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09화 (107/250)

공동파 (9)

돌로 벽을 촘촘하게 쌓아 올리기를 이중삼중.

그 사이에 벽돌과 색이 비슷한 가시철사와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두어 시간을 끌거나 소음이 나게끔 의도했다.

처음 만들었지만 공동파가 힘을 합쳐 만든 결과물인 데다, 생각보다 그럴 듯하여 장문인이 내심 뿌듯해하던 차였다.

한데 손님으로 온 서문세가의 일공자가 재를 뿌릴 줄이야.

양 뺨이 왜소하여 사나운 인상의 도사가 서문경에게 물었다.

“본도는 복마관주인 현백(玄伯)이다. 서문경이라고 했던가? 공자가 보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이제 보니 예의는 공자가 부족하구만. 장문인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처소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 그리 못마땅했나?”

현백의 걸걸한 목소리에서 불만의 색이 짙어진다.

그야 당연하다. 자기가 보기에 이대제자 나이 뻘인 놈이 갑자기 와서는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데, 반말이나 내뱉고 있으니까.

평소 서문경이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언젠가 마교와 싸울 때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감정에 의존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속내는 한참 전부터 뒤틀려있었다.

‘주 무사가 저렇게 쓰러지고 내가 찾아왔는데 마중을 나온 게 처량한 꼴의 청진과 청우뿐이라니.’

청마가 영산 주위에서 얼쩡대서 방책을 세우는 건 이해한다.

장문인과 장로로서 사문의 영산을 지켜야 할 테니까.

서문경일지라도 서문세가의 담벼락을 보수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타문의 무사가 제자를 지키다가 쓰러지고, 일공자가 찾아왔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예의도 상대가 지켰을 때 되돌려주는 것이지. 서문세가가 어디 삼류 무가인 줄 아는가.’

서문경은 지지 않고 현백을 쳐다보다가 방책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더 공동파의 도사를 꾸짖었다가는 본의(本意)를 잃고 싸우게 될 터.

그렇다면 다른 주제로 돌려서 화풀이하는 게 나았다.

“고수한테 방책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게 무슨…….”

“잘 보십시오.”

땅바닥을 발끝으로 디뎌서 일보.

서문경의 신형은 순식간에 방책 너머로 움직였다.

대단한 보신경을 펼치지 않아도 심후한 공력만 있다면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높이가 십 장이어도 충분히 넘어설 수 있겠지.

서문경은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 방책보다 훨씬 높게 넘어왔다.

“그냥 꼼꼼하게 만든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차라리 허술하게 만드십시오. 요컨대.”

“……!”

현백을 비롯한 장로들이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문경의 손가락 끝에서 유형화한 공력의 실이 햇빛 아래서 반짝거렸다.

어린 나이에 실로 대단한 공력 수발이 아닌가.

그 놀라움이 가라앉기도 전에 서문경이 손을 휘저었다.

휘르륵……!

상승 무학이 한가득 담겼을 지공(指功).

서문경의 손가락이 향하는 궤적에 따라 공력의 실이 서로 엮이거나 접하며 심상에서 만든 방책의 테두리를 빚어 냈다.

“……음.”

“과연, 서문세가는 다르군.”

서문경에게 불만을 품었던 현백조차도 공력의 실로 빚어 낸 방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동파가 상식에 기조하여 만든 벽과는 구조 자체가 달랐다.

“저렇게 구멍이 숭숭 뚫리고, 허술한 벽으로 고수의 위치를 파악한다니…….”

벽돌과 가시철사를 촘촘하게 두른 공동파의 방책과는 달리, 서문경은 높이가 제법 높을 뿐 한쪽 발이 들어갈 정도로 틈새가 느슨한 목책(木柵)을 그려 냈다.

어차피 고수라면 십 장 높이의 울타리마저 손쉽게 뛰어넘을 테니, 차라리 방심을 의도하는 편이 낫다.

