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12)
“노인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
“여기서 이틀을 기다리라니, 억지가 심하군 그래.”
갑자기 승룡관주가 앓는 소리를 하기에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먼저 정상에 올라갔기에 금방 올라겠다는 관용구를 읊었을 뿐이지 않나?
뭔가 더 큰 오해가 생기기 전에 푸는 편이 낫겠지.
“그냥 말이……”
“좋아, 간만에 젊은이랑 내기하니 없던 혈기가 돌아오는 기분이야. 나도 곡기(穀氣)를 끊고 참선하고 있겠네. 기다리지.”
그렇게 말한 승룡관주가 가부좌를 틀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좌선좌공으로 명상을 시작하니, 곤륜파의 도사다운 현기(玄機)가 담긴 공력이 주변의 운해와 뒤섞였다.
쿠르르…….
그 광경은 강호에서 보기 드문 기사인지라 옆에 있던 성하민과 오경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와…….”
“뵙지 못한 사이에 천지 간에 호흡하는 곳까지 도달하신 건가?”
어쩌면 장문인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둥, 다른 도사도 탄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문경의 경우에는 달랐다.
‘이제 와서 그냥 관용구였다고 하면…… 세 번째인가?’
곤륜파의 무학을 익히고 있었다는 걸 들키긴 했지만, 오경이 먼저 승룡관주의 속이 좁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만일 저 명상에서 깨워서 ‘하하, 그냥 패기를 보여준 것 뿐입니다. 오해를 하셨군요.’라고 했다간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서문경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젠장, 뭐 어쩌겠어. 이미 자기 마음대로 해석 다 끝났는데.”
절벽을 빨리 올라가면 그만이다.
서문경이 하단전의 공력을 운용하는 순간, 뒤에 있던 오경이 제지했다.
“절벽을 오르는 도중에 공력을 쓰면 안 되네.”
“……뭐요?”
“그게 곤륜파의 방식이네.”
“아니, 그게 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고 실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절벽을 훑었다.
확실히, 발자국과 칼자국이 생긴 곳에 공력으로 생긴 분진 따위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쉬이 납득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미끄러운 절벽을 공력으로 오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고도가 높아 중턱부터는 안개가 피어있는 곤륜산.
그곳에서 가장 높고 은밀한 곳에 있는 게 곤륜파였다.
주위에 있는 절벽이라고 해봐야 다른 환경에 있을 리가 없다.
스윽.
서문경이 손바닥으로 절벽을 만졌다. 돌이라서 미끄럽진 않지만, 한 사람의 체중을 안정적으로 받쳐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오경이 히죽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밥값이 아까우니 죽으라고 하는 줄 알았네.”
“됩니까?”
“자네의 동기인 청겸은 아홉 살에 정상을 올랐다네.”
“……그놈이라면 편법을 쓰지 않았을까요?”
“허허, 사질의 성정이 워낙 철부지 같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수작을 부리진 않네. 내 알기로 등정 과정을 지켜본 사백도 있을 거야.”
“…….”
새삼 놀라웠다.
청겸 그놈이 아홉 살에 이런 절벽을 오를 깜냥이 있었을 줄이야.
서문경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걔가 했으면 나도 가능하겠지.’
여기서 더 물어봐야 용기가 부족하단 소리 밖에 더 듣겠나.
하물며, 곤륜파의 보신경을 배우기 위한 요체가 이 수련에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서문경은 절벽에 오르기 전에 품속의 편지를 성하민에게 건네주었다.
“나 대신 장문인께 전달해줘.”
“너는?”
“금방 올라가고 갈게. 대충 세 시진이면 되겠지.”
그 말에 오경을 비롯한 곤륜파의 도사 몇몇이 피식 웃었다.
어린 조카가 얼척없는 소리를 하는 걸 듣듯 말이다.
자존심에 작은 상처가 났다.
‘뭐 안 될 것 같나?’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청겸이 어린 나이에 해냈다는 것만으로 천무학관에 입관시킬 정도로 뛰어난 후기지수로 인정받았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서문경 또한 전생부터 지금까지 천재로 불렸던 몸.
