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11)
며칠 지나지 않아.
서문경은 오경의 뒤를 따라 곤륜산을 올라갔다.
구름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운해(雲海).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숨쉬기가 어려워 약초꾼마저 꺼려한다는 곳.
곤륜산의 심처에 위치한 도문에는 영산의 기운이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본산에 온 것을 환영하네.”
자욱한 안개와 희박한 공기.
젊은 사내조차 버거워할 척박한 환경임에도 늙은 도사의 걸음은 산보를 하듯 가벼웠다.
장문인 혹은 장로에 위치한 고수일 터.
서문경의 기감이 한차례 그를 탐색했다.
안법으로 시퍼렇게 물든 눈동자는 안개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니.
도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과연, 호전적인 성격이라는 건 익히 들었네만 인사도 없이 본도를 가늠하는고?”
“실례했습니다. 서문세가의 일공자, 서문경이라고 합니다.”
“저, 저는 동행인 성하민이에요.”
“허허…… 곤륜파에 자네들처럼 어린 사람이 적다 보니 반가울 따름일세. 본도는 곤륜파의 승룡관주(乘龍館主)라네.”
승룡관주는 언뜻 보면 성격 좋은 할아버지 같았지만, 동문인 오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혹시 몰라서 말하지만, 승룡관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선 안 되네. 평소엔 온후하셔도 한 번 마음이 뒤틀리시면 열흘은 바뀌지 않는 분이니까.
‘도가에 입문한 삼촌이네.’
딱 서문패가 저랬다.
어떤 과업 앞에서도 당당하던 양반이 정말 사소한 일 때문에 토라지곤 했으니까.
서문경은 오경의 경고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주둥이가 가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할 때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곤륜의 도사가 맞으신지요?”
“웬 허튼 소린고?”
언제 웃었냐는 듯 승룡관주의 미간에 절벽이 만들어졌다.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금세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기에.
서문경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그게. 오다가 북적과 싸워 가지고 피로가 쌓여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번째일세.”
“……?”
첫 번째는 대체 언제였단 말인가?
서문경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속으로 탄식했다.
‘아, 설마 초면에 안법으로 쳐다봤다고…… 그게 첫 번째야?’
옹졸하기가 무슨 종지만 한 사람인가?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몹시 노력했다.
서문패 같은 사람과 여러 해 지내봤기에 알았다.
한 번 트집 잡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서문경은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사죄했다.
“마교도 중에 좌도방문의 술사가 있다고 들어서 두서없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행동거지를 조심하겠습니다.”
“설마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을 것 같나? 한 번 사과했으면 됐네. 그만큼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닐세.”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런 말투는 왜 옹졸한 사람마다 똑같이 하는 걸까.
호기심이 불쑥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무공 수집 마렵네.’
저 콧대를 꺾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와…….”
성하민은 곤륜파의 경관을 보고 감탄했다.
운해가 잔뜩 깔린 신비로운 광경과 신령한 기운을 머금은 거목.
그 중심에 절벽이 있었다.
수많은 발자국과 칼자국, 깨지거나 부러진 손톱 따위가 얼룩덜룩했다.
“저기가 보신경을 수련하는 장소인가요?”
“미욱하게도, 곤륜산에서 운신이 자유로워지려면 보신경 밖에 없다고 여겨서 말일세.”
“판자를 놓으면…… 아. 안개 때문에 금방 녹슬겠네요.”
“영특한 소저구려. 동행한 사람과 다르게.”
승룡관주의 시선이 서문경을 슬쩍 훑고 지나갔다.
아직도 말실수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눈치라, 참으로 감탄스러운 모습이었다.
‘명문 도가의 장로라는 사람이 속이 저렇게 좁아서야!’
물론 서문세가의 일공자인 자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절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 곤륜파의 기상(氣像)이 있었다.
“그거 아는가?”
승룡관주가 절벽에 새겨진 자국 하나하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두려움이든 의심이든 마음속에 미혹이 있으면 사람은 금세 얼어붙고 평정을 잃기 마련이지. 곤륜파의 도사라면 그것을 없애야 하네.”
고산병(高山病).
승룡관주가 저 말을 입에 담자, 오경이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린 듯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그보다 긴 세월을 살아온 승룡관주에게는 무뎌질 대로 무뎌진 기억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가끔 머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멍해지고 손끝 발끝에 감각이 사라질 때가 있네. 그때 제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혹은 위기에 처하더라도 살아남을 방편이 필요하지. 이게 곤륜파의 보신경이 발전하게 된 계기일세.”
그 말에 성하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위험하잖아요. 그럼, 산에서 내려가서 살면 안 되나요?”
곤륜파의 장로에게 산에서 내려가서 살라니, 저게 그냥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서문경과 오경이 순간 당황했으나, 정작 승룡관주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아주 예전부터 고민하다가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고요했다.
“곤륜산에 서왕모가 있어, 아름다운 연못과 두 개의 강, 반도원(蟠桃園)을 가졌다는 전설이 있지…… 불로장생을 얻을 수 있다는 곳이 바로 여기네. 도사로서 어찌 떠날 수 있겠나?”
“…….”
“또, 일공자. 자네의 아버지에게 들은 말이 있네.”
“그게 뭡니까?”
“처음부터 그런 전설은 아니었을 거라고, 한족이 차지한 경계가 넓어지면서 바뀌었을 거라고 하더군. 외적과 맞서기 좋은 요충지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승룡관주가 끌끌 웃었다.
“곤륜산의 도사에게 너무 발칙한 소리였네. 화를 잔뜩 내고 수년 동안 방문첩조차 받지 말자고 주장했었지. 십수 년 전 일일세.”
그때는 참 편협했었노라고, 승룡관주가 말을 덧붙였다.
