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13)
다음 날 새벽.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쥔 채 인적 없는 봉우리로 향했다.
“……후우.”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뺨을 쓸어내린다.
오랫동안 방치된 암자가 수십 년 동안 방문자가 없었음을 어렴풋이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좋아, 잘 찾아왔네.’
서문경은 왼손에 신비한 무공사전을 쥐고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찌르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각.
밤잠 없는 노도사조차 눈을 뜨지 않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까닭은 단 하나.
‘종남파로 출발하면 공동의 무공을 펼쳐 볼 시간이 남질 않을 거야.’
현백과의 비무에서 얻은 무공.
두 눈으로 직접 담은 대주천복마검의 흐름과 무학.
그 경험을 시간이 흐르기 전에 체화하고 싶었다.
병자인 척하며 누워 있는 동안 몸이 근질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누워서 비무를 복기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뭐, 무공사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스르륵.
엄지손가락으로 무공사전의 책장을 넘기니 여러 무공이 스쳐 지나갔다.
[대주천복마검]
[복마검]
[개천검]
[삼절검]
[소양검]
복마관주 현백이 수십 년 동안 검을 휘두르며 쌓은 무학이 무공사전에 수집되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지. 겨우 한 번의 비무에 이렇게 많은 무공을 수집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여러 날에 걸쳐서 의문을 곱씹었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대주천복마검.
공동파의 검법을 한가득 담아, 거대한 흐름으로 휘두르는 상승 무학.
그 무공을 수집하면 다른 검법도 알게 되는 셈이었다.
“시험해 볼까.”
서문경은 팔을 뻗어서 땅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명상.
현백과의 비무를 상단전 심상에 떠올렸다.
눈으로 본 것과 직관, 그 당시의 발상.
비무한 기억을 세 가지로 분리해서 나선의 형태로 쌓았다.
기억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니라, 무학을 궁리하는 자세로 파편을 긁어모아서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
완전히 떠올렸다고 한 순간,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공사전은 손에서 놓았다.
기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의로 해석한 대주천복마검을 시연해 볼 참이었다.
스윽.
이른 새벽의 운무(雲霧).
공동산의 봉우리에 가득한 습기를 나뭇가지로 베며 전진했다.
하단전의 공력이 분연히 일어나, 나뭇가지에 맺혔다가 검기로 유형화했다.
“……소양검.”
서문경은 입술이 달싹였다.
아직은 대주천복마검을 눈으로 보고 이해한 수준에 불과했기에, 검법의 이름을 직접 내뱉으며 형상을 떠올려야 했다.
그 직후.
스르륵…….
형상을 제대로 갖추진 못했으나, 검력이 담긴 검기가 운무 중앙을 베고 흩어졌다.
서문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건가?”
현백과의 비무에선 가히 본능에 따라 휘둘렀다.
무학에 관한 이해를 배제한 채 따라 하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어린아이가 학문을 공부하여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이니.
서문경은 병석에서 복기하고 무공사전에서 읽었던 무공을 하나둘씩 허공에 휘두르길 반복했다.
“확실히, 내가 했던 것과는 다르네.”
현백과의 비무 중 후반 칠 초식.
그땐 대주천복마검을 보고 베낀 형식에 따라 서문검법을 휘둘렀다.
검기의 형상을 처음부터 고정시킨 채 휘둘러, 대주천복마검처럼 현묘한 이치보단 무식한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것 때문에 서문경의 심기가 줄곧 불편했었다.
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
병석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가 오늘, 지금 이 순간.
“무형(無形)이 아니라 깊은 흐름의 검해(劍海)였구나.”
처음 현백의 대주천복마검을 봤을 때, 무형의 검기를 휘둘러서 부딪치는 순간에 형태를 이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펼쳐 보니 그렇게 단순한 검법이 아니었다.
공동의 검으로 이루어진 바다.
영산에서 오랫동안 좌선좌공으로 쌓은 공력으로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의지에 따라 물결을 퍼 올려 휘두르는 검.
‘이래서 자답하는 힘이라고 했나.’
공동파의 검법에 대한 이해와 애정, 심후한 공력을 비롯해 금강에 가까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는 상승 검법.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니 고집이 강한 노고수로만 보였던 현백이 다르게 보였다.
또한, 천주심경과 비슷한 부분이 보여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지에 따라’인가. 이건 천주심경과 비슷한 느낌이네. 아마 창안자도 대주천복마검을 익힌 노도사였겠지.’
이제야 선후가 제대로 보였다.
천주심경은 아주 오래 전 대주천복마검을 대성하여, 안에 담긴 무학을 심공으로 응용할 수 있는 노도사였을 터.
그렇다면 천주심겅에 공동파의 무공을 실을 수 있지 않을까?
서문경은 문득 든 호기심을 풀기 위해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뿌득.
자고 일어나서 처음으로 몸을 풀어 내니 관절과 근육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칠상권]
[침투경(浸透經)의 무학과 상통하나 더욱 흉악한 힘을 지닌 권법. 익히는 방법이 잘못되면 수련자의 몸까지 상할 수 있다]
‘이런 걸 나한테 펼쳤었단 말이지.’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서문경은 현백의 투지를 떠올리곤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나 천주심경의 기둥이 실린 칠상권은 가볍게 혀를 찰 수준이 아니었다.
쩌정!
운무가 일거에 흩어지며 한순간 아침 해가 뜬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이건 침투경이 아니라, 팽가 수준의 도법인데?’
서문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상단전 심상이 담긴 절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력을 많이 담지 않은 칠상권이었다.
한데 그 위력이 수십 년 공력의 권법에 밀리질 않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칠상권의 무학을 파악해서 서문권법에 합쳐 볼 생각을 해야겠는데.’
