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13)
외공을 수련한 고수도 맨몸으로 절벽을 오르라고 하면 기겁할 것이다.
누가 미쳤다고 그딴 짓을 하겠는가?
몸을 단련한 것은 튼튼해지기 위해서지, 스스로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곤륜파는 상상에서 끝내지 않았다.
항상 안개가 자욱하고, 미끄러우며, 지반이 약해 툭하면 무너지는 절벽과 산맥.
그곳을 오르기 시작한 도사가 있었다.
“우리가 도(道)라고 부르는 것과 이 절벽이 뭐가 다르겠는가?”
안개가 자욱하여 실체가 없고.
길을 잘못 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며.
때때로 허실(虛實)을 구분하지 못해 마음속 저변(底邊)이 무너진다.
그리 풀어서 말한 도사는 말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도, 절벽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직관에 갇힐 이유가 무언가?”
상식을 파격하여 직관의 그릇을 넓히는 것이나, 도사의 방식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따라하다가 뼈가 부러지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주변에서 그를 보고 헐뜯는 자도 많았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말코도사라고.
깨달은 척 점잔이나 떠는 약장수에 불과하다고.
하나, 도사가 곤륜산맥의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 지 천 일째.
어느 날 스스로 허공으로 솟구쳐 걷기 시작하니.
“이 무공의 이름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그 무공을 만든 도사는 훗날 곤륜산맥 곳곳에 퍼져 있던 도맥(道脈)을 통합한 도문.
곤륜파의 개파조사라고 불렸다.
* * *
제아무리 외공과 내공을 단련한 고수일지라도 무적은 아니다.
두 발로 후려 차듯이 오르는 절벽.
그 과정에서 피부를 찢는 파편과 상처 안쪽으로 스며드는 물기.
딱지가 지는 일 없이 피부가 물기로 부푼다.
아주 사소했던 상처는 조금씩 악화되어, 체온이 오르기 시작하니.
적신호였다.
서문경은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절벽을 오르는 도중에 집중력이 풀리면 다시 떨어지고 말 테니까.
“……쓰읍!”
서문경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비를 퍼붓느냐는 원망을 눈동자에 담았다.
그러나 하늘은 사람의 원망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무정했다.
절벽을 오르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비를 퍼부었다.
“날 정말 좋네.”
서문경은 하늘을 향해 빈정거리곤 다시 미간을 좁혔다.
안개가 자욱하여 안법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시야가 잡히지 않았다.
다른 도사가 올랐던 길은 비 때문에 자칫하면 무너질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눈과 감각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머리가 아프네.’
처음에 무심코 떨어졌던 때 머리를 부딪쳤던 걸까?
현기증이 간혹 찾아왔다.
체온이 떨어져서 지끈거리는 건 덤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 해결법이 보이지 않는 고난.
답이 보이지 않아서 짜증이 확 일어났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랬었어.’
서문경은 전생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어린 시절 납치당하고서 주백경을 잃고 침거하기를 몇 년.
여러 고난을 헤치며 자신을 두들겨댔다.
근기(根氣)만으로 중단전을 수련하고 서문패에게 달라붙어서 버텼다.
이번 생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았을 뿐이다.
미래를 알아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이 모든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다.
완벽한 해답까진 아니어도 방책 정도는 들고 갔다.
하지만 절벽을 오르는 지금은?
‘오랜만에 이런 헛짓거리를 하니까, 쉽지가 않아. 지금까지 몸을 너무 편하게 다뤘어.’
서문경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도대체 어디가 정상인지 알 수가 없다.
물구나무를 선 채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쓰읍…….”
하물며 발톱이 여럿 부러진 건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쓰라렸다.
맨몸으로 이딴 짓이나 시키는 곤륜파가 이상하다, 승룡관주에게 시비를 걸어서 무공사전으로 수집이나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잡념이 머릿속에 뒤섞였다.
고통은 그렇게 의지를 길들이는 듯했다.
“젠장할.”
해묵은 감정을 욕지거리로 털어 낸 서문경이 오른발을 휘둘렀다.
파각!
순수한 근력만으로 절벽을 부숴서 발을 디딜 공간을 만들었다.
부러진 발톱의 파편이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고통은 점차 커지고 물기로 부풀었다.
안 그래도 뜨겁던 체온이 불타고 기침은 잦아졌다.
‘지금이라도 내공을 운용하면……’
어깨 내부에서 검지까지의 경맥, 수양명대장경을 통해서 열기를 해소하고 통증을 억누를 수 있다.
그 달콤함이 서문경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언제든 할 수 있는 기예였기에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
서문경은 아래를 보지 않았다.
누가 응원하든, 손을 흔들든, 절벽을 오르는 자신에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의지였다.
천주심경으로 깎아 낸 부동한 의지와 행동력을 등불로 삼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지 않나.’
서문경은 부평초가 아니었다.
전생을 살았기에, 승룡관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비록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쩌억!
발가락의 살갗이 찢어져서, 입가 또한 자그맣게 들썩였다.
그럼에도 아래를 보진 않았다.
신발이 찢어졌든 피가 흐르든 정상으로 오른다는 의지만 부동하다면 괜찮았다.
“……썩을.”
