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12)
-연기인 거 다 보여.
-아…… 들켰어?
서문경은 성하민에게만 보이게끔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지치기는 했지만, 어깨에 기대서 기력을 전부 소진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면 왜 지친 척하는 걸까?
성하민의 눈가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전부터 자꾸 내 어깨에 기대는데…… 이번에는 의심병 때문이야?
-의심병이라니, 합리적인 거지. 그 속내 시꺼먼 청마 놈이 아이구, 잘 봤습니다. 하고 꺼졌을 리가 없잖아.
-공동파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데 능한 놈이니까. 수하를 썼을 가능성도 있고.
현백과의 비무에서 기력을 전부 소진하고 주백경 옆에 드러누웠다더라.
그걸 직접 보거나 보고 받으면 무언가 행동을 취할 터.
서문경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려 볼 심산이었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나만 하고 있는 건 아닐걸.
-그게 무슨 말이야?
-장문인 말이야. 아무리 사문의 방비가 급해도 그렇지 손님을 제쳐 놓고 왜 저러고 있었겠어?
-……잘 모르겠는데.
-준비하는 도중에 어떤 놈이 헛짓거리를 하나, 아예 꼬맹이인 삼대제자를 빼놓고 전부 굴리고 있는 거야. 철저하게 감시하면서.
-그런가?
성하민의 시선이 현견에게 향했다.
과연, 뱀처럼 찢어진 눈가에 교활함이 가득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문파의 어른으로서 필요한 능력이겠지.
그 생각을 하며 서문경을 보니, 그 역시도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슬 내 어깨서 떨어져 줄래?
-적어도 병상까진 옮겨 줘야지. 주인 놈이나 호위무사나 다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바깥까진 들려 줘야 해.
-……경이도 참, 성격이 나빠.
-머리가 나쁘면 잔머리라도 잘 굴리든가, 의심이 많든가. 머리가 나쁜데 착하기까지 하면 글러먹는 거야.
마교와의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는 건 약한 무인이 아니라, 머리 나쁘고 착한데 강한 고수였으니까.
서문경은 전생의 일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점에서 저기 저 공동파 장문인은 오래 살겠네. 복마관주는 저 사람 덕분에 부지할 거고.
-우리끼리 전음해서 다행이다. 그치?
-들렸으면 장문인이 가만히 있겠냐, 자존심이 굉장해 보이는데.
조금 전, 대주천복마검을 모방한 검법을 펼쳤을 때 현견의 기색이 제법 날카롭게 변하지 않았던가?
거대문파의 자존심과 아집이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교랑 싸울 땐 저런 사람이 회유 당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신비한 무공사전을 써먹으려니 쉽지 않네.’
이러다 화산파나 무당파에선 칼침을 맞을지도 모르지.
서문경은 소리 없이 끅끅 웃고는 턱으로 성하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가자. 내가 끙끙 앓으면서 발걸음도 좀 헛짚을 테니까 잘 잡아주고.
-그냥 착각한 거면 어쩌려고?
-어차피 주 무사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아프다고 하면 귀찮을 일도 없으니까 편하게 쉬는 거지.
-하여간 잔머리는…….
-칭찬으로 들을게.
서문경은 성하민에게 반쯤 기댄 채 현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일행 옆쪽에서 쉬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 해도 좋네. 다만 한 가지, 다른 제자 앞에서 대주천복마검을 연습하진 말게. 혈기가 들끓는 제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예, 주의하겠습니다.”
서문경은 한손으로나마 예를 취하고는 성하민과 함께 공동파의 도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사마다 시선을 맞췄다.
‘그 사이에 있다면…… 밤이라도 좋으니 언제든 찾아오라고, 어울려 줄 테니.’
그로부터 열흘 뒤.
주백경이 병석에서 일어나 떠날 날짜가 정해진 오늘까지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잖아?”
서문경은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청마라면 도사 사이에 숨어 있거나 수하를 주둔시켜서, 공동파를 둘러싸고 불화살이라도 쏠 놈이었다.
아니…… 최소한 기분 나쁜 편지라도 머리맡에 남겨야 하지 않나?