이대로 칠상권을 펼쳐 댔다가는 언젠가 공동파에게 항의를 받게 될 테니까.
잠시 턱을 매만진 서문경은 칠상권에 이어 개천검과 소양검을 펼쳤다.
쩌적!
쿠구궁!
하나 같이 엄청난 굉음이 휘몰아쳤다.
원래 하나였던 검법과 내공심법이 합쳐진 것 같았다.
‘이러다가 누가 찾아오는 거 아니야?’
걱정이 한순간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걸 어쩌겠나.
무학에 관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참을 수 없었다.
공동파의 무공을 펼치며 천주심경과 어떤 지점에서 합일하는지 골몰하고 궁리했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났을 때쯤인가?
“거기 누구시오?”
저 멀리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공천봉(貢天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장문인.”
“매해 제를 지내는 곳 말인가?”
“예.”
“이 새벽에 제자들의 심기가 불안할 만하구나. 다른 말들이 오가지 않게 너희가 안심시키거라. 직접 가 보마.”
왜 하필 지금 기사(奇事)가 일어난 것인가?
현견은 불편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청마가 이대제자를 상처 입히고 서문경이 대주천복마검의 무학을 어렴풋이 깨달은 이때…… 참으로 공교롭구나.’
심지어 공천봉은 매해 삼청에게 제를 지내는 공간.
공동파의 명운을 뜻하는 봉우리였다.
그곳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면 제자들이 귀신같은 헛것을 보았다고 주절거릴 게 뻔할 터.
현견은 점차 터오는 햇볕과 함께 정문을 나섰다.
……파앙!
터엉!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파공성은 깊어지고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었다.
‘공동산 상부의 운무마저 밀어내는 검력이라니. 예삿 인물은 아니겠구나.’
설마 공천봉의 중대함을 알고 찾아온 외적은 아닐까?
현견의 눈가가 자연스럽게 가늘어졌다.
“거기 누구시오?”
“…….”
“사람이라면 응당 대답을 하시오.”
“……허어.”
단 두 음절.
거기까지 말한 사내가 안개 사이로 숨어들었다.
‘목소리만 듣기에 제법 젊은 것 같기도 한데…….’
현견이 목소리만을 듣고 연배를 파악하기 직전, 다시 안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인(古人)을 보고도 인사가 없느냐?”
“이름을 밝혀야 내가 알 것이오.”
“이름?”
비웃음이 담긴 반문에 현견이 발끈하려는 찰나.
쩌엉!
사내의 일검이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소양검?”
아주 잠시였지만, 현견은 일검의 정체를 보고 경악했다.
소양검이란 공동파의 입문 검법.
수십 년의 공력을 담은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펼칠 수 없을진대, 사내가 손쉽게 해냈다.
“보였느냐?”
“소양검이요.”
“틀렸군.”
현견이 볼 수 있는 거라곤 안개 너머의 사람이 팔을 휘두르는 것일 뿐.
그러나 그 뒤에 펼쳐진 검은 아주 익숙했다.
개천검.
소양검과 마찬가지로 공동파의 입문 검법이자 복마검에 가까워지기 위해 익히는 기본 중 하나.
그 검에서 휘둘러진 검기가 운무를 관통하고 봉우리와 인접해있던 나무를 관통했다.
쿠구궁…… 터엉!
나무가 옆으로 무너지며 굉음이 일어났지만, 운무는 여전히 깊었다.
‘누군지 확인해야겠군. 과거에 은거한 전대 선배일지도 모르니.’
현견이 앞으로 향하려고 할 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어라.”
“사문의 선배라면 제가 직접 마주하고 예를 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 멈추라고 하시는지요?”
“너희가 망신을 당했다고 하여 찾아온 것이지, 속세의 일에 개입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하면……?”
“가르침을 주마.”
스슥, 슥.
사내가 주위의 바위에 무언가를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한데 그 모습이 종이에 붓을 끼적이는 듯 무척 자연스러웠다.
엄청난 공력을 지닌 고수임이 틀림없다.
‘서문 공자는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끙끙 앓았으니…… 반로환동한 선배인 건가?’
목소리가 젊은 것이 계속 걸렸지만, 가르침을 준다는데 굳이 딴소리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현견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무엇을 남기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공동파의 심공, 주천경(柱天經)이다. 내가 보여준 초식 모두 주천경을 실어서 펼쳤지.”
“……아!”
“내가 계율을 어겨서라도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는 청마 같은 마인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부디 성함이라도 알려 주시지요.”
“…….”
현견의 간곡한 부탁에도 사내는 아무런 답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여기까지도 현견은 사내의 정체를 의심했으나, 그가 남긴 주천경을 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공동파의 가르침을 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심공이다.’
의지만으로 하늘에 도달하라.
대주천복마검에도 남겨져 있는 공동파의 뜻이었다.
하물며 그것을 심공에 접목하여 상단전 심상을 구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대종사(大宗師)로 자칭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니.
현견은 사내가 사라진 족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봉우리에서 훌쩍 뛰어내리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이곳은 매해 천상에 있는 삼청에게 제를 지내는 공천봉이다.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여 몸을 의지할 데가 없을 터인데, 사내의 행방은 안개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참으로 신묘한 만남이었구나.’
현견은 주천경을 주의 깊게 외우고는 하늘을 향해 도호를 중얼거렸다.
“대도무량…… 선배가 천하의 평안을 원한다면 이 후배 또한 따르겠소이다.”
서문세가와 정의맹.
사내가 남긴 뜻을 이루려면 마교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맹회에 들어가, 다른 구파일방의 도문이 함께하도록 독려해야 할 터.
현견은 그렇게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