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8)
“……추잡한 시선이로구나.”
“추잡? 하하, 이거 참. 내 안목이 추잡하단 소릴 듣는 건 처음이야.”
청마가 짓궂게 웃으며 과거 일을 몇 가지 주절거렸다.
어린 철장(鐵匠)의 재능을 보고 후원하였는데, 그가 후일 도철이라고 불리는 명장이 되었다는 고사(古事).
수도에 전념하던 노승에게 사특한 단어를 속삭였다가 한때 마라(魔羅)로 불렸던 과거사.
옛 이야기를 입에 담는 동안 그의 눈동자가 맑은 빛을 드러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주백경을 가리켰다.
“너도 마찬가지야.”
“……?”
“도망친 저 도사놈들과 달리, 주백경이라는 이름은 책이나 설화로 이어질 테지. 난 그걸 들으며 옛일을 추억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다른 놈들처럼 정벌이나 군림에 관심이 없는 거냐?”
그 말에 청마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설마 그놈들과 똑같은 사람처럼 보였느냐?”
“마교란, 결국 변방으로 밀려난 패배자 집단이지.”
주백경은 힘겹게 숨을 들이내쉬며 옷깃을 찢었다.
출혈이 심한 부분을 동여매고 점혈했다.
전의는 아직 쇠하지 않고 불타고 있었다.
“한량처럼 굴어도, 다른 놈들과 똑같은 항아리에 담긴 장(醬) 덩어리인 건 똑같아.”
“……아픈데.”
청마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다른 분노는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주백경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마기와 살기가 무형의 압력으로 주백경의 어깨를 짓눌렀다.
“……큭.”
힘겹게 동여맸던 붕대가 다시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것을, 주백경은 가까스로 인내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검을 들었다.
“뭐가 이야기냐, 뭐가 추억이냐. 네놈의 너절한 취미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이대로 살려 준다고 하여도?”
그 말에 주백경은 목 안쪽에 고여 있던 핏덩이를 뱉어 냈다.
아까부터 계속 걸리적거리던 것을 떼어 낸 기분이었다.
공동파의 도사든, 어린아이들이든, 누군가가 지켜보는 시선이든.
모든 방해에서 벗어나 단 둘.
청마에게 딱 한 번, 등을 돌리면 보내 줄지도 모른다.
나중에 저놈이 이때의 일을 주절거리면 거짓말이라고 부정하면 됐다.
‘나라도 목숨이 귀한 건 알아.’
서문경이라면 어땠을까?
청마에게 욕을 해대고 도망쳐서, 후일의 복수를 도모하지 않았을까?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살기만 하면 언젠가 기회는 오니까. 변명이라고 해도 생존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주백경은 여전히 모나고 답답하고 지독히 이기적이라.
“숨만 쉰다고 전부가 아니야.”
“…….”
“너와는 다르게 내 가슴엔 신념이, 어깨엔 책무가 있다. 이게 없었다면 두 도사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기꺼이 제물로 삼아서…… 빈틈을 노렸을 거다. 군문과 무림은 유별(有別)하다는 변명도 있으니까. 하지만.”
숨을 가다듬은 주백경이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걸 원하지 않아.”
“……과연.”
저 대답이 지독히 우둔해서, 도리어 마음에 들었다.
청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죽음이라도 좋으니 싸우자는 놈과, 후일의 즐거움을 위해 살리고 싶은 놈. 둘이 모였으니…… 추잡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외골수가 따로없지 않나.
청마는 주백경에게 학을 떼며 흑린신편을 휘둘렀다.
휘르륵, 꽈광!
주변을 어둡게 물들일 만큼 자욱한 마기에 이어지는 폭력.
주백경을 어중간하게 제압할 생각은 없었다.
사지를 꺾어서 공동산에 던져 놓겠다는 심리였다.
평소의 주백경이라면 저 궤적을 꿰뚫어 보았을 터지만.
“…….”
출혈이 심해서 시야가 점멸하고 귀가 먹먹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기인했다.
그나마도 청마가 힘을 덜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때 주백경이 희미한 빛을 눈에 담았다.
‘별인가.’
별처럼 빛나는 것이 있었다.
청마의 마기가 주변을 어둡게 물들이는 와중에 별 같은 것이 주백경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까앙!
또다시, 그리고 몇 번을.
검으로 흑린신편을 쳐 내며 별을 눈에 담았다.
살 길을 제 발로 차버린 우둔한 검사는 그 별의 빛을 기대어 검을 휘둘렀다.
몸에 밴 서문검법과 동공, 천주심경으로 견고히 쌓은 의지로.
초식의 숫자는 세지 않았다.
청마가 은근슬쩍 사지를 묶어서 제압하려는 행동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서 몸부림치고, 어깨가 탈구되어도 끼워 넣으며 검법을 행했다.
‘조금씩 보인다.’
처음에는 검과 흑린신편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불똥인 줄 알았다.
심신이 지쳐서 헛것을 보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기도 했다.
하나 그것이 수십 초.
“꽤 오래 버티는구나!”
청마가 흑린신편에 점차 힘을 더하기 시작했을 때.
주백경은 무언가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이 단순히 별이 아니라 경치였음을, 삼 년 동안 부단히 노력한 증거라는 것을.
까드득!
손목으로 기교를 부려, 화경(化境).
채찍과 부딪쳐 깎여 나가는 칼날을 휘날려서, 비검.
아무리 노력해도 진수를 깨닫지 못했던 무학을 조금씩 청마에게 펼치며 체득해 갔지만, 그게 전부였다.
‘밤하늘과 맞서 싸우는 것 같구나.’