이곳이 공동산이기에 의도한 점도 있었다.

“영산의 나무를 베어 낼 수 없으니 목재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만들었으리란 착각이 들게끔, 또.”

서문경은 울타리 위쪽을 가리켰다.

햇빛에 완전히 투과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한 실.

저 부분이 서문세가가 무림의 고수와 싸우던 시대에 써먹었던 함정이었다.

“오명목(烏鳴木)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조금만 꺾여도 소음이 납니다. 아주 큰 소리는 아니지만 오감이 예민한 무인이라면 못 잡아낼 것도 없지요.”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야 서문세가 소유의 섬에서만 기르니 알 수가 없지요.”

“…….”

“아, 이건 비밀로 해 두십시오.”

“허허!”

서문세가의 비서에 구파일방의 비급이 있다더니, 가문 소유의 섬까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종류의 나무라니.

현백은 서문경을 그저 젊은 고수로 여겼던 것을 후회해야 했다.

-장문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공자에게 예를 표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장문인.

-어쩔 수 없구려.

아직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청년에게 스스로 수그려야 한다니.

공동파 장문인은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공동파의 장문인 현견(玄見)이네. 조금 전 있었던 일과 주 대협에 관하여 내가 직접 자네를 안내했어야 하는데, 사문의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지. 사과하겠네.”

“다 아는 사람이…….”

“뭐라 하였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문경은 왼손으로 상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무공사전을 꺼냈다.

이제야 본제다.

말로 꾸짖지 않고 다른 주제로 화풀이하면서 이득까지 취할 수 있는 힘이 손아귀에 있었다.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서문경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 * *

“이게 무슨 일인가?”

현견은 도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서문의 일공자가 고수라는 말이야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곤 하지만, 그 자리에 척안룡이 있었다고 들었다.

진무신검에게 빚을 입힌 것도 마찬가지.

서문경의 공적은 인정하나 운이 따른 결과라고 여겼다.

차기 천하십대고수가 될지라도 지금 당장 동격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서문경은 어떠한가?

“이래서야 나뭇가지를 충분히 가져가실 수 있겠습니까?”

공동파의 도사가 십 초식을 버틸 때마다 나뭇가지 하나.

처음에는 서문경이 너무 광오하다고 여겼다.

이대제자는 몰라도 일대제자라면 울타리에 필요한 고명목 가지를 내기로 얻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엔 일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대제자론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나이는 이제 이대제자가 되었을 자가…….

-하기야, 곤륜파에서 무학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는 말이 있었지요?

-이러다가 본산의 무학도 저 재능에 먹히는 게 아닐지 심려됩니다.

-어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서문경의 무위에 장로들끼리 소란스럽게 전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제자는 일 초식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일대제자는 다섯 초식.

이마저도 서문경이 공동파의 체면 때문에 봐준 것처럼 보였다.

현견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대로 서문 공자가 공동파를 상대로 일기당천했다는 말이 퍼져서는 아니되네.

-장문인이 허한다면 내가 나서지.

-복마관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땐 사형이라고 부르면 좋으련만, 장문인이 되고 나선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 섭섭하게 말이야.

-……사형!

-이미 늦었다, 요 녀석아!

현백은 끌끌 웃고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서문경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요즘 아해들은 공자처럼 강하지 않아서 말이요. 그렇다고 내기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본도가 대신 해도 되겠는가?”

“부끄럽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이대제자가 다 패하고 일대제자도 반절이 저 모양이야. 이미 부끄럽게 된 마당에 얼굴에 철판 좀 깐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고?”

“과연, 그렇군요.”

“공자가 보기에 공동파의 울타리를 모두 채우려면 가지가 얼마나 필요하나?”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하, 아직도 심중이 비틀려있구먼. 고개 숙여 부탁할 터이니 알려 주면 안 되겠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백이 서문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관으로 가린 정수리를 남에게 훤히 보이는 행위.

