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3)
‘언제나 그렇듯이? 어떻게 저리 확신할 수 있는 거지?’
홍화연은 주백경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법에서 말하는 신뢰란, 패착에 가까운 단어였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돌파구를 찾고 상대의 약점을 관찰한다.
그 방식이 아니라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서문경을 기다리겠다니?
‘예전에 봤던 주 무사님은 답답해도 착실한 사람이었는데, 많이 변하셨네.’
주백경에게 품고 있던 기대감이 한풀 꺾였다.
홍화연의 시선이 풀숲과 나무 사이, 그림자로 향했다.
스윽, 쓱.
시위를 당기다가 다시 푸는 소리.
스스슷…….
발걸음을 조금씩 옆으로 옮기며 풀숲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
온갖 잡음으로 감각을 희롱하려고 들었다.
북적이 고수를 상대로 쓰는 술수였다.
“…….”
물을 마지막으로 마신지도 세 시진이 넘었다.
그동안 주변의 경계를 멈추지 않았으니 목이 심하게 탔다.
갈증이 예민한 감각을 짜증으로 뒤엉키려고 했다.
하지만 홍가의 가르침이 그것을 붙잡았다.
‘……인내해, 인내해야 해.’
전장의 선봉에 설 때 필요한 것은 용맹함만이 아니다.
적진을 보고 어디가 비어 있는지 통찰하는 눈.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 확고함.
또, 책사의 꾀를 보고 걸려들지 않는 침착함이라.
홍가의 소가주로서 홍화연은 뻔히 보이는 함정에 말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의 빈틈을 보았다.
-주 무사님. 북서편에 보이는 대추나무 보이시죠?
-누런 꽃이 핀 나무 말입니까?
-예.
주백경은 홍화연이 턱짓한 방향을 흘낏 곁눈질했다.
과연, 그녀가 왜 그곳을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군문의 정예끼리 비슷한 가르침을 받기 마련이니까.
-제가 먼저 길을 열겠습니다.
-아니요.
홍화연이 배시시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가볍게 말아쥔 주먹의 양옆으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그것만으로 그녀가 어떤 노력을 했을지 깨달았다.
또, 무슨 말을 할지도.
주백경은 홍가의 소가주에게 겸허히 선봉을 양보하기로 했다.
-소가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원래 제 자리였어요.
홍화연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왼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먹 사이의 공간은 완전히 막혀, 바람 한 점 들이지 않는다.
홍가만이 가진 파지법(把指法).
서문세가가 무예십팔반 전부를 배우는 욕심을 지녔다면, 홍가는 한 가지에 집중했다.
-칼 좀 빌려도 될까요?
-기꺼이.
홍화연은 주백경이 내민 칼을 오른손으로 강하게 붙잡았다.
저 동작에 태산을 떠올리게 하는 단단함이 있었다.
그리고는 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갈게요.
전음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홍화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직 십 대에 불과한 아가씨답지 않은 박력과 기세.
홍화연의 일보는 적혈마의 달음박질과도 같았다.
스가가각!
“……!”
“피해라!”
단신으로 행하는 돌격이 풀숲을 일거에 양단하고 대추나무 뒤에 암약하고 있던 북적마저 꿰뚫었다.
반쯤 무너져가는 대추나무의 꽃이 뚝 떨어지며 달콤한 향기가 흩날렸다.
여름의 더운 공기가 냄새를 풀숲 너머로 한가득 넓히고, 피 냄새가 그 위를 덮었다.
이와중에 상황을 냉정히 평가하는 자가 있었다.
“무엇 하느냐! 움직여라! 다시 움켜쥐어라!”
“……칫!”
홍화연은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식으로 한쪽을 돌파하면 곧바로 대응하기 어려운 법인데, 북적과 마인을 통솔하는 자가 이곳에 있었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검이 닿는 위치에 있다는 뜻.
주백경이 말없이 북적의 시체에서 칼을 뺏어 들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하지만……”
“소가주님이 제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
주백경의 차가운 말에 홍화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곳까지 내몰린 것도 홍화연과 병사의 보신경이 미숙해서였으니까.
“……도망칠 수는 남아 있는 거겠지요?”
“예. 강호에서 배운 잡기술이 있습니다.”
“잡기술이요?”
이 급박한 상황에 무슨 잡기술이란 말인가?
홍화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주백경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냉정했다.
“어느 도둑놈한테 배운 겁니다. 그러니까, 얼른 도망치십시오.”
“그게 무슨…… 하, 알겠어요.”
어차피 주백경이 남기로 한 이상 홍화연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거 아세요? 홍가의 소가주는 등을 보이지 않는대요.”
“허튼소리 하지 마십시오. 목숨은 하나입니다.”
“주 무사님도 하나잖아요.”
“…….”
“믿어 보세요. 짐이 되진 않을 테니까.”
주백경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못미더워서 저런 반응인가 싶었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따악!
단궁(檀弓)에서 날아가는 단시의 소음.
아주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게 만들어진 화살이 수십 발.
심지어 누런 풀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염료를 칠해 놓아, 안법을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헉.”
경험이 부족한 홍화연이 숨을 되삼켰을 때, 주백경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군문끼리의 의리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근본을 떠올렸을 뿐이다.