어느새 발치까지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자존심이 상한 청마가 조금씩 전력을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린신편의 형상 또한 채찍에서 무언가로 변질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백경은 칼끝에서 별 같은 반짝임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마저도 금세 마기에 가로막혀 빛이 사그라졌다.
‘하나, 이마저도 충분한 불빛이다.’
밤하늘에 별빛이 있고, 그 옆에 달빛이 있으니 무인이 싸우기에 충분한 불빛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검치가 내기를 하자며 억지를 부렸던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허튼 소리를 한다며 웃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 충분한 불빛이야.”
주백경은 반보를 앞으로 내디뎠다.
청마를 상대하고서 처음, 전진하면서 휘둘렀다.
사선의 칼끝에 어두운 장막처럼 존재하던 마기가 갈라졌다. 밤하늘이 무너지고 신광(晨光)이 비쳤다.
‘나만의 길, 나만이 볼 수 있는 경치가 있다면…….’
대도무량.
장강의 물줄기처럼 무수히 많은 무인 사이에서 오직 주백경이 근기에 의지해서 도달한 길.
그 길로 향하는 방향이 신광에서 어렴풋이 보이던 그때였다.
“안 되지, 안 돼.”
청마가 처음으로 마공을 펼쳤다.
암뢰격천(暗雷格天).
주백경의 중공을 포함하여 다섯 방위를 한번에 휘둘러치는 흑린신편의 난격이니.
“……!”
한순간 깨달음에 손끝이 닿은 주백경일지라도 막아내기 버거운 일격이었다.
쩌저적, 쾅!
공간을 한순간 격하여 휘둘러진 흑린신편에 주백경은 전신을 두들겨 맞았다.
이마저도 청마가 힘을 빼지 않았다면 단숨에 절명했을 일격이었다.
“내가 마음을 바꿔서 산 줄 알아라.”
청마는 피식 웃으며 주백경을 들쳐 업었다.
상대를 이렇게 상냥히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는 꼴은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청마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주백경이 마지막에 펼친 초식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뒀다면 어찌 되었을까…… 흠, 아무리 그래도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좀 그렇지.”
청마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
지켜볼 수 있는 대상에서 벗어나서야 즐겁기만 할 수 없다.
청마는 주백경의 입술 사이에 무언가를 집어넣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 * *
“……이렇게 된 겁니다.”
“…….”
서문경은 침상에 죽은 듯이 쓰러진 주백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단신으로 청마와 싸우다니 제정신인가?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인가?
여러 의문과 감정이 서로 똬리를 틀었지만, 장본인이 저래서야 풀 수가 없었다.
“살았으면 됐지.”
“……죄송합니다.”
청진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청마와의 조우 이후 반성하는 의미로 도관까지 벗어 둔지라 길게 기른 머리가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패장처럼 보여서 서문경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뭐가 그리 처량하지?”
“……?”
“살았으면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지. 내가 제일 괴롭다는 것처럼 주변에 말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그 말에 청진과 함께 서 있던 청우가 기함했다.
“이보시오! 아무리 그래도…….”
“……사제야.”
“하지만 사형, 서문 공자의 말이 너무 험하지 않습니까?”
“원래 말이 쓸수록 바른 법이다.”
청진은 주백경의 창백한 안색을 흘낏 바라보고는 서문경에게 예를 취했다.
“주 무사님 덕분에 저와 옆에 있는 사제, 삼대제자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인의 용태가 이리 좋지 않아…… 괴로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
“지금이라도 은인이 깨어나서 저를 꾸짖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만, 서문 공자께서 그리 말씀해주시지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저도 제정신을 차려야겠지요.”
청진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나무 벽을 쌓거나 횃불을 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마가 언제 다시 공동산에 들이닥칠지 모르니 말입니다.”
“말귀를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군.”
서문경은 청우의 불만을 옆으로 흘렸다.
아니, 애초에 대꾸도 하기 싫었다.
‘이럴 땐 요령도 피울 줄 알아야지. 어쨌든 동맹이어도 남인 사람들 아니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는데…….’
청마가 살려 준 것도 결국 그놈의 변덕 때문이었을 터.
서문경은 주백경의 심박음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침 성하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장문인께 전달해 드렸어.”
“뭐래?”
“당연히 도움을 주시겠다고는 하는데…… 패 아저씨가 왔으면 더 나았을 거라고 하시더라고.”
“흠.”
서문경의 시선이 청진과 비슷한 지점을 향했다.
공동파의 장문인과 장로가 각자 머리를 굴려서 방비책을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삼촌한테 조언을 듣고 싶었던 건가.’
어쩌면 극히 호전적인 공동파의 성격상, 청년보다는 중년의 고수가 방문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두 가지 모두일 거라 여겼다.
“하민아, 나 대신 멍청이 좀 간호해 줘.”
“주 무사님 말하는 것 맞지? 어?”
대충 알아들었으면서 되묻기는.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공동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문세가의 일공자, 서문경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처소에서 쉬고 있게! 사문의 문제를 해결 중이니!”
서문세가의 선봉장이 딱 저러지 않을까?
공동파 장문인의 목소리가 제법 쩌렁쩌렁했지만, 서문경에게는 별다른 위압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불쾌해져서 상대의 위치를 알면서도 물었다.
“누구신지요?”
“……뭐라고 하였는가?”
“사람이 이름을 밝혔는데, 꺼지라고 하는 쪽이 예의가 없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호위무사가 다쳐서 마음이 심란한데, 도움을 주러 온 손님에게 예의 없이 구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하물며.’
서문경은 애초에 글러먹었다는 듯, 공동파의 도사들이 작업한 방벽을 가리켰다.
“처음부터 다시 갈아엎읍시다. 이건 초소만도 못하니까.”
“……!”
공동파의 장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