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1)
곤륜파에서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체열이 들쑥날쑥하여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발가락은 부러지거나 휘어져 성한 곳이 없었다.
다년 간 챙겨 먹은 영약과 외공의 조예가 깊지 않았다면 보름에서 삼십 일은 정양해야 했을 터였다.
서문경은 침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운룡대팔식이라…….”
단순히 내공으로 체중을 지탱하는 수준의 보신경이 아니었다.
한없이 자유로웠다.
걷고자 하면 걸을 수 있고 진각을 밟아 검을 휘두를 수도 있었다.
은밀함이나 속도는 떨어질지도 모르지.
아직 서문경의 운룡대팔식은 승룡관주에 비하면 한없이 뒤떨어지니까.
그러나 공간을 인식하는 눈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무공에 접목할 수 있을 거야.’
요혈을 노리는 검로를 조금 더 날카롭고 대응하기 어렵게 휘두르거나 한순간 공간을 접어서 절초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
서문경은 운룡대팔식과 함께 곤륜파의 대표적인 무공으로 불리는 구천화우검(九天花雨劍)이 궁금해졌다.
‘기수식 없이 살초로만 이루어진 검법이라던데.’
기수식이 없다는 것은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불필요하다는 뜻.
언뜻 들으면 이게 무슨 헛소린가 하겠지만, 운룡대팔식에 입문했기에 어떤 검법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단전의 심상과 자유롭게 행공할 수 있는 운룡대팔식.
이 두 가지가 구천화우검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한 번쯤 보고 싶네.”
서문경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몸은 괜찮아?”
“……크흠, 흠.”
걱정이 가득한 성하민과 멋쩍은 표정의 승룡관주.
두 사람이 안개를 휘감고 있었다.
서문경은 상반신을 일으키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그러게.”
성하민의 시선이 승룡관주에게 닿았다.
아무리 곤륜파의 가르침을 베풀었다지만, 너무 심한 고행이었으니까.
하지만 승룡관주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었다.
“운룡대팔식을 배우지 않았나? 본문의 귀중한 무학을 배웠으니…… 일주일이면 값싼 대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곤륜파의 상승 무학을 익혔음에도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승룡관주가 서문경의 깨달음을 좋게 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의 입장은 달랐다.
“익히지 못했다면요?”
“…….”
“생고생만 하고, 제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요?”
“곤륜파의 수련법이 원래 그런 법일세.”
승룡관주는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서문세가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기에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 남을 다치게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운룡대팔식을 배웠다면…… 앞으로 보신경의 세계가 한없이 넓어질 터였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상식이 곤륜파에 얽매여 있었기에 생기는 억하심정이었다.
바깥에선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곤륜산에서는 누구나 도전하는 수련 중 하나였으니까.
승룡관주는 괜스레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문파였다면 상승 무학을 유출할 수 없다고 온갖 방해를 했을 터인데…….”
“하하, 어찌 대 곤륜파를 다른 문파와 빗대겠습니까? 제가 강호와 인연을 맺으면서 곤륜파보다 겸허하고 담대한 문파는 본 적이 없습니다.”
“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천무학관에서 누구와 제일 친했겠습니까? 청겸이었습니다. 행동이 가볍기는 하나 성정이 담백하고 허세가 없는 친구였지요.”
“크흠, 흠…… 뭐. 청겸이가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그 친구의 보신경이 그토록 뛰어났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곤륜파의 가르침이 뛰어났던 것이겠지요.”
조금 전 했던 말과 완전히 다르지 않나?
성하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서문경을 쳐다보았지만, 서문경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청겸을 칭찬하면 자연히 곤륜파의 역량을 칭찬하는 셈이니, 내가 운룡대팔식을 배운 것도 승룡관주의 가르침이 뛰어난 걸로 이어지겠지.’
후일 자신이 곤륜파에서 운룡대팔식을 배운 걸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승룡관주를 구워삶아야 했다.
한때 서문세가의 소가주로 있으면서 노인들을 자주 상대하다 보니 배운 눈치와 화법이 이때 도움이 된다.
그 노력이 틀리지 않았는지 승룡관주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올라왔다.
“자네가 뭘 아는군.”
“이게 다 승룡관주님의 가르침 덕택입니다. 비록 험난했지만 그만큼 값진 경험이었지요.”
이외에도 서문경은 곤륜산이 가진 수려하고 신비한 경관과 승룡관주가 가진 기품에 대해 논했다.
물론 너무 과하게 말해서는 안됐다.
어린 나이를 이용해서 신기하다는 듯, 나이 든 도사를 처음 만나서 드는 생각인 것처럼 여러 단어로 비비 꼬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성하민이 속으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참…… 대단하네.”
“대단하지, 곤륜파의 보신경이 이 정도 수준일진 몰랐으니까.”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운룡대팔식에 입문하면서 보신경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앞으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고 여기던 보신경도 무영신투의 것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서문경은 승룡관주에게 물었다.
“편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성하민을 통해 장문인에게 전달한 편지.
그건 곤륜파가 더 이상 계율에 집착하지 않고 곤륜산과 청해성 곳곳에 주둔지를 건설하자는 제의였다.
승룡관주야 호의적으로 대답했지만 장문인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으니.
서문경의 조심스러운 어조에 승룡관주가 피식 웃었다.
“장문인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네. 북적이 청해성을 계속 침입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다행이군요.”
“애초에 곤륜파는 서문세가를 인정하고 있었네. 워낙 관과 무림의 골이 깊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이 냉큼 한 가지를 물었다.