뿌득, 뿌드득.
가볍게 몸을 푼 서문경이 절벽에 발끝을 댔다.
* * *
안정된 호흡과 자기 확신,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길을 찾아내는 능력.
곤륜산의 절벽을 오르기 위해 쌓아야 하는 능력이자 보신경의 핵심이 되는 재능이었다.
특히 허공을 평지처럼 누비기 위해서는 상식이나 직관을 부숴야 했다.
이런 절벽을 공력 없이 오를 리가 없다.
안개가 끼어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금방 미끄러지고 말 것이다.
그 불안이 마음을 잡아먹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못한다.
‘곤륜산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살아남으라는 훈육과 보신경의 기본을 쌓기 위한 훈련이거늘.’
오경은 절벽을 오르는 서문경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서 담대한 마음을 기르게 하기 위한 절벽 오르기.
심지어 승룡관주는 두 팔의 사용마저 제한했다.
미끄러지면 아무런 안전 장치 없이 떨어지란 소리와 마찬가지.
그 사실을 서문경이 모를 리가 없는데도.
스윽, 탁.
스윽, 탁.
서문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후우.”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불안정한 지반을 한 번이라도 밟았다가는 높게 올라간 만큼 떨어지고 만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래를 쳐다봐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마음이 심약하면 아예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서문경의 심지는 강인했다.
‘겨우 이런 불안에 사로잡혀서야 마교와 싸울 수 없어.’
후회와 절망, 가족과도 같은 장군들의 패전보와 수많은 죽음들.
전생에서 수없이 겪어보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천마에게 목숨을 구걸 받아 서문세가까지 돌아간 적 있는 인생이었으니.
절벽에서 떨어지는 걸 두려워할 만큼 유약하게 살지 않았다.
‘왜 이걸 시켰는지는 알겠어.’
곤륜파의 보신경에 담긴 진수가 무엇인지 얼추 깨달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오경이 한순간 보여줬던 꼿꼿한 자세.
허공에서 대지를 밟은 것처럼 화살을 베고 달리던 광경은 여전히 기이했다.
‘상승 무학에 가까운 무언가였는데, 어떻게 하는 걸까?’
서문경은 분심조화결로 여러 가지 생각과 지반을 찾는 관찰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자신했던 것처럼 세 시진. 아니, 한 시진 안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오경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정말로 두 팔을 쓰지 않고 오를지도 모르겠어.”
“경이니까요.”
성하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문경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로라면 승룡관주와 마주치는 거야 시간문제다.
바로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
투둑, 툭.
뺨과 손등에 차가운 촉감이 내려앉았다.
성하민의 시선이 무심결에 하늘로 향했다.
“비가 내리네요?”
“……위험해.”
“네?”
“당장 일공자를 데려오겠네.”
오경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보신경을 펼쳐 절벽 중턱까지 솟구쳤다.
비가 내릴 때와 내리지 않을 때의 절벽은 그야말로 천양지차.
웬만한 곤륜파 고수도 비가 내릴 땐 절벽을 오르지 않는다.
하물며 두 팔을 쓰지 않는 서문경이라면 균형을 잡기 더더욱 어려울 터였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쉬게!”
“…….”
“이보게!”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서문경도 억지라는 것을 알았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발끝이 전보다 훨씬 질척해지고 지반이 불안정해졌다.
수많은 도사가 오르면서 만들어진 틈.
그 사이로 빗물이 들어가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는다.
서문불퇴(西門不退), 가문의 정신에 따라서.
“올라갈 겁니다.”
“누가 포기하라고 했나? 쉬라고 했지!”
“…….”
“억지만 부리는 게 아니라 고집도 세구만. 내가 억지로 데려가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오경의 짜증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서문경은 그나마 안정된 지반을 찾고 걸음을 옮겼다.
