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2)
붉게 타오르는 종남산.
회색 연기가 자욱한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도교의 영산이…….”
“앞으로 천도제는 어디서 지낸단 말인가!”
종남산에서 출발하여 영글어진 도맥(道脈).
우연히 화마를 피한 도사들이 땅을 치며 울거나 강에서 물을 길어 오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종남파에게 도움을 받은 현민(縣民)이나 관인도 허겁지겁 나온 모양새였다.
서문경은 그들 중에서 가장 지체가 높아 보이는 장년인에게 다가갔다.
“어허, 물러나라!”
곁에 있던 무사 하나가 으르렁댔으나, 장년인은 서문경의 옷깃을 보고는 두 손을 모았다.
“장 무사, 실례를 범하지 말게. 저 청년은 서문세가의 일공자일세.”
“……헉.”
그 말에 장 무사가 숨을 삼키고는 결례를 범해 죄송하다는 듯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가볍게 내젓곤 내민 칼을 다시 밀어냈다.
오랜 법식과 관경(官景)의 예였다.
그보다 장년인에게 말을 붙이는 게 급했다.
“서문세가의 첫째 아들, 서문경이라고 합니다. 제가 식견이 짧아 대인을 알아보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허허, 서문세가는 사천성의 중경부에 있지 않나. 거리가 멀고 행정도 중경과 이어질 테니 모를 만도 하지.”
“아닙니다. 제가 먼저 알아봤어야 하는데요.”
“장 무사에게 예를 취한 것만 봐도 충분하네. 내 체면을 살려 줘서 고맙네.”
나이가 어린 서문경이 오랜 예법을 안다는 것 자체가 좋게 보였던 걸까?
비록 종남산이 불타고 있어, 함부로 웃지는 않았으나 장년인의 눈빛에 호의가 담겨 있었다.
“서안부의 지부대인인 용진명(勇鎭溟)이네. 서문세가와는 연이 닿지 않아 줄곧 아쉬웠네만, 오늘 채우게 되겠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문경은 장년인의 신분을 듣고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예로부터 전진교를 중심으로 하여 매년 황제가 천도제를 치렀던 섬서성 서안부.
그곳의 지부대인이라면 서문세가 앞에서도 기침 쯤은 할 수 있었다.
‘지체 높은 관직에 있는 것치고는 인상이 흐린데.’
“그나저나 종남산이 이렇게 불타서야 앞으로 천도제는 어찌 치러야 할지 모르겠군. 황상께서 애통해하시겠어.”
용진명의 중얼거림에 서문경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도제란 민심을 다스리는 것과 동시에 천자(天子)라는 정통성을 분명히 하는 제사.
그 상징을 불태운다는 건 어떤 글줄보다 큰 도발이며 천벌이 두렵지 않다는 오만함이니.
“마교가 그런 것입니까?”
“아직은 조사 중일세. 어느 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마교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겠지. 사담(私談)이니 다른 곳에 말하진 말게.”
“……종남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침 하산한 도사를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내려온 적이 없네.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방화겠지.”
용진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붉게 물든 종남산과 잿빛 연기를 바라보다, 아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자네가 구파일방을 돌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네, 아마 이르게 도착했다면 저 방화에 엮었을 걸세.
-저를 노렸을지도 모른단 겁니까?
-참관(參官) 중 하나가 그리 말하더군. 다른 하나는…….
-저나 다른 문파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군요.
-……영특하군.
정의맹으로 군집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겁박과 의심암귀.
하물며 이런 식으로 종남산을 불태울 수 있는 건 내부의 도맥이나 제자, 장로일지도 모르기에.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마교를 걸러낼 그물이 충분히 촘촘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니지. 내 주위에도 둘째나 셋째 아들을 도문에 입적시키는 가문이 있으니…… 속가제자라는 계급이 존재하는 이상 무림은 완벽하게 마교를 배제할 순 없을 걸세. 구시대부터 반역을 준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일대제자나 장로 중에도 존재할 것이야.
