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2)
곤륜파의 체면을 위해 속가제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자?
서문경은 고성진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곧바로 거론할 순 없으니, 차례차례 계단을 밟기 위해 일단은 모르는 척 답했다.
“저는 서문세가의 일공자입니다. 곤륜파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없습니다.”
“곤륜파의 체면이 달린 문제네.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안 되겠나?”
“정 그렇다면 아버지께 직접 여쭤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너털웃음을 흘린 고진성이 잠시 턱을 매만졌다.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가 의도한 연출일 터.
서문경은 어렵지 않게 고진성의 다음 말을 떠올렸다.
“그냥 이름만 올리게. 속가제자로서 무언가를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고 곤륜파의 이름을 빌릴 수 있을 때, 마음대로 해도 좋네. 장문인으로서 허락하지. 어떤가?”
“저한테만 너무 좋은 제안 아닙니까?”
“곤륜의 역사상 최초로 운룡대팔식을 깨우친 외인이 자네일세.”
고진성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언뜻 들으면 서문경이 너무 특별해서, 운룡대팔식을 바깥사람이 익혔다고 하기 민망해서……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하는 듯했다.
하지만 서문경은 저 안에 담긴 속뜻을 알았다.
‘역시 한 도가의 장문인다운 심계야. 이런 식으로 날로 먹으려고 들다니.’
결국 서문경은 정의맹의 중진으로 자리하게 될 고수였다.
다만, 자신의 소속은 어디까지나 서문세가일 뿐.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친분을 맺을지언정 깊게 연관되지 않았다.
이 점을 정확하게 견지한 고진성이 듣기 좋은 소리로 끈을 묶으려고 한 것이다.
‘내가 운룡대팔식을 익혔으니까 곤륜의 체면을 위해서라는, 아주 그럴듯한 명분으로 말이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파의 영위(榮位)를 위해서 일하는 장문인에게 있어 서문경의 존재는 탐이 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 경우는 옳지 않다.
‘날 너무 어리게 봤어.’
서문경은 짐짓 화가 났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장문인, 이건 경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으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제가 운룡대팔식을 훔쳐 익힌 것도 아니고, 승룡관주님이 시킨 것을 하다 보니 우연히 익힌 것이지 않습니까? 곤륜의 체면을 위해서 명부에 이름을 올리라는 건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았고요.”
“…….”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고진성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럴 만도 했다.
자기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나이의 청년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물론, 역으로 화를 낼 줄은 몰랐을 테니까.
무림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고수이기에 할 수 있는 실수.
서문경은 그 점을 노렸다.
“강호에서는 선배와 후배, 배분에 대한 법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군문의 공자입니다. 장문인을 존중하긴 하지만 불합리한 것에 따를 순 없습니다.”
“마교와 맞서 싸울 동지로서 내 체면을 살려 줄 순 없겠나?”
“죄송하지만 정의맹에 속한 문파와 가문끼리는 서로 평등합니다.”
무림의 문파나 세가에게 무언가 요구할 수 없으나 요구 당할 수도 없다.
서문경은 자신의 위치가 가지는 강점과 약점을 일찍이 이해하고 있었다.
“승룡관주님이 생각하기에 어떻습니까? 제가 운룡대팔식을 익힌 과정에 곤륜의 체면이 깎일 짓을 했습니까? 수련 중에 깨달은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건 맞네만.”
승룡관주의 시선이 잠시 고진성에게 향했다.
“장문인의 말대로 자네가 곤륜의 상승 무학을 익힌 건 맞네. 가급적이면 속가제자일지라도 연이 있는 자가 배워가는 게 기쁘겠지.”
‘함께 있었던 승룡관주라면 편을 들어줄까 했더니만,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구만.’
이성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감성으로 대항하겠다는 건가.
서문경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무시하고 떠나도 되지만, 정의맹에서 다시 마주할 입장이니 좋게 끝내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탁.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성하민이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서문경의 운룡대팔식에 비하면 미흡하나, 단초라고 볼 수 있을 걸음이었다.
“……!”
“하민아.”
승룡관주가 눈살을 찌푸리고 서문경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걸 본 성하민이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저는 승룡관주님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비슷하게 따라 했어요. 이러면 어떻게 되나요?”
천재를 넘어서는 천재.
성하민이 일순 펼친 운룡대팔식에 고진성은 잠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야 내 제안이 바보 같이 느껴지는군.”
제안의 전제는 승룡관주의 가르침 덕택에 운룡대팔식을 익혔다는 것부터 출발하는데, 성하민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따라 해 버리고 말았으니.
상식의 저변이 무너지고 만다.
목숨을 걸어가면서 운룡대팔식을 익혔던 도사를 바보처럼 만드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서문경에게 두었던 중심을 성하민에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고진성의 목소리가 짐짓 진중해졌다.
“소저는 일공자의 일행이라고 들었네만…… 혹시 곤륜파의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는가?”
“싫어요.”
“싫은 이유가 있다면 말해 주게.”
“햇볕이 안 들어오잖아요.”
“…….”
절대 고칠 수 없는 대전제를 들고 오다니.
고진성은 끌끌 웃어젖히고는 성하민에게 조언했다.
