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7)
누군가가 천하의 드넓음을 보고 감동한다면.
계절이 바뀌어 떨어지는 매화와 눈을 보고 울적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사람들은 같은 경치를 보더라도 각자 품는 마음이 다르다.
그렇다면 무인도 다를 바 없다.
어릴 적 품었던 환상.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무학의 완성.
하찮게 죽은 가족의 복수를 다짐하는 살검(殺劍).
각자 다른 심상(心象)을 상단전에 품고서 길을 저벅저벅 나서는 것이 무인이었다.
‘허나, 이놈은.’
청마는 주백경의 전신을 위아래로 핥듯이 쳐다보았다.
자신을 곧게 보는 눈동자에 미망 한 점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무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 놈이야.’
상단전에 품은 심상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휘두른 검에 어떠한 의(意)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인이 심상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빠져 있다면, 주백경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깟 화려한 검형(劍形)에 무슨 의미가 있노라고.
청마의 마기를 가른 일격에 정 하나 묻어나지 않으나, 오로지 인명을 구한다는 책무만을 담았다.
“나는 서문세가의 무사, 주백경이라고 하오. 저놈을 붙잡는 동안, 두 도사는 아이들을 데려가시오.”
주백경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청마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꼴로 날 붙잡겠다는 거냐?”
“…….”
주백경이 침묵하는 동안 청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탄탄한 등에 훌륭하게 단련한 근육이 엿보였고 피가 묻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백경과 정면으로 마주한 청마의 눈에는 달랐다.
“옷으로 가리고 붕대를 동여맸다고 해도 네 안에 번진 독과 피로는 감출 수가 없구나. 북적과의 싸움이 그리 고되었느냐?”
“네가 벌인 짓이냐?”
“어느 쪽이든 알려 주면 재미없지.”
청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원래는 공동파의 도사를 붙잡아서 가두고 주백경을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너무나도 빨리 도착했다.
계획을 중요시 여기는 놈이라면 불쾌함을 드러냈겠지만, 청마는 달랐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온 것이냐?”
“…….”
“과연, 과연……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지. 상황이 막막해지기 전에 먼저 도착해서 막아 보려는 노력 말이야. 자네랑 어울리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자네의 뜻이 갸륵하니 형평성을 맞춰야지.”
주백경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들 대신 나를 붙잡아서 일공자님을 충동질하려는 게 아니냐?”
“……호오?”
“네 흉심이 지독하다는 걸 일찍이 공자님께 들었다. 괜히 아량을 베푸는 척, 놀리지 말고 들어라.”
주백경의 검이 청마를 향해 겨눠졌다.
“나는 서문세가의 대사부요, 일공자이신 서문경의……”
“거기까지 하지. 갑자기 분위기 잡으면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려는 속셈이 뻔히 보여.”
“…….”
주백경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서문경을 따라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청마 옆에 있는 아이들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걱정 마라. 금방 떼어 주마.
주백경의 발바닥이 땅을 두드렸다.
……툭.
강물에 축축해진 지면을 밟았음에도 널빤지를 밟은 것처럼 안정적인 보신경이었다.
고수는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듯.
주백경의 움직임을 본 청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둑놈의 제자더냐?”
“도둑놈이 아니요, 천하의 오걸, 무영신투님이시지.”
평소엔 도둑놈이라고 부르지만 청마의 입에서 듣고 싶지는 않다.
주백경은 그답지 않게 대꾸하며 검을 쥐었다.
내관혈을 따라 강대한 내력이 빗발쳤다.
쿠르르……!
서문경이나 성하민처럼 검에 심상을 담지는 않았다.
화려한 것보다 무거운 검을 추구했다.
조금 전, 반월의 마기를 베었듯.
“번검염천(繁劍染天).”
일격에 전심을 다하여 휘두르니.
주백경의 검에 자연스레 천주심경이 담겼다.
서문경처럼 금강심이나 부동경을 쓰지 못해도, 부동하게 쌓아 올린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청마는 영악했다.
“애가 죽도록 휘두를 건가?”
마기로 유형화한 손으로 주변에 있던 삼대제자를 잡아끌어 방패막이로 세워 버린 것이다.
인상을 찌푸린 주백경이 허공에서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스르륵.
과거 무영신투가 직접 가르치기를, 천휘(天揮).
펼치던 초식의 힘을 그대로 역용하는 잡기술이니.
“진류서천(震流西天).”
찰나를 두어 조각으로 쪼갠 순간, 주백경은 칼의 장치를 눌러 끈 뭉치를 붙잡았다.
검의 형상은 그렇게 변화했다.
“……쇄검(鎖劍)?”
중원에서 수백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수민족.
그들만이 사용한다는 무기를 어째서 주백경이 펼친단 말인가?
청마의 의문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아차하는 사이에 끈 뭉치가 휘돌아 칼날이 목을 노려왔다.
“허, 이깟 것.”
청마가 히죽 웃으며 옷깃을 휘둘러 검을 쳐냈다.
흑린신편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주백경의 임기응변은 제법 뛰어났으나 결정적으로 청마에게 해를 끼칠 만한 힘은 없었다.
청진 또한 그것을 알아차리고 합류했다.
“……흐읍!”
발끝의 진력까지 짜내어 쓰는 복마검.
마를 굴복시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검기를 출수한 것이다.
“영산에서 강신건체(强身健體)를 이루었다고 한들, 닿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청마가 숨을 내뱉는데 주변을 마기로 어둡게 물들였다.
그것만으로 파사헌정의 검기는 스러졌다.
수백 년을 살아온 사악한 것에 도리어 굴복하고 말았다.
청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우, 이놈! 정신 차리지 못할까! 당장 움직이지 못해!”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청진과 주백경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앞으로 내달렸다.
좌우.