‘내가 아는 청마가 아닌데.’
설마 자신이 대주천복마검을 배운 걸 보고 겁먹었을까?
의아한 생각을 이어가던 차에 성하민이 등을 탁 때렸다.
“내가 말했잖아. 괜한 착각이라고.”
“이대로 물러갈 놈이었으면 내가 고생을 안 했었지.”
“무슨 고생?”
“……아냐, 아무것도.”
하기야, 전생과 이미 한참이나 달라졌다.
옥화산의 혈사처럼 정해진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같은 것까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특히 청마는 아주 제멋대로에 속에 배배 꼬인 놈이지 않나.
‘그래도 좀 허탈하긴 하네. 이만하면 그놈한텐 아주 맛있어 보이는 판 아닌가?’
삼대제자를 급습하여 혼란해진 문파.
서문경과 주백경이 기진맥진하여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니.
단번에 공동파를 멸문시키고 서문세가에 혼란을 불어넣어, 곤륜파를 고립시키는 수까지 일사천리일 텐데…….
“그놈, 머리가 안 좋아졌나?”
서문경의 혼잣말에 병석을 정리하던 주백경이 끼어들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어째 공자님은 가는 곳마다 사고가 생기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시간 아끼고 좋잖아. 어차피 싸울 놈들인데.”
그 말에 주백경과 성하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호위 앞에서 참으로 불운한 말만 골라서 하십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쩝.”
서문경은 혀를 가볍게 차며 청명한 하늘을 보았다.
얇은 옷이 피부에 착 들러붙을 정도로 찌는 날씨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명이 한참 생장하고 곡식의 알갱이가 고개를 드는 계절.
누군가에겐 기회이고 밥을 먹고 살 중대한 시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서문경에겐 항상 가시밭길 같았다.
‘내가 너무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거겠지.’
미래가 어떻게 흐를지 알기에.
마교의 세가 얼마나 강대하고, 그 끝이 어디까지 있는지 전생에서도 모두 보지 못했기에.
적마를 격퇴하고 청마를 물러나게 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지만, 아직 강호에선 안이한 생각이 많았다.
‘옛날 옛적부터 마교로 불렸던 사교는 전부 패하거나 중간에 꼬리를 말았으니…… 지금 인식도 딱 그 정돈가.’
서문세가나 무림맹은 자신의 말을 듣고 제법 진지해졌다지만, 글쎄.
아직 마교의 움직임은 외적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 외에 없었으니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게 주류였다.
“이마저도 계획이라면 골치 아픈데.”
“뭐가?”
“어차피 마교의 존재를 들켰으니까, 다시 숨지 않고 약한 척하는 거라면 말이야. 당장 청마만 해도 야비하게 이대제자만 건드렸지 본산까진 오지 않았잖아.”
“……그랬지.”
“공동파야 피해를 입긴 했지만, 고수와 싸우진 않았어. 피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제일 중요한 건 다른 곳에서 어찌 생각하냐지.”
그 말에 주백경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그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든 청마는 진무신검 앞에서 도망쳤고, 적마는 공자님한테 치명상을 입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적마한테 척안룡이 죽게 두었어야……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보진 말라고.”
서문경은 눈웃음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바랐다.
* * *
“본 교가 이르게 드러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전부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이 점을 이용하면 최악은 피할 수 있지.”
말해 무엇하랴?
서문세가나 무림맹에서 칠로두의 존재와 위험성을 말한다고 한들, 한껏 비대해진 무림인의 자존심은 쉽게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하물며 무림의 역사에서 마교란 늘 패배하거나 은둔한 사교였으니.
다시 나타난다 한들 잡졸이요, 무림의 최강자에게 패할 운명.
청마는 무림의 고사(古史)와 무심결에 품고 마는 생각을 짚었다.
“서문경을 중심으로 한 세대가 두각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결국 어린애들이지. 그렇지 않나?”
청마의 시선이 원탁으로 향했다.
값비싼 자단목으로 만들어져 마치 예술품처럼 잘 닦여 있었다.
저 원탁을 중심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무려 여섯.