서문경의 입술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상에서 명상하고 있으면 비가 오는 것쯤은 알 거 아니야, 곤륜파의 고수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 텐데…….”
두 팔을 쓰지 않고 오른다?
실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고행이 아닌가?
철포함을 대성한 인간도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식이란 게 박혀 있다면 자기 몸을 이런 식으로 다루진 않는다.
하지만 점차 오르면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어렴풋이, 뭔가가 보이는 것이 있는데.’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 점이 서문경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오경이 보여준 보신경과 이 수련에 무언가 연관이 있다면……’
허공을 대지처럼 딛고서 쏘다니는 보신경과 절벽을 오르는 고행.
이 두 가지에 무슨 연결점이 있단 말인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서문경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부터 고민이 많았다고.”
확실하지 않으면 일단 몸으로 대처하라.
이것이 군문의 정신 아닌가?
절벽의 정상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면서 무학의 이치를 많이 아는 척, 연결점을 찾는 것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오르다 보면.”
승룡관주가 도대체 무엇을 알려 주려고 이딴 걸 시켰나.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서문경은 고통을 꿋꿋이 참아 내며 절벽을 올랐다.
* * *
명상에 잠겨있던 승룡관주는 안개 속에서 수많은 심상(心象)을 마주했다.
강호에서 마주했던 고수의 검법이나 북적의 궁술.
혹은 꿈에서 보았던 흉측한 괴물 따위.
경험과 망상에서 비롯된 것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때때로 심상 속의 자신이 심상과 싸우기도 했다.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구나.”
승룡관주는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나큰 벽 앞에 멈춰서 멍청하게 때리거나 쳐다보고 있었다.
직관의 그릇이 커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심상을 떠올려도 새롭지 않고 고루했다.
상식을 파격하는 일은 나이가 들면서 더더욱 어려워졌다.
일종의 경향(傾向)이었다.
‘내 손에 익고, 내 인상에 남았던 것을 계속 떠올리는 것뿐이라면…… 결국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소리 밖에 더 되는가.’
한때 오걸이나 십대고수와 싸우겠다는 혈기가 있었으나,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투쟁심이 식었으니 경지가 높아질 리가 없다.
도경을 읽어서 마음을 닦겠다는 것이야 더더욱 의미가 없다.
애초에 자신이 그런 성정이 아니라는 것을 수십 년도 전에 알았다.
‘후배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한지도 수십 년. 파격을 위해 청했던 위치에서 또 굴을 파고 들어갔구나.’
이대로 제자리에 멈춰 서게 되는 걸까?
승룡관주는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조급함을 알면서도 몰아내질 못했다.
서서히 접근하는 북적, 그 뒤에 도사리는 마교.
어느 하나 녹록치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오걸과 싸워서 승리를 자신할 정도라고 했다.
‘서문의 일공자가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니, 곤륜파의 가르침을 베풀려고 했는데…….’
승룡관주의 기감이 절벽으로 향했다.
중간에서 살짝 위.
서문경이 투박한 방법으로 꾸준히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실로 무식하지 않나.’
승룡관주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세간에서 그토록 천재로 불린다는 서문경이라면 두 팔을 쓰지 않더라도 신묘한 보신경을 펼칠 줄 알았건만.
절벽을 후려차서 발 디딜 곳을 만들 줄이야.
심지어 시시각각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저대로 두었다간 정신을 잃고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슬슬 일공자를 멈춰야겠군.”
승룡관주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쿠르르릉……!
절벽 주변에 뇌명(雷鳴)이 내리쳤다.
구름에 뇌운이 뒤섞인 듯, 안 그래도 꺼멓던 하늘이 어두침침하여 주변이 새까맸다.
그 순간에 승룡관주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
허공.
절벽 위로 솟구친 서문경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왜 내공을 쓴 거냐, 이래선 수련이 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기초에서 갑자기 심화로 들어선 꼴이 아닌가?
승룡관주는 어떠한 말도 잇지 못하고 허공에 멈추어 선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저건 서문경에게 베풀려고 했던 가르침이 아니었다.
“저게, 무슨.”
서문경 주위로 용솟음 친 구름.
그 뒤에서 한가득 내리치는 뇌명과 벼락.
서문경은 곤륜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삼은 채 크게 웃었다.
“하하……!”
무공사전을 쓰지 않고도 익힌 곤륜파의 상승 무학.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관과 상식이 부서지며 그릇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절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었다면?
그 착안을 따라서 내공을 운용했을 뿐이었다.
서문경은 경악하는 승룡관주과 마주했다.
“어떻습니까?”
서문경은 허공에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또 한 발.
발아래 용천혈에서 무형의 진기가 일렁이며 전신을 받쳤다.
진기의 형태를 짜내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순히 걸어야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서문경은 승룡관주 앞에 내려섰다.
“수련은 끝입니까?”
뜨거운 호흡과 발의 고통에서 적신호가 느껴졌다.
당장 쉬지 않으면 며칠 동안 골골 앓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가 서문경을 지탱했다.
“말씀해 주세요. 어떻습니까?”
서문경을 가만히 보던 승룡관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서문경, 자네를 운룡대팔식을 스스로 깨달은 외인으로 인정하겠네.”
곤륜파 역사상 최초.
승룡관주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인이 운룡대팔식을 완벽하게 펼친 순간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