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1)
‘아슬아슬했어.’
공천봉에서 벗어난 서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현견과 마주쳤을 땐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아예 급습해서 마교처럼 굴어 볼까, 아니면 멋쩍은 척 뒷머리라도 긁을까.
분심조화결로 별 시답지 않은 고민을 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내가 강호로 나온 건 무림의 구심점을 정의맹으로 삼기 위한 거였으니까.’
단순히 구파일방의 무공을 견식하고 익히는 것이라면 이렇게 강호를 떠돌지 않아도 됐다.
가장 중요한 건 마교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
그걸 위해서 공동파의 고인(古人)을 흉내 냈다.
‘천주심경을 내려놓긴 했지만, 아쉽지는 않아. 애초에 공동파의 도사가 남긴 무공이었을 테니.’
전쟁은 맹장(猛將) 혼자서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지금의 마교는 북적이나 남만, 왜구를 이용해서 대명을 압박하고 있지 않나?
서문세가가 아무리 뛰어나도 두 손으로 수십 개를 당해 낼 순 없다.
현명한 사람은 혼자서 잘 싸우는 게 아니라, 남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자였다.
그래서 기연으로 얻은 천주심경을 공동파에 반환하면서 정의맹으로 끌어들이는 꾀를 썼는데, 과연 어떻게 될는지.
‘운룡대팔식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의심하는 모양새이긴 해도…… 청마에게 복수하려면 정의맹에 합류해야 할 테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름대로 꾀를 낸 결과가 어떨까?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가문 내에서 수련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바깥으로 나오니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강호의 무공은 참으로 배울 게 많구나.’
깊게 궁리하여 공동파의 무학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현견을 현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룡대팔식을 익힌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서문세가의 보신경으로 봉우리에서 풀쩍 뛰어내렸다간 실족사했을 테니까.
‘공동파의 무공을 이해하면서 다르게 보인 것도 많아.’
전생에서 편협한 시선으로 보았던 구파일방이 이제야 새롭게 보였다.
높은 산이라는 한정된 지형에서 사는 곤륜파는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운룡대팔식을 만들었고.
자존심 강한 도사가 사는 공동파는 오로지 사문의 검법만으로 거대한 흐름을 지닌 대주천복마검을 창안했다.
복마관주 현백의 외골수가 대주천복마검의 요체라고 이해하니 다른 면모가 보였다.
‘우리가 외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사명이라면, 도문은 도경에서 비롯된 깨달음과 오래전부터 이어진 고집을 가꿔서 일문(一門)의 무맥을 이룬 거야.’
절대 무림인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선을 그었던 경계가 조금이나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왼손에 쥔 신비한 무공사전을 흘낏 곁눈질했다.
‘이 기물 때문에 참 많은 걸 알게 되었지.’
무공의 의의는 언제나 살인일 뿐, 구파일방이 말하는 수양 따위는 구실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 무공에 담긴 행간과 역사를 알게 되니 무지가 이해에 가까워졌다.
자연히 오성 또한 밝아졌다.
이 무공이 왜 창안되었는가?
창안한 사람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면 같은 초식을 펼치더라도 검형(劍形)과 심상이 똑바르게 서기 마련이다.
가전무공 또한 진일보를 이루어 서문패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수준에 도달했다.
‘아버지가 알면 너무 시일을 소모하는 거 아니냐고 타박하시겠지만 뭐, 내 알 반가.’
정의맹을 중심으로 한 회합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칠십여 일.
앞으로 방문할 구파일방이 여섯이나 남은 시점에서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최대한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가는 도문마다 이런 일이 생기겠어?”
서문경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공동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서문 공자, 떠나기 전에 들을 소식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무림맹에서 회합의 이름이 정해졌다는 전서구가 왔네.”
연무회전(演武回轉).
작명만 들어도 무슨 회합이 될지 감이 왔다.
서문경의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에 현견이 지레짐작하여 말했다.
“아마 고수끼리 논검(論劍)이나 비무를 통해 우위를 논할 걸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른에게 맡기지 않겠나?”
“마교의 존재를 밝힌 제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어른으로서 조언하겠네.”
현견은 자세를 고치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기개는 높이 사지만, 복마관주 같은 고수와 여러 번 부딪치면 필시 상처를 입게 될지 모른다.
게다가 서문경의 존재를 불쾌히 여긴 노고수가 있다면 근맥을 은밀하게 노릴 터.
이러한 설명을 모두 듣고도 서문경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외려 현견이 내심 숨기고 싶었던 점을 짚었다.
“듣기로는 오늘 어느 봉우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데, 뭐였습니까?”
“공동파의 어지러운 분위기를 바로잡을 기연이 있었네.”
“……?”
“자세하게는 말할 수 없으나 앞으로 마교와 대적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자부함세.”
“다행입니다. 연무회전에서도 뵐 수 있겠네요.”
“하하, 공동파에 찾아온 홍복(洪福)인 게지. 못 본 사이에 복마관주의 무위가 한층 진보할 거야.”
현견이 딱 잘라서 말하는 태도에서 자신과의 만남을 귀한 기연으로 각인한 것처럼 보였다.
서문세가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갑(甲)급 기밀.
대주천복마검과 짝을 이룰지도 모를 천주심경의 존재는 새로운 무맥이 탄생할 여지로 판단한 거겠지.
‘설마 공동파의 역사에 기록되는 거 아냐?’
서문경은 왠지 낯이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슬며시 돌렸지만, 현견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아무래도 큰 결심을 품은 듯했다.
“연무회전에서 공동은 자네를 지원하겠네.”