이에 오경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적어도 공력을 운용해서 체온을 지키게. 가뜩이나 안개가 강한 곳인데 비까지 맞으면 한기가 오장육부를 침습할 걸세.”
“공력을 쓰지 않고 오르는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집을 부릴 텐가?”
“원래 고집을 부려야 고수가 되는 겁니다.”
서문경은 자그맣게 웃으며 농담했다.
비록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했지만, 의지가 쇠하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다.
“……하.”
오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절벽에서 내려갔다.
“소저가 설득하면 안 되겠나?”
“도사님께서 말씀했는데 안 들었다면, 저도 무시할 거예요.”
성하민은 서문경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았다.
다른 사람보다 무조건 자기 생각을 우선으로 하는 남자.
억지를 부려서 비무를 제안하고 배려없이 무자비하게 끝내버리는 무인.
사람이 한 장의 종이라면 서문경은 어두운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군문의 아들로서, 마교와 대적하는 고수로서 보자면 다르다.
“저럴 땐 누가 와도 못 말리거든요. 자기가 무조건 다른 사람보다 강해져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치는 건 아예 두려워하질 않아요.”
서문경을 삼 년 동안 보았다.
마교와 싸우기 위해서, 정의맹의 중심에 설 고수가 되기 위해서 누구보다 자길 깎아냈다.
한동안 거처에서 노닥거리던 성하민과는 노력의 질이 달랐다.
어쩌다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선량한 짓을 하려면 강해져야 하거든.
남을 돕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군문의 자식으로서 외적과 싸울 순 있지만, 대명의 양민을 수호하기 위함이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임하진 않는다.
선의(善意)보다는 의무나 소임.
서문경은 그런 사람이었다.
“마교와 싸워서 이긴다는 지키려고 저러는 거예요.”
성하민의 말에 오경은 시선을 돌렸다.
서문경의 어깨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린 나이에 짐이 무겁구나.”
남들은 약관이 되어서도 청춘을 즐기거늘, 어째서 마교와 싸우겠다는 결의로 움직이게 되었을까?
그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서문경의 자세가 무너졌다.
빠득, 드드득!
서문경이 걸음을 잘못 옮겨서 생긴 실수가 아니었다.
‘……발자국이 많은 곳을 따라 오르려다가 지반이 무너졌구나.’
발자국이 많다는 것은 절벽을 오르기가 수월한 길이라는 뜻.
서문경의 직관이 정확하다는 것에 놀라웠지만, 하늘에서 비가 쏟아내리는 한 어느 때보다 위험한 길이었다.
발자국이 많으면 빗물이 파고들 틈새가 많을 테니까.
오경의 불안한 망상이 그대로 이어졌다.
“……헉.”
서문경이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절벽에서 추락했다.
쿠웅!
“경아!!”
성하민은 눈을 크게 부릅 뜨며 서문경에게 달려갔다.
척 보기에 공력을 쓰지 않고 맨몸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미련하게 왜 그래! 위험할 땐 공력을 써도 되잖아!”
“……그건 내기나 수련의 뜻에서 어긋나지. 어떤 때에도 쓰면 안 돼. 한 번 타협하기 시작하면 계속하게 될 거야.”
서문경은 고개를 털었다.
어딜 잘못 부딪쳤는지 뼈가 아렸지만, 피가 나오진 않았다.
“아직 높게 오르지 않았을 때 떨어져서 다행이다. 그치?”
“뭐가 다행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 대충 어떻게 오르면 될지 알았으니까.”
천연덕스럽게 웃은 서문경이 오경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비가 올 땐 남들이 오른 길로 가는 편법은 안 되겠다. 맞죠?”
“……그렇네.”
“제가 길을 만들어야겠네요.”
곤륜파의 도사가 만든 길이 아니라, 서문경이 새로운 길을 찾아서 올라야 하니.
서문경은 문득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무공을 베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또다른 무학으로 변형하기 시작한 이래로 삼 년째던가?
신비한 무공사전을 가진 자신의 숙명 같아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좋아, 다시 시작해볼까.”
서문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