“관주님, 그런데…… 제가 두 팔을 쓰지 않고 절벽을 오르는 게 관주님이 준 숙제이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허허. 숙제를 잘 끝냈으면 관주님도 보상을 주셔야지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승룡관주의 속내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안 그래도 곤륜파의 상승 무학인 운룡대팔식을 외인에게 털렸는데 더 큰 걸 바라는 눈치였으니까.
하지만 서문경의 부탁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구천화우검을 보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검형(劍形)만 보여 주셔도 됩니다.”
“……으음.”
승룡관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구천화우검이란 운룡대팔식과 함께 펼쳐졌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검법.
단순히 검형만 보여 줘선 저잣거리 약장수의 칼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건 곤륜파의 도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서문경이 왜 저렇게 부탁했는지야 알았다.
이미 운룡대팔식을 유출한 거나 마찬가지이니, 승룡관주의 체면을 깎지 않는 선까지 양보한 것이다.
그게 마뜩지 않았다.
“검을 논하는데 형식만을 보여 줘서야 삼류의 칼 놀음밖에 되지 않네.”
“……?”
“따라오게나. 구천화우검의 진수를 보여줄 터이니.”
승룡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문경은 성하민의 어깨에 기댔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 * *
한여름임에도 곤륜산을 휘감은 안개는 해를 가리고 시야마저 제한시킨다.
북적이 곤륜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화살을 쏘려고 해도 제대로 쏠 수 없으며, 불을 질렀다가는 안개와 연기가 뒤섞여 곤륜파 도사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운룡대팔식을 익힌 고수는 눈으로 좇기조차 힘드니.
승룡관주가 그러했다.
저벅, 저벅.
좌도방문에서 말하는 축지법이 저러할까?
한 걸음을 내딛는데 공간을 접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안개 속으로 들어간 승룡관주가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창천명월(蒼天明月).”
나직한 목소리에서 깊은 확신이 담겼다.
서문경은 승룡관주가 상단전 심상을 현세에 꺼내왔음을 직감했다.
상단전의 심상을 완벽하게 칼로 실어서 펼쳐 낼 줄 아는 고수.
그의 칼질이 안개를 헤집은 순간.
“……밝아졌다.”
성하민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항상 안개가 자욱하여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곤륜산 심처.
이곳에 한줄기 햇볕이 내리쬐어 성하민과 서문경의 얼굴을 밝혔다.
‘곤륜산맥의 운해를 가르는 검인가.’
서문경은 승룡관주의 일검을 보고 감탄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일검 이전의 움직임.
기수식이 없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운룡대팔식으로 공간을 뒤틀어서 검력(劍力)에 힘을 더하다니…… 저런 발상이 무공에 가능했다고?’
기괴한 것으로 따지자면 가히 마공에 가까웠다.
자기 마음대로 공간을 접하고 뒤틀어서 힘을 더한다는 건 열양공이나 빙공보다도 특이했으니까.
그러나 승룡관주의 검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호천풍연(昊天風煙).”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무형의 검기가 안개 사이로 녹아들었다.
암살자나 쓸 법한 암검(暗劍)이었다.
하물며 초식에 담긴 살기는 도문의 검법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감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으면 검기의 존재조차 알아차리기 버거우리라.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승룡관주가 운룡대팔식을 펼쳐, 오른 어깨를 비틀고 있었다.
“천간투(天干透).”
안개 사이로 녹아든 검기가 한순간에 운해를 꿰뚫으니.
저 초식에 사람이 격중당하면 어떤 식으로 죽을지, 눈에 뻔히 보이는 듯해서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기수식 없이 펼쳐지는, 오로지 살초만으로 이루어진 검법.
구천화우검의 진가는 한없이 자유로운 보신경인 운룡대팔식과 함께 펼쳐졌을 때 발휘되는 듯했다.
“여기까지 보여 주겠네. 더 했다가는 장문인이 화를 낼 것 같아서 말이야.”
땅에 내려선 승룡관주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쪽을 턱짓했다.
과연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성하민의 어깨에서 벗어나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문인.”
“서문세가의 일공자라고 하였나.”
장문인의 얼굴이 생각보다 젊었다.
끽해 봐야 중년에서 장년.
곱게 차려입은 도관과 도복에서 꼼꼼하고 세심한 성품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승룡관주보다 무거운 기세를 지니고 있어, 기감으로 경지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마치 곤륜산의 지천에 깔린 안개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예. 서문경이라고 합니다.”
“경(經)이라…… 좋은 이름이군. 본도는 고진성(叩眞星)이라고 하네.”
세간에서는 구천신검(九天神劍)이라고 불리는 곤륜파 장문인.
고진성과 마주한 서문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왜 이런 사람이 벽지에 묻혀 있었던 거지?’
서문세가에서 고진성이 십대고수와 동렬이라는 정보를 들었을 때 그러려니 했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 약할 리가 없을 거니와, 무림에 퍼지는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고진성의 경지 또한 마찬가지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십대고수가 아니라 오걸이랑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아.’
무당파의 진무신검이나 무영신투.
두 고수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떠올릴 만큼 고진성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힘이 몹시 무거웠다.
서문경이 그 기색을 읽어 낸 것을, 고진성 또한 알았다.
“어린 나이에 남의 경지와 기세를 헤아리는 능력이 뛰어나군. 하지만 때로는 예의가 아님을 알아야 하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조심이라…… 과연, 자네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군.”
옛일을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너털웃음을 흘린 고진성이 서문경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본도가 듣기로 운룡대팔식을 스스로 깨우쳤다고 하는데, 이대로 하산하면 곤륜의 얼굴이 민망해지니 속가제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건 어떤가?”
뜻밖의 제안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