다.

-지난 삼 년 동안, 너희가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돌보았다. 처음에는 도문의 일상이 불편한 옷 같았겠지. 매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야 하니 말이다.

너희 나이 때, 그게 얼마나 참기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단다.

“할아버지…….”

어느새 다가온 여자아이가 코를 훌쩍거렸다.

남긴 것은 글씨뿐이지만 진무신검의 부드러운 미소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남매는 사이좋게 뒷내용으로 넘어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희가 말했지. 우린 배우지 못하여 이런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날지도 모른다고. 명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 것이라며.

하나 지금은 어떠냐?

도와 덕을 알고 의와 리를 아니, 명가에서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명가의 아이와 다를 바가 없으니 배운 사람이지 않더냐?

너희가 그리 되길 바랐다.

참으로 흡족한 일이야.

얼굴을 보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화산에 볼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게 되었구나.

녀석들.

친구끼리 논다고 열흘에 한 번 오고 말이야.

다음에 보면 내 섭섭함이 얼마나 큰지 말해 주마.

할아버지가 남김.

편지의 마지막까지 읽은 남매가 코를 훌쩍거렸다.

아주 예전부터 남아 있던 열등감이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이 모두 진무신검이 남긴 은혜인지라, 남매는 자연스럽게 화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부디 건강히 잘 돌아오길 바라면서.

* * *

“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하여 왔더니…….”

햇볕을 피하기 위해 갓을 쓴 도사가 화산 중턱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멀리서도 보일 만큼 자욱한 먼지구름이 산 능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재해가 일어난 듯한 광경에도 도사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가 볼까.”

도사, 진무신검은 갓을 등에 묶고서 등산로에 올랐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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