용진명은 속가제자에 얽힌 악습 중 하나를 짚었다.
명가에서 형제끼리 싸우는 걸 막기 위해 무림 문파의 제자로 보내 버리는 것.
그 처지라면 마교에 입교하는 숫자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문제는 그것이 관무불침이 유지되는 이유 중 하나인지라, 서문경도 뜯어고치자고 할 수가 없었다.
-하면 지부대인께서는 내부 소행으로 여기시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더 큰 문제로 번질 걸세. 다른 도문인 화산파를 의심하게 되도록 둔다면…… 같은 뿌리를 지닌 두 도맥이 싸우게 될 테니까.
-으음.
전진교의 도사를 개파조사로 둔 도문끼리 싸우게 된다?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
하물며 여동빈의 가르침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도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도문끼리의 내분.
‘가만히 있는다 싶더니 이런 짓을?’
청마가 할 짓이긴 하지만, 최근에 조용하게 굴지 않았던가?
서문경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존재했다.
‘청마라면 이렇게 지부대인이 버선발로 나올 만큼 일을 크게 벌이진 않아. 조금 더 단순하고 성격 급한 놈이 벌였을 거야.’
서문경의 고민이 거기까지 도달한 그때.
존재감이 희미한 남자가 용진명 옆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흠.”
용진명은 아무 일도 아닌 척 헛기침만 했지만, 서문경의 귀까지 피해 갈 순 없었다.
그건 주백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덩치 큰 남자가 종남산 주변에 서성거렸었다고 합니다. 이 근처 토박이에게 들은 정보이니 진실일 거라는군요.
-나도 들었어.
서문경은 팔짱을 끼고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덩치 큰 남자라면 칠로두 중에선 백야흔.
패도적인 성정에 걸맞게 단신으로 장강의 물길마저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놈이라면 화산파도 찾아갈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종남산의 상태를 지켜보느냐, 아니면 곧바로 화산파로 출발하느냐.
어느 쪽이든 선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 좋아서 살기 좋다던 곳 아니었습니까?”
“…….”
“종남산이 불타는 동안 사부는 왜 가만히 있었던 겁니까?”
“넌 몰라.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
그 말에 양명성은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검치를 흘겨보았다.
“차라리 그 망할 가문에 남는 것이 나았습니다.”
“……뭐라고?”
“자기 가족 아니라고 막대하고, 집구석에서 기르는 개만도 못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나한텐 떳떳했습니다. 고개 빳빳이 처들고 살 자신이 있었단 말입니다.”
불타는 종남산과 죽어간 도사들, 흉심을 드러낸 채 웃는 마인.
그 광경을 보고도 검치가 나서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양명성 자신이 나서는 것을 붙잡지 않았나.
“그놈한테 죽게 두셨어야지요.”
“죽겠단 소리를 아주 쉽게 뱉는구나.”
“예! 삼 년 동안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다 보니 이제 좁쌀만 한 이빨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
“요즘 사부를 보면 그냥 무력해 보입니다. 장난기도 사라지고 겁에 질려서 빌빌대는 것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양명성 이놈아.”
검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번천광검결이라는 무공을 배웠어도, 오걸과 동렬인 힘을 지녔어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 세력의 힘이었다.
한 번의 싸움은 이길 수 있어도 그것이 수십, 수백 번이 되면 어찌 될까?
사람은 마모되고 지친다.
그 경험을 제자에게 대물림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언젠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 아들 같아서 들였다고, 아들 같아서 더욱 몰아붙이는 거라고.”
“압니다.”
“이번에도 똑같다. 마교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야.”
“겁쟁이처럼 들립니다.”
삼 년 전, 장난꾸러기 같던 청년은 약관이 되어 큰 뜻을 품기 시작하였으니.
검치가 아무리 어려움을 논해도 뜻이 꺾이지 않았다.