“왜입니까?”
“자네의 호위무사가 본산의 제자를 구하고, 자네 또한 울타리를 보수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나.”
현견의 눈동자가 서문경을 담았다.
아직은 너무 어려 담대함이 크고, 가진 재능을 과신하여 복마관주와 백 합의 승부결을 도전하는 청년이었다.
이대로라면 연무회전에서 허무하게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
“공동은 은원을 잊지 않네.”
현견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서문경의 반응을 기다렸다.
보통 청년에게 이런 말을 하면 큰 감동을 받거나 두 손을 모아 올릴 테니까.
내심 지원 받기로 한 오명목을 더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표정은 여전히 의뭉스러웠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연무회전에 도착하기 전에 든든한 아군을 맞이한 것 같네요.”
“…….”
“연무회전이 끝나고 나면 다시 공동산에 들르겠습니다.”
“그, 그러게.”
뭐 저리 건조한 반응이란 말인가?
현견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서 입술을 달싹였다.
“공동의 무학을 배우게 되었는데 혹시 오명목을 더 받을 수 없겠나?”
“그땐 또 다른 내기를 하거나 충분한 값을 내야겠지요.”
“얼마인가?”
그 말에 서문경이 은근슬쩍 손가락을 몇 번 폈다가 쥐었다.
……만만하게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현견은 혀를 가볍게 찼다.
“예전부터 서문세가와 본산은 긴밀한 사이였는데…… 이런 식으로 금전에 집착해서야.”
“죄송합니다. 제가 소가주에서 물러나, 가격을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쯔읍.”
현견이 재차 혀를 차도 서문경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 무림을 보는 눈이 달라지긴 했지만, 도사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그럴 듯하게, 대충 감동적인 말을 떠들고서 마음을 사는 전법이겠지.’
저런 술수에 당해서 도문에게 재산을 내놓고 군으로 투신한 병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공은 공, 과는 과.
마교와 함께 싸울 아군이라고 해도 계산은 철저해야 했다.
“값을 대신할 재산이 있습니까?”
“……도경은 절대 안 되네!”
“제가 설마 도문의 책을 탐내겠습니까? 그보다 도움이 될 만한 걸 제시해야지요.”
“허, 군문의 공자라는 사람이 장사치처럼 구는가?”
“예. 장사치하겠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시지요.”
“으음.”
잠시 턱수염을 매만지던 현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하게 기르던 아이들이 있으니, 중간에 버리지 말고 꼭 관청에라도 맡겨 주게.”
* * *
따그닥, 따그닥.
서문경과 주백경, 성하민은 각자 말을 타고서 관도를 질주했다.
귀하게 길렀다는 게 허언이 아닌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편자와 안장도 말에 맞춰서 만든 것 같은데. 이러면 내가 이득이지.’
서문세가가 오명목을 독점하고 있다고 한들, 결국 나무.
날씨를 크게 가리지도 않았다.
그저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문 소유의 섬에서 기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주백경이 피식 웃었다.
“목재로 말을 사다니, 기적의 거래가 아닙니까?”
“한정된 자원이잖아. 그만큼 가치가 높은 거지.”
서문경은 아무렇게나 둘러대고는 상반신을 앞으로 숙였다.
청마가 공동산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언제 어디서 마교가 나타날지 모르니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됐다.
특히 관도에 쇠줄을 설치해서 낙마를 노린다면 고수라도 즉시 반응하기 어려웠다.
“주변 경계 잘해.”
“그거야 당연하지.”
성하민이 말의 목줄을 휘어잡고는 공력을 운용했다.
뭉쳐있던 실타래가 한순간에 풀려 나가듯, 내공으로 이루어진 실낱이 세 인마(人馬)를 둥글게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의 눈가가 커졌다.
‘내가 앓는 척하는 동안 뭘 연습하나 했더니만…….’
한 줌의 내공을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서 주변을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호신강기처럼 구성하니.
완벽한 공력 운용이 있어야만 가능한 기예였다.
‘나야 신비한 무공사전과 전생의 기억이 있다지만, 가끔 보면 불합리하다니까.’
대체 성하민의 재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마교가 그녀를 잡아가려던 이유가 저 재능이었을까?
서문경은 최근에 말이 부쩍 적어진 성하민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등 뒤에서 달라붙어 오던 주백경이 전음해 왔다.
-소저도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이던데 조금 기다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뭐야, 관심법이라도 익혔어?
-도둑놈에게 익힌 수견법(水見法)이라는 겁니다. 다재다능한 잡기 중 하나죠.
-……무영신투한테 잡혀 살더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익혔구나.
-저를 그 자한테 떠넘겨서 그런 거잖습니까?
-이제 맞먹으려고 드는구나.
-설마요.
그렇게 두 남자가 전음으로 잡담하는 사이, 성하민은 멀리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생명이 기거하는 지역이 통째로 불타는 재난.
어린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에 닭살이 돋았다.
“……산.”
“뭐?”
“산이 불타고 있어. 틀림없어. 바람에 잿가루가 섞여 있으니까.”
성하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어조에서 공포를 느낀 서문경과 주백경이 잡담을 멈추고서 시선을 멀리, 그리고 높게 들었다.
“……저긴, 종남산이 있는 방향인데.”
설마 저 멀리서 날아오는 불싸라기가?
서문경은 불안함을 꾹 내리누르고서 외쳤다.
“말은 중간에 관청에 들러서 바꾸고 달릴 거야! 쉬는 시간은 도착하고 나서다!”
“예!”
“…….”
세 마리의 말이 석양을 등진 채 종남산을 향해 달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