“우리야 서문세가에 항상 우호적이었으니 괜찮지만, 다른 문파에서는 그러지 말게. 반드시 피를 볼 재능이니까.”
“뭐, 옆에 경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 말에 서문경은 순간 깜짝 놀라서 성하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삼 년 동안 무슨 고생을 했는지 봤으면서……!’
대개 안 좋은 상상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던가?
고진성의 웃음이 더더욱 짙어졌다.
“하하……! 하긴, 도사가 되면 혼약은 이룰 수 없으니 말이야. 두 사람이 일거에 거절한 이유를 알겠군. 특히 일공자가 말이야.”
“오해입니다.”
“괜찮네. 한창 쑥쓰러울 때지. 아, 내가 너무 붙잡아 두었나? 이만 쉬게.”
고진성이 승룡관주의 어깨를 붙잡고는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서문경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하민아.”
“왜, 피곤해?”
“오해할 말은 왜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이런 쪽으로 잘 챙겨 주니까 말한 건데…… 내가 괜히 나선 거야?”
“잘했지, 잘했는데. 또 너와 네가 짝인 줄 알 거 아니야.”
“설마 저 도사님들이 소문을 퍼트리겠어?”
“……아니라곤 못하지.”
고성진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대화로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린 청년을 속여서라도 실리를 챙기는 성격이라는 것.
자신을 속가제자로 들여 정의맹의 중심을 꿰차려고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저런 성격이라면 속이 꼬여 있을 확률이 높은데…….’
어차피 서문경과 성하민이 짝이라는 소문을 퍼트린다고 해서 척을 질 수준은 아니다.
자기가 오해를 했다며 사과하면 그만이겠지.
서문경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고진성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 * *
며칠 뒤.
몸이 완전히 나은 서문경은 성하민과 함께 정문으로 나갔다.
그곳엔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오경을 비롯해 어린 도사가 다섯 명이 있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그런 사이인 줄 알았다면 배려했을 텐데 말이야. 미안하네.”
오경의 말에 어린 도사들이 까르르 웃거나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냈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장문인이 소문을 퍼트린 겁니까?”
“그럴 리가! 승룡관주님께서 지나가듯 말씀하셨다네.”
“…….”
남의 입을 빌려서 퍼트린 건가?
서문경은 당장 뒤로 돌아가서 화를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냥 얌전히 하산로를 따라갔다.
어차피 갈 길이 남은 사람, 시간이 부족한 사람 모두 자신이었으니까.
‘설마 홍가 쪽에서 듣진 않았겠지?’
안 그래도 주백경이 홍가를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홍가에서 자신을 만나서 따지려고 한다면 쉽게 할 수 있었다.
서문경의 머릿속에서 홍화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주치면 둘 중 한 명은 피를 봐야겠는걸.’
당장 홍화연만 하더라도 자기가 파혼당했다고 심기가 불편해져서 주먹부터 휘두르지 않았나.
그 핏줄의 가주인 홍가주는 어떻겠는가?
서문경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빨리 청해성에서 나가자.”
“주 무사님은?”
“됐어. 어차피 우리가 어딜 갈지 아니까 알아서 찾아오겠지.”
공동파.
감숙성에 있는 문파로 칠상권과 복마검법으로 유명한 도문이었다.
성급하고 괴팍한 걸로 따지자면 곤륜파보다 한술 더 뜬다.
어찌 보면 홍가와 비슷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가문과는 사이가 좋으니까 괜찮겠지.’
당장 곤륜파만 하더라도 날로 먹으려고만 했지, 운룡대팔식을 익혔다고 협박하진 않았으니까.
그 과정에 고진성이 음흉한 짓을 벌이긴 했지만, 장문인의 위치이기에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곤륜산 중턱까지 내려갔을 때.
“서문경 공자님 맞으십니까?”
짧게 묶은 머리카락과 갑주.
무림인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차림새의 남자가 다가왔다.
서문경의 시선이 갑주의 옆구리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 남자의 소속이 적혀 있었다.
“홍(紅)가입니까?”
“예. 맞습니다. 허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가 다급히 대답하는데, 서문경은 내심 불안해졌다.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싶어서, 먼저 입술을 달싹였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저희 소가주님에 대해서입니다.”
“소가주라면…… 홍화연이요?”
“예. 주백경 무사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설마 약혼 문제라면…….”
“북적입니다.”
남자가 강하게 정색하곤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마교와 결탁한 현령이 북적을 불러들여, 소가주님과 주 무사님을 고립시킨 게 사흘째입니다. 공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 * *
“안심하십시오.”
주백경은 홍화연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사방팔방에서 마인과 북적이 죄어 오는데 어찌 안심하겠는가?
잠은커녕 식사조차 하지 못했다.
힘을 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주백경에겐 믿을 수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일공자님께서 오실 겁니다.”
“……당신이 예상한 시간은 이미 넘었잖아요?”
“그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곤륜산에서 볼일을 끝내리라 예상한 날짜에서 이미 닷새가 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처럼 마인과 북적에게 습격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어떻게든 병사 한 명을 빼내어 곤륜산으로 향하게 했다.
설령, 그 병사가 서문경을 찾지 못하더라도.
“일공자님이라면 오실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이요.”
주백경의 목소리에 강한 신뢰가 실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