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04화 (102/250)

공동파 (4)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쏴라!”

적어도 여기서 홍가의 소가주와 서문경의 심복을 죽이리라.

남자의 살의가 비수처럼 꽂혔다.

주백경과 홍화연을 향해 다시 수십, 수백 발의 단시가 쏘아졌다.

주백경은 화살을 쉼 없이 쳐 내며 생각했다.

‘이때 공자님이라면 어찌하셨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봐온 서문경은 몸이 움직이는 대로 행하고 이유를 뒤늦게 덧붙이곤 했다.

가끔은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산을 오르거나 칠로두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옆에서 모시기에 참으로 어려운 주인이다.

나이가 어려서 변덕이 죽 끓는다는 설명으로도 모자랐다.

허나, 고행이나 불의를 눈앞에 두고 외면하지는 않았다.

‘아마 곤륜파에서도 그러느라 늦으셨겠지.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주군이야.’

주백경의 검에 피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팔뚝과 손등의 상처가 제법 깊었다.

솜털 사이로 핏물이 엉겨 끈적거렸다.

불쾌함과 메슥거림이 가슴 한구석을 스쳤다.

카가강!

칼날이 수많은 화살촉에 찍히며 무뎌졌다.

고철이 될 판국이었으나 목숨보다는 귀하진 않았다.

검견불퇴와 번검유회.

서문검법에 담긴 가르침으로 북적의 공세에 대항했지만, 두 손으로 화살 비를 막을 순 없는 법이었다.

주르륵.

주백경의 머리카락이 점차 질척거렸다.

시야도 그랬다.

붉게 물들어서는 손등으로 비빌 짬이 나질 않았다.

“……필사적이군. 저놈들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자길 죽이러 오는 고수가 있는데도, 남자를 비롯한 궁수들은 활을 맹목적으로 쏘아 댔다.

말이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걸 보니 주백경의 얼굴에 시원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저도 이제 이름값이 높아졌나 봅니다.”

“……주 무사님, 잠시만요.”

“소가주님께서 상처를 돌봐주시다니. 홍가의 무사들이 보면 피를 토하겠군요.”

“너스레를 떨 때가 아니잖아요.”

홍화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호흡 서너 번.

그동안 북적들이 서로 쏘는 순번을 달리하며 교대로 쏘아 댔다.

수십 발이 아니라 수백 발, 각자 각도를 달리하여 단순히 검으로 쳐 내기 어렵게 변화하거나 석궁을 쏘는 자도 있었다.

서문세가의 대사부일지라도 한 명을 등 뒤에 둔 채 제자리에서 막아야 한다면 상처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주르르륵…….

옆구리에 두 발, 어깨에 한 발.

이외에도 자잘한 생채가 주백경의 온몸에 가득했다.

다만, 홍화연에게는 상처 하나 없었으니.

“저도 홍가의 소가주예요. 저 한 몸쯤은…….”

“불가능합니다.”

주백경은 단언하며 검을 쥐었다.

이미 수백 발의 화살을 쳐 내느라 중간이 휘고 날이 무뎌졌다.

어느새 막기 버거워진 이유였다.

“저놈들이 화포를 가지지 못하도록 여기서 끊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뭐예요, 갑자기.”

“지금이 아니면 틈이 나질 않을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왜 죽을 사람처럼 말해요?”

“유언이 아니라, 저놈들이 만약 화포를 지닌다면…… 최악을 상정해 보십시오.”

북적이 군부의 창고에서 벽력탄과 화포를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동력을 지닌 북적에게 화력까지 안겨다 주는 꼴이다.

청해성에 이어 감숙성, 사천성까지 밀고 들어갈 터.

그러니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홍가의 활약이 중요하다.

주백경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냉정한 어조로 다그쳤다.

“소가주님은 온전한 몸으로 홍가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버지 때문에?”

“예.”

홍가의 가주가 홍화연을 금지옥엽처럼 아껴,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더라.

군문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홍화연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이러려고 무공을 수련한 게 아니었는데.”

“여기서 나가면 더 노력하십시오.”

주백경은 화살을 쳐 내고, 또 쳐 내며 말했다.

“매일 지쳐 쓰러져서 잠드십시오.”

삼 년 전 천무학관으로 가는 동안 행했던 동공의 수련을 떠올리곤, 희미하게 웃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음이 금세 가까워져 있었다.

서문경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주백경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조금만 더.”

자신을 스스로 다그치듯 읊조렸다.