“자네 가문에서 방문첩을 보냈을 때 자연스레 떠오르더군. 그런 말은 인정할 수도 인정해서도 안 된다고 했던 시절이 말이야.”
“……지금은 다르십니까?”
“다르지.”
승룡관주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교가 적성이라는 사교를 부활시켜 사람을 바치고 먹는단 소문까지 나돈 것이 몇 달 전의 일.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지도를 보는데, 서문이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곤륜산이 청해성의 요충지가 된다면 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을.
강산도 십 년이면 바뀌는데 민간의 전설이 수백, 수천 년 동안 똑같을 리 없다는 것 역시.
이제는 자존심을 접을 때였다.
“예로부터 곤륜파는 서문세가를 인정하고 동맹을 유지했네. 당장 북적이라면 이를 가는 제자들이 많으니 말이야.”
북적이 청해성을 침탈한 건 이번만이 아니다. 크고 작든 소요를 일으키며 대명의 땅을 침범했다.
하나 이번에는 경중이 다르다.
성 전체를 넘어, 그 너머로 향할지도 모른다.
승룡관주의 시선이 서문경에게 향했다.
“서문세가를 대표하여 온 자네가 허술하거나 유약한 사람이었다면 또 다른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본도와 싸워도 쉽게 밀릴 것 같지가 않아.”
“…….”
서문경은 말없이 주먹을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걸 본 승룡관주가 히죽 웃었다.
“호승심이 대단하군. 본문에서 보낸 청겸이도 일공자를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청겸의 보신경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인 싸움이 벌어지면 투쟁보다는 대화로 풀어 가려고 할 걸세. 그래서 본도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
승룡관(乘龍館).
빗장 없는 문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 곤륜파의 무공을 익히면서 조언을 듣기에 용이한 곳.
그곳을 관리하는 대사부가 바로 승룡관주였다.
무공보다는 옷과 여자에 관심이 많았던 청겸과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서문경은 청겸에 관한 험담보다는 승룡관주에게 집중했다.
“관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장문인의 뜻으로 이해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이제 도문이라는 고집을 꺾을 때가 온 것이지. 청해성과 북적은 예로부터 악연이 깊어, 저기 있는 오경이처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제자가 한둘이 아니네.”
“……크흠, 흠.”
자기 얘기가 나오자 오경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북적이 청해성의 경계를 자꾸만 넘어오자, 과거에 얽매인 복수나 한을 풀기 위해서 하산하려는 도사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오경은 장문인의 허락을 받고 내려간 사례였다.
승룡관주가 그를 보고 끌끌 웃었다.
“네 싹수가 그래도 괜찮아서 허락한 것이다. 혹여나 말 안 듣고 사고 칠 놈이었다면 붙잡았겠지.”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정진해라. 더. 더 강인해져야 견딜 수 있을 터이니.”
그렇게 말하는 승룡관주의 눈이 노인답지 않게 형형했다.
바로 그때.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승룡관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앞으로 제가 할 일이라곤 서문세가의 의중을 전하고 내려가는 것입니다만, 그걸로 끝내고 싶진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걸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서문경은 곤륜파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고 전권은 승룡관주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섣불리 요구하는 것보다 조언을 듣는 것이 낫다.
“……오호, 일공자도 소저 못지않게 영특했군.”
서문경의 꾀를 알아차린 승룡관주가 자기 수염을 배배 꼬았다.
사실 영특하기보다 영악한 것에 가까웠지만, 방향성이 올발랐다.
“청겸보다 훨씬 낫군. 가르침을 구하는 자세가 조금 불손하긴 하지만, 초면에 호승심을 불태운 것도 그렇고 열의는 잘 알았네.”
“제가 무엇을 하면 될지 알려 주십시오.”
“좋아. 곤륜파의 무학을 가르치는 승룡관주로서 숙제를 하나 주겠네.”
승룡관주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한곳을 가리켰다.
그 방향에 있는 걸 본 성하민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저, 저건……!”
칼자국과 발자국, 손톱 파편으로 가득한 절벽.
자칫 잘못하면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질 고행이었다.
그러나 승룡관주는 아직 숙제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강호의 풍문이 그저 소문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보고 알았네. 일공자가 이룬 경지는 필시 높고 탄탄할 테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을 테지.”
“맞습니다.”
“사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았네. 혹시 본문의 보신경을 따라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서문경은 거짓말하기보다 솔직하게 답했다.
내면에는 이미 경악으로 가득했다.
‘설마 트집을 잡은 게 그 이유였나.’
사문의 무공을 자기보다 훨씬 어린놈이 따라한 티가 나니 아니꼬운 게 당연한 법.
이제야 승룡관주가 왜 옹졸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저 절벽을 두 손을 쓰지 않고 정상까지 올라가게.”
“예?”
“바쁜 몸인 걸 아니 이틀 주겠네.”
습기가 잔뜩 묻은 절벽을 양손을 쓰지 않고 오르라니?
서문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두 발만으로 저길 어떻게 올라갑니까? 흔적을 보면 손이나 칼을 이용해서…….”
“그 아이들은 자네만큼 경지가 뛰어나지 않잖나?”
“…….”
검법에 비해 보신경이 부족하다는 거야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한순간 기가 차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에 승룡관주가 끌끌 웃었다.
저벅저벅, 탁.
절벽 앞으로 다가간 승룡관주는 능공허도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
“허, 허허.”
운룡대팔식의 전반부에 입문했던 오경마저도 헛웃음 지을 보신경이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승룡관주가 서문경을 내려다보았다.
“가능하겠는가?”
“거기서 딱 기다리십시오.”
서문경은 입술을 씰룩이며 절벽 앞까지 다가갔다.
“금방 올라갈 테니까.”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