내리누를수록 튕겨 나가려는 반골(反骨)마저 심중에 있었다.
그것을 어찌 검치가 모르겠는가?
한때 그 대의와 반골 때문에 마교와 싸웠던 것을.
“옛날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부디 자신의 과거사를 듣고 마음을 바꾸길 기원하면서.
검치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던 기억을 하나하나 들춰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뼛속까지 검객(劍客)인 검치에게 재담꾼의 재주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마교와 연을 끊고 은거하기 전에 너와 만난 것이야.”
“…….”
“이제 마교와 엮이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겠느냐?”
“예.”
“좋아, 그렇다면…….”
“저도 그 길을 걸어보겠습니다.”
그 말에 검치가 주먹을 쥐었다.
“원숭이라서 말귀를 못 알아처듣는 것이냐? 몇 번을 말해야겠느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사람보단 그냥 원숭이가 낫지요.”
“……뭐?”
“그날 양가에서 사부를 따라간 건 고수라서가 아니고, 몸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양명성은 검치에게 깊은 실망감을 품고서 중얼거렸다.
“홑몸으로 불합리를 이겨 냈다고 하여, 사부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
“한데 지금의 사부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펴 준 종남산의 도사를 죽도록 두고,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체하고, 도망치는 것에 열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할수록 분노가 쌓여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무엇보다, 검치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양명성은 그 점을 콕 짚었다.
“그리고 사부가 싸우기를 포기한 건, 그 이후에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닙니까?”
“……그건.”
“단순히 마교와 싸우다가 져서? 부족함을 느껴서? 제가 아는 사부라면 그걸로 포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저한테 다 말해 주는 척 몇 가지를 숨기신 거겠죠.”
“…….”
“예전부터 양가에서 저를 왜 데려갔는지 대충 농담으로 넘기셨잖습니까. 지금 그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양명성은 진지한 눈으로 검치를 직시했다.
한때 양가의 방계로서 방 한 칸에서 감금당한 채 부모까지 잃은 아이를 무리해가며 데려간 이유.
줄곧 농담으로 넘어가던 그 이유를, 검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아들 같아서였다.”
“…….”
양명성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검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지만 못했다.
지금까지 검치와 지내온 나날은 차갑게 자르기 어려울 만큼 안온하고 따뜻했으니까.
이제야 깨달은 점이 있다면…… 사제보다는 부자 관계에 가까웠다는 것.
검치가 자주 입에 담은 말은 ‘그게 아니다’는 꾸짖음보다 ‘네 맘대로 해 보든가’라는 농담이 많았다는 것.
양명성의 아랫입술이 자그맣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입에 담은 양명성은 검치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끝내 단어 하나를 달싹였다.
“아버지. 저는 가야겠습니다.”
“…….”
“이미 삼 년 동안 충분히 외면했어요. 하물며 종남파는 이름도 안 밝힌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 줬고요. 이 은혜를, 도의를, 또 무시하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명성아.”
“저라도 가서 말려야겠습니다.”
양명성은 종남파의 정문을 단신으로 돌파하던 마인을 떠올렸다.
덩치는 집채만 했고 팔뚝이 웬만한 기둥처럼 두터웠다.
그 손에 몇 사람이 찌그러졌는지 모른다.
검이 박히지도 않을 만큼 단단한 피부를 지니기도 했다.
“번천광검결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죠.”
양명성은 아버지에게 배운 무공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검치가 심중에 담고 있는 두려움과 후회를 타파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때 천하무적이 되길 원했으나, 마교와 싸우고 무너졌다면…… 내가 대신 이루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안 된다.”
“내가 그놈을 꺾겠습니다. 그게 사부가 원했던 배움이고, 아버지에게 드리는 복수이며…… 은원의 정리겠지요.”
그 말을 끝으로 양명성은 검치에게 등을 돌렸다.
바라보는 곳은 화산.
종남산을 불태웠던 마인이 다음 표적지로 논한 곳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