서문경이 달려오는 속도가 시시각각 빨라지고 북적들의 화살통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느새 조급해졌다.

“빌어먹을, 바닥에 비축한 화살 통까지 모두 쏴라!”

“전량 비었습니다!”

“나뭇가지라도 깎아!”

여기서 제거하지 못하면 대업에 제동이 걸리고 만다.

부하들에게 억지에 가까운 명령을 내린 남자가 다시 활에 화살을 메겼다.

“저놈도 이제 지쳤다! 다른 검을 줍거나 쉴 틈을 주지 마라!”

“……큭.”

과연 남자의 말대로 주백경은 심하게 지쳐 있었고 내공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 뒤에 홍화연이 있어 동공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제자리에서 버티기만 하는 싸움.

그 인내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공자님.’

서문경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야 알고 있었다.

당장 대사부가 되었을 때 보내던 시선에 흐뭇함이 가득했으니까.

마교와의 전쟁에서 중심에 서길 바랐을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다 죽는 것보다 값진 역할을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책무를 다하는 것은 군인의 정신이었다.

“더 쏘아 낼 화살은 없느냐……?”

“괴물 같은 놈!”

남자가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주백경을 노려보았다.

한가득 담긴 살의를 담아서 화살을 쏘았으나, 주백경의 어깨가 움직였다.

카앙!

뭉뚝하게 변한 칼날로 화살을 부쉈다.

이제 둔기나 다름없으나, 고수의 손에는 똑같은 흉기였다.

“그래, 네놈은 내가 직접 참해야겠지.”

주백경은 한쪽 발을 질질 끌며 남자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끝까지 화살을 아끼고 기다리던 북적이 있었다.

푸욱!

한 발의 화살이 주백경의 무릎을 맞췄다.

몸이 기우뚱하고 멈추고 반쯤 꺾였다.

“하하……! 잘했다!”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살아났다.

홍화연을 죽이는 건 실패하더라도 서문경의 심복을 죽일 기회였다.

초원의 영묘에서 주절거릴 변명거리 하나 정돈되어 주겠지.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다른 화살을 꺼내 쏘았다.

“자, 잠깐!”

홍화연이 뒤늦게 몸을 움직였으나, 그녀의 보신경은 주백경에 비하면 느리고 거칠었다.

교묘한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화살을 막기엔 역부족이니.

주백경의 눈동자를 화살의 그림자가 채우는 순간.

“……잘해 주었다. 정말로.”

한 남자가 주백경을 밀쳐 내고 화살을 잡아챘다.

주백경은 깜짝 놀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다, 당신은……!”

평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수더분한 수염을 쓰다듬던 남자.

서문패가 피로 물든 갑주를 입고서 이 전장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게 쳐다보던 남자가 독기가 한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서문패 네놈!”

“이런 음험한 짓은 네 특기였지, 시르바이.”

남자의 이름을 밝힌 서문패는 평소답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얼굴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본가에서 보이던 가벼움과 장난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잃은 기분은 어떠하냐?”

“감히, 한족의 개새끼가……!”

시르바이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인상을 찡그렸다.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안다.

누가 합류하지 못하도록 방비해 두었던 숫자가 마흔일곱.

그 인원이 모두 전멸당했을 테니까.

“부족 하나를 먹어 치우고 당도하였느냐!”

외적 앞에 선 피 칠갑의 악귀.

서문패의 얼굴에 미소 한 점 없었다.

주백경은 그것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적에게는 어떠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농담이 아니었다니.’

워낙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인상이 달라졌다.

‘든든해.’

서문패가 왜 한족의 무신으로 불렸는가?

그리 실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장군까지 올랐는가?

그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도망칠 테냐?”

서문패의 목소리가 몹시 장중했다.

시르바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형제들을 따라가겠다.”

“고원에 매단 시체 말이냐?”

“……까득.”

이를 간 시르바이가 서문패의 갑주를 노려보았다.

저 갑주의 이음새에 낀 피와 살점 모두 형제의 것이었다.

피를 이은 부족, 더 넓게는 초원에 살아가는 경쟁자와 동지.

형제의 연을 맺은 그들과 함께 새로운 천하를 만들고자 했지만, 서문세가에게 항상 가로막혔다.

몇 번이고 마주한 절망이 저 갑주에 담겨 있었다.

“죽어서도 영이 되어 저주하리라…… 서문패, 네놈만은 사지가 찢겨 고통받고,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독수리의 눈이라고 불린 시르바이도 마지막엔 저주 같은 미신에 의존하나?”