두 방향으로 청마의 기감을 분산시키려고 했으나, 정작 청마가 말려들지 않았다.
“이런 것쯤, 몇 번이나 경험했을 것 같으냐?”
“……!”
“무용하다. 무용한 것이다. 너희가 목숨을 걸어도, 의지를 불태워도…… 결국 수십 년도 가지 못하고 잊힐 이름이야.”
청마는 두 무인의 순청한 의지를 보고도 조소했다.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비슷한 것을 수십 번 보면 감동을 느끼진 못한다.
청진이나 주백경이나 여태껏 살아온 수백 년 동안 몇 번이고 본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다른 놈들처럼 추해지겠지.’
이대로 실망하기 전에 끝내 버릴까?
청마가 잠시 고민하던 그때.
“그, 그만!”
곁에 있던 삼대제자가 비수를 꺼내 청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물론 칼날이 피부에 닿지도 못했다.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비수쯤, 자다가도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절로 옛 일을 떠올리게 되어, 불쾌해졌다.
“자격도 없는 놈이……!”
청마가 아이에게 팔을 휘둘렀다.
아주 사소한 짜증을 담았을 뿐이지만, 저만한 힘을 삼대제자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가 강변의 돌더미에 처박히자 청진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칠두야!”
“……!”
주백경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심박음에 귀를 기울였다.
청마와의 싸움 도중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데도, 본능처럼 행동했다.
한데 그 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불안해서…… 가만히 두어선 안됐다.
“도사 양반. 가 보시오.”
“하지만…… 저자를 혼자 감당하진 못할 게요.”
청진이 잠시 주저하자, 주백경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까앙!
청마가 가볍게 휘두르는 일장에 여물지 못한 상처가 터지고 내상이 부르텄다.
공력도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둘러서 공동파까지 오다가 절반을 소모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서서히 커져가는 출혈을 혈도를 점해서 막았다.
“가시오, 얼른.”
주백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청마와 정면으로 맞섰다.
“너도 채찍을 꺼내라.”
“……후회하지 않겠느냐?”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지.”
뻔히 보이는 함정이었다.
어쩌면 공동산에 청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다.
서문패가 말했듯 서문경을 기다렸다가 가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주백경은 미련한 남자였다.
담정이나 무영신투 같은 절대고수 앞에서도 답답한 말이나 주절거리다가 죽을 뻔할 만큼.
그 대상이 청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촤르륵……!
여태껏 청진의 호흡에 맞췄을 뿐이라는 듯, 주백경의 신형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어딜!”
청마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마기로 빚어 낸 듯한 융단.
죽음이 눈앞에 있었으나 주백경은 의연했다.
“……후우.”
용천혈을 땅바닥에 내리치듯 하며 동공을 일으켰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가르침을 퍼내 올리는 과정이었다.
주백경의 검은 곧고 올발랐다. 근기로 빚어진 검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
시야가 흐려지고 입에서 핏물을 쏟을지언정 근간이 흔들리지 않는 것.
주백경은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서 비틀었다.
“비검절우.”
스각!
마기로 만들어진 융단을 일거에 베어 내며 일보 전진.
등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두 도사가 알아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리라고 생각했다.
청마의 조소가 어렴풋이 보였다.
“서풍광아.”
검을 사방으로 휘둘러 치며 전신 발경을 일으켰다.
주백경을 집요하게 노리던 마기의 파도가 한순간 가라앉았다.
하지만 혈도를 점해서 막았던 출혈이 다시 일어났다.
안 그래도 흐리던 시야가 더 침침해졌다.
“노력은 가상하나……”
“답천무영.”
주백경은 청마의 말을 잘라 내며 발로 기교를 부렸다.
무영신투의 보신경으로 허공을 지르밟아, 청마를 칼로 내리칠 작정이었으나 가만히 두고 볼 상대가 아니었다.
“……어리숙하군.”
청마가 마침내 허리춤에서 흑린신편을 잡아 휘둘렀다.
쩌정!
강물이 거대한 파문을 그리다가 물보라가 일어났다.
“주 무사님!”
삼대제자를 데리고 도망치던 청우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게 솟구쳤던 물보라가 다시 강으로 내려앉았을 때.
“뭐야?”
“……헉!”
주백경과 청마가 어딘가로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 * *
‘뭐 이런 놈이……!’
청마는 주백경이 보이는 의기(意氣)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보라가 솟구쳤다가 사라지는 찰나.
심적권청의 순간 동안 주백경은 수십의 검기를 쏟아 냈다.
제아무리 청마일지라도 몸을 피해야 할 만큼.
‘저 몸으로 무리하게 펼쳤다가는 근육과 관절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제정신인가?’
“……가.”
“뭐?”
“네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아.”
주백경이 선홍색 핏물을 토해 냈다.
내상이 워낙 깊어 생명의 불씨가 꺼져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청마는 묘한 눈으로 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
“청해성에서야 홍씨의 소가주가 있었다지만, 저놈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생판 남 아니냐?”
“…….”
주백경은 말없이 긍정했다.
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이름을 듣지 못했다.
생판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고 보답을 약속받지도 못했다.
누가 듣는다면 뭐 저런 머저리 같은 사람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겠지.
“……이러기 위해 배웠다.”
주백경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내가 무공을 배운 건,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야.”
누군가를 위한다거나 베푼다는 말은 주백경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해 떳떳하고 싶었다.
지독히 이기적일 때도 있었다.
절대고수 앞에서도 똑바른 소릴 하다가 서문경에게 타박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생각을 정리한 주백경이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 덤벼라.”
“멋지군.”
“무슨 허튼 소리냐?”
“멋지다고 했어.”
사람이 아니라 잘 조각된 목상(木像)을 보는 듯한 눈.
청마는 그 눈동자에 주백경을 담은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