도사로서 자존심을 접고 사죄하겠다는 뜻이었다.

서문패. 아니, 서문이현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노도사가 약관도 안 된 서문경에게 직접.

일이 이렇게 되니 서문경도 아니꼬운 마음을 잠시 접어야 했다.

“족히 수백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공자가 무조건 이길 내기였군.”

“영리한 자는 패할 싸움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과연…… 울타리를 지적할 때부터 알았지만 병법을 배운 사람은 다르군.”

“그럼, 수천 초식을 교환하시겠습니까?”

“하하. 이보게. 살날보다 귀천이 빠른 나이일세. 자네처럼 혈기가 넘치면 모를까, 고수의 칼을 어찌 수천 번이나 받아 내겠나!”

현백은 서문경이 그렇게까지 가혹한 내기를 고집할 거라 여기지 않았다.

정의맹에서 마교와 함께 싸울 동맹이 아닌가?

그의 기분을 달래는 편이 낫다.

현백의 시선이 서문경의 왼손에 들린 책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왼손에 책을 든 채로 싸우던데…… 소문은 들었네. 고서를 좋아한다지?”

“그렇습니다.”

“공동파에 귀중한 도경이 많네. 공자가 원한다면 필사하여 서문세가로 보내도록 하겠네. 대신 일 초식으로 줄여 주면 안 되겠나?”

“도경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학이 담겨 있는 것을 선호하지요.”

서문경은 톡 까놓고 말했다.

어차피 곤륜파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는 예감도 있었다.

“……음.”

현백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저 반응만 봐도 얼추 답이 나왔다.

처음부터 주백경에게 안내해 주지 않은 건 사문의 방비도 바빴지만, 곤륜파의 일을 얼추 듣고는 자신을 경계한 모양.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공동파의 성정상, 알고도 넘어올 말을 던질 차례였다.

“곤륜파에 운룡대팔식이 있다면, 공동파에는 대주천복마검이 있다는데…… 아직 견식하질 못했습니다.”

“그야 사문의 상승 무학은…….”

“두려우신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현백이 정중하던 가면을 집어치우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칫 말을 잘못하면 노인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서문경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군문의 자제이기에 강호의 상식이 부족해서요. 하지만 곤륜파는 제 보신경이 부족한 것을 알고 승룡관주께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운룡대팔식도 그때 눈으로 담았지요.”

“승룡관주라.”

현백이 입술을 씰룩였다.

공동파와 곤륜파는 기질이 비슷하여 거리가 가까워서 교류가 잦았다.

특히 승룡관주와 현백, 두 도사 모두 제자를 가르치는 위치였다.

서로 호승심을 불태우거나 은근히 사문의 후기지수를 비교하곤 했는데, 삼 년 전부터 청겸 때문에 자존심을 구기고 있었다.

“그가 무슨 가르침을 주던가?”

“절벽을 올랐습니다.”

“하, 그런 무식한 수련이 가르침인가?”

“그곳에서 운룡대팔식의 단초를 얻었지요.”

“…….”

평소에 그토록 무시한 수련법으로 상승 무학을 깨달았다니?

서문경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는 쪽이 옳지만, 왠지 변명처럼 둘러대는 것 같았다.

현백은 꺾었던 나뭇가지 대신 제자에게 목검을 빌렸다.

“청년답지 않게 사람을 긁는 재주가 있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 자네와 백 합 동안 겨루는 동안 대주천복마검을 펼치겠네. 그 대신 고양목의 가지를 울타리에 쓰도록 도와주게.”

“분가에 직접 전서구를 보내지요. 열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약조한 걸세.”

현백이 입술을 씰룩였다.

복마관주가 되고 나서 반쯤 접어 두었던 호승심과 투기.

그것을 한꺼번에 퍼내어 상단전 심상에 담았다.

대주천복마검(大週天伏魔劍).

강대한 마를 굴복시키는 검을 펼치기 위하여.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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