비웃음을 머금은 서문패가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콰콰쾅!

전력을 다한 검력(劍力)은 풍압만으로 돌풍을 만들어, 주변에 있는 나무와 잡풀을 베어 냈다.

서문패를 은밀히 겨냥하던 북적이 검풍에 죽었다.

마치 시르바이가 말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사지와 목을 찢어서.

“자, 보아라. 네 형제가 사지가 찢어지고 유언도 남기지 못했구나.”

“네놈……!”

“널 유일하게 좋아하던 점이 있다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아서야. 다른 놈들은 나보고 잔인하다거나 끔찍한 악귀라고 했거든.”

서문패는 무감정한 얼굴로 자신이 죽인 북적을 칼로 찔렀다.

군법에 어긋나는 짓이나 개의치 않았다.

법과 실리가 어긋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짓도 잘하면서 말이야. 자기 형제가 죽었다느니 뭐니, 온갖 감정을 호소하는 짓이 좋게 보일 리가 없지.”

말로는 굶어죽는 부족민 때문에 왔다면서 온갖 패악질하는 것이 북적.

서문패는 시르바이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저놈은 자기가 한 악행에 대해 변명을 주절거리진 않았다.

그러나 북적인 건 똑같다.

북적은 죽어야 한다.

그것이 서문세가의 대장군으로서 시르바이에게 내릴 처분이었다.

“화살도 네 형제도 없다. 무엇으로 싸울 테냐?”

“명예.”

시르바이가 주저하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그 직후.

스걱!

시르바이의 상반신이 베어졌다.

시위에 아무것도 메겨져 있지 않던 활은 장력 때문에 부서져, 피로 물든 땅에 떨어졌다.

* * *

“뭐야, 내가 경이가 아니라서 실망했냐?”

서문패가 끌끌 웃으며 주백경의 등을 때렸다.

북적을 무감정한 얼굴로 베던 장군과 실없는 아저씨.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주백경은 잠시 당황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오신 겁니까?”

“너희가 강호를 떠도는데 방비를 안 할 리가 없잖냐. 게다가 청해성이면 북적이랑 접하는 곳인데, 당연히 노리겠다 싶었지.”

서문패가 주백경의 등을 재차 때렸다.

어찌나 손힘이 강한지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만 치십시오. 환자입니다.”

“내가 젊을 땐 그깟 상처로 앓은 적 없어.”

“……하, 참.”

“어쭈, 치겠다?”

“다 나으면 칼부림이라도 할 겁니다.”

“가능하면 해 보든가.”

서문패는 주백경을 계속 놀리다가, 홍화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연 아가씨?”

“네? 아, 네!”

“이번 일을 겪어서 알겠지만, 관리가 그냥 북적이랑 결탁한 게 아니라 꽤 이름 있는 놈이랑 붙어먹은 것 같은데…… 현령이 아니라 지부대인까지 올라가야 할 거야. 아가씨가 나설 일이 아니란 거지.”

“……네.”

홍화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경험으로 삼으려고 나섰던 것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서문패는 그걸 이해한다는 듯 끌끌 웃었다.

“뭐 젊을 때 해 보는 거지. 늙으면 도전도 못 해. 잘한 거야.”

“하지만…….”

“그래. 아둔했지.”

서문패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농담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가까운 집안의 조카에게 하는 꾸지람이었다.

“네가 명문의 소가주라서 현령을 우습게 본 거냐? 그들도 대명의 시험을 보고 관리가 된 문인이다.”

“……네.”

“이 친구가 없었으면 죽었을 거고. 네 아버지가 몹시 슬퍼했을 거다.”

“……네.”

“앞으로 북적의 움직임은 더 맹렬해질 거고 혼란은 깊어질 거야.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깊게 생각해라. 앞으로 더 수련하고.”

거기까지 말한 서문패가 히죽 웃었다.

“잔소리는 여기까지. 어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그래그래.”

서문패는 그렇게 홍화연을 보내고는 표정을 굳혔다.

시르바이.

북적의 유명한 부족장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그가 여기까지 침투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주백경이.”

“예, 말씀하십시오.”

“너희 뒤치다꺼리는 여기까지 하고, 이탈해야겠다.”

서문패의 시선이 북동쪽으로 향했다.

하늘을 뒤덮는 화살과 말의 투레질 소리가 벌써 눈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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