그들 중 체구가 건장한 남자가 주먹으로 원탁을 내리쳤다.
“마음에 들지 않아!”
“진정하지?”
“대체 언제까지 서문 씨족이 설치는 꼴을 두고 볼 거냐! 내가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나! 저놈들이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될 테니까, 먼저 죽여 놔야 한다고!”
“자네가 서문세가와 악연이 있는 거야 알지만…… 저 여자가 황실을 손에 넣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설명했잖나.”
이야기만 들었을 땐 한 번쯤 마주해 보고 싶다고 여겼지만, 정말로 성질 급한 사내다.
청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월현(月現)을 쳐다보았다.
“서문패와 서문이현은 넘겨줄 테니까. 참아 주게.”
“그놈과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항상 숨이 막혀! 내 마음을 알겠나?”
“나야 모르지. 하지만 자네 같은 사연 한둘쯤 모두 가지고 있잖아. 이해해 주게.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는 거니까.”
그 말을 하면서 왼편에 앉은 흑향을 째릿 노려보자, 그녀는 손가락을 간드러지게 움직이며 싱긋 웃었다.
‘옛 이야기 없이 추악한 탁란녀 같으니.’
그저 순수하게 악한 짓만 해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점에서 청마는 여전히 흑향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성질 급한 복수자인 월현은 정감이 갔다.
황실을 점거하는 게 아니라 거의 노는 것처럼 보이는 흑향과는 달리 행동력이 뛰어나니까.
“무형지독은 어떻게 되고 있나?”
“무형은 어렵고, 하독하면 대라신선도 못 살릴 독기까진 재현했지. 서문 씨족만 아니었어도……!”
월현은 고서적을 불태우던 서문이현을 떠올리곤 이를 빠득 갈았다.
그놈 때문에 유실된 남만의 역사가 대체 몇 년이던가?
지식은 완전히 태워져 한족에게 대항할 힘이 사라졌다.
소수민족은 이제 소수가 아니라 아예 없어질 판국이었다.
“예전에 약조했듯, 완성 되는대로 서문세가에 퍼부을 거다.”
“조금만 참아 주라니까…… 아직은 적마의 소문이 덜 빠졌잖아.”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제멋대로 난장판을 친 놈 때문에 기다리라고?”
월현의 고함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적마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적마의 반항은 길지 않았다.
“눈은 착하게 떠야지.”
청마가 선한 목소리로 말하니, 적마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칠로두가 클클 웃어댔다.
과거에 고귀한 피를 이었다며 목에 힘을 잔뜩 주던 적마 같지 않았다.
“……이 굴욕은 언젠가.”
“우리 기준에서 언젠가는 백 년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둬. 그동안 어떻게 될지도.”
“…….”
청마가 다시 한번 주의를 주자, 적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목숨보다 귀중한 진혈.
진혈의 절반을 볼모로 쥐고 있으니 적마로선 대항할 수가 없었다.
“사과하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청마는 유하게 웃고는 지금껏 침묵한 칠로두를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계속 듣기만 할 건가?”
그 말에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너는 우리가 웃음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잔 말이잖나. 월현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야.”
그 나름대로 조곤조곤하게 말했으나, 워낙 목소리가 커서 주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게다가 거대한 체구를 가리는 겉옷은 남자의 형체조차 알 수 없게 했다.
‘한 번쯤 정체를 보고 싶은데 말이지.’
백야흔(白夜痕).
칠로두 중 살아온 세월이 제일 적으면서, 가장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
청마조차도 그의 과거나 겉모습을 파악하지 못했다.
“당신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은데 말이야.”
“기회가 되면, 싸울 때가 되면 안 보고 싶어도 보게 될걸.”
백야흔이 가볍게 코웃음 치며 자리를 떠났다.
그 직후에 다른 칠로두들도 원탁에서 일어나고, 남은 것은 둘.
청마는 적마에게 하명했다.
“회합이 끝났으니 네가 치워.”
“…….”
“네가 먹을 밥은 미리 준비해 주마.”
“진혈은 언제 돌려줄 것이냐?”
“하는 걸 봐서지.”
청마가 환히 웃으니, 적마는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