‘대사부의 위치에 있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호위무사였으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위치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서문경이 아니라 홍화연일지라도 앞으로 다가올 혼란에 중요한 사람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지킨다.
그것이 주백경의 책무였다.
“……검견불퇴.”
검을 보고 물러남이 없으니.
서문검법의 가르침이다.
주백경은 서문경이 펼치던 것과 자신의 체력, 공력을 가늠하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사이에 단시 수십 발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거참, 성질이 너무 급하군.
쓴웃음이 저절로 올라왔다.
“주 무사님!”
홍화연의 비명 섞인 고함이 들려왔다.
보나 마나 등 뒤에서도 단시가 날아왔을 터였다.
‘애석하게도, 소가주님의 무공은 정면 대결에서 유리한 것이지 이런 암기를 쳐 내는 데 적합하지 않아.’
무공을 공부했기에 다른 무학의 한계와 약점을 안다.
주백경은 그런 면에서 아주 성실한 남자였다.
대사부로 있으면서 각종 무공을 섭렵하며 해석하길 즐겼다.
그렇기에 서문경과 다른 방향으로 서문검법을 개량하기도 했다.
‘남들한텐 도둑놈이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사부요. 무영신투.’
올곧은 성정 탓에 무영신투를 도둑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백경이 성장한 근본에는 서문경의 동공과 무영신투의 암행술과 잡기술이 있었다.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영보와 검견불퇴를 동시에 담아, 그릇이 넘치지 않게끔.’
분심조화결로 체력과 공력을 배분하여 중하단전의 균형을 맞추고, 천주심경으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중심을 견지한다.
주백경은 검을 붙잡고서 뒤늦게 움직였다.
카가가강!
정면에서 날아온 단시 대다수를 쳐 냈지만 몇몇은 놓쳤다.
살갗을 스치고 핏줄을 찔렸다.
독물을 묻혔는지 속에서 메슥거리는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치명상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무영보를 펼쳐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 내듯 움직이니.
“멈추십시오.”
홍화연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
주백경은 그녀에게 경고하고는 칼을 휘둘렀다.
……투두두둑.
등 뒤에서 날아온 단시까지 쳐 내기를 도합 칠십이 발.
몇 발은 주백경에게 격중하거나 스쳤지만, 홍화연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허억, 후.”
주백경은 턱끝까지 올라온 호흡을 내뱉었다.
독물의 역한 냄새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금방이라도 토하고 쓰러질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대단하군.”
저 멀리서 감탄했다는 듯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주백경의 어금니가 맞부딪쳐 까득거렸다.
“네가 대장이라면 나와 당당히 맞서라.”
“뭐 하러 그러겠나? 병법깨나 읽었을 놈이 일기토의 조건도 모르는가?”
최소한 서로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성립한다는 것을.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명예는 개나 주라고. 그런 걸 따질 거였다면 이러지도 않았어.”
“……비겁하군. 역시 다른 부족의 여자와 아이를 모두 죽이고 다닌다는 초원의 야만인다워.”
“어라.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니 싸잡아서 욕지거린가?”
남자의 말에 주변에서 은신하고 있던 북적들이 왁자지껄 웃어 댔다.
개중에는 음담패설을 내뱉는 자가 있어, 홍화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자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홍가의 소가주라더니 아직 솜털도 나지 않은 애송이군. 전장의 선두에 선다고 자부하는 놈이 이 정도 욕설도 못 견뎌서 얼굴을 찡그리고?”
“…….”
“하하, 네 목을 효수하면 애비가 참으로 좋아하겠어.”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리자, 홍화연도 이를 참지 못하고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주백경이 중간에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저놈한테 달려드는 건 하책 중에 하책입니다.
-하지만……!
-그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찢거나 틈을 노려야 합니다. 아까, 대추나무를 가리키면서 잘하셨지 않습니까?
-……고마워요. 진정됐어요.
주백경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화를 끝냈다.
하지만 전황은 좋아질 리가 없었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었다. 단시가 쏘아지기 전에 더 움직였어야 했다.
‘보신경이 나만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무림의 보신경이 군문보다 뛰어난 건 사실인가.’
당장 서문경만 하더라도 무영신투의 보신경을 뛰어넘진 못했으니까.
홍화연에게 그것을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백경은 상황을 냉정히 견지하고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방금처럼 남겠다고 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도망치셔야 저도 몸을 빼낼 틈이 생깁니다.
-그래도!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여긴 정당한 전장이 아니라, 함정이고 포위망입니다.
-…….
홍화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되었다.
주백경은 다시 검을 꽉 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속의 독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일식경. 그 안에 끝을 봐야 한다.’
적어도 서문경이 도착하기 전에 홍화연이라도 피신시켜야 하리라.
그 일념으로 검을 쥔 순간.
“으아악!”
얼마나 먼 곳일까?
적어도 백 보 넘게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뭐냐? 확인하고 보고해라!”
주백경과 홍화연을 도발하고 비웃던 남자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생겼다.
그것을 깨달은 주백경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오신 겁니다.”
“경이가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얼굴을 보지도 못했고, 또…….”
“압니다. 그냥.”
북적과 마인이 혼재한 전장에 저렇게 날뛰는 사람이 천하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주백경은 서문경이 도착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클클 웃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이따 따지면 되겠지요.”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