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10)
참으로 기품 있는 보신경이다.
서문경은 오경의 움직임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남들이 대지를 대들보로 삼는다면 곤륜파의 보신경은 기본부터가 다르다.’
고도가 높고 안개가 가득한 곤륜산.
자칫 발을 헛디디면 천애의 절벽에 떨어질지도 모를 환경에서 곤륜파의 도사는 대를 이어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곤륜산을 자기 집처럼 노닐 수 있는가?
북적과 무림인 사이에서 밀리지 않을 무학이란 무엇인가?
무공의 근본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약자의 궁리에서 비롯되니.
곤륜파가 이토록 중앙과는 먼 곳에 있으면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에는 수십 대를 걸쳐 보신경의 이치를 연구한 선현이 있기 때문이다.
스윽, 스르륵…….
오경이 허공을 노니며 북적을 뒤쫓음에도 갈대는 휘어지기만 할 뿐. 꺾이지 않았다.
한없이 가볍고 자유롭다.
‘……그렇군.’
보법과 경신(輕身)으로 불가능하다 여겨진 허공의 영역을 답파하니.
오경의 보신경을 보고서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중간에 저 선배를 만나서 다행이야.’
처음부터 곤륜파의 장문인이 펼치는 보신경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예전에 무영신투의 보신경을 보고 배우지 못했던 것처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서문세가의 보신경이란 결국 오래 걷고 빨리 뜀박질하기 위한 것이지 무림처럼 기예를 뒤섞거나 눈을 희롱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시작점이 다르다.
그 차이를 오경의 미숙한 보신경을 보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변엔 워낙 뛰어난 고수가 많아서 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 아니, 어쩌면 내 오만이었을지도 몰라.’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이 가장 뛰어나며, 강호의 무학은 참고할 것에 불과하다는 오만.
그것이 보신경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눈을 가린 것이다.
서문경은 지금까지 자신이 펼쳤던 보신경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부끄럽지만, 가장 미숙한 것부터.
‘이 기회에 내 보신경을 뜯어고쳐야겠어.’
앞으로 만날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동격에서 그 이상을 초월하는 것.
서문경은 천주심경을 수련하면서 한 가지를 배웠다.
‘무인은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
천주심경의 가르침을 보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었다.
천하의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 굴강함과 부동한 의지로 하늘에 맞닿으라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약장수도 저런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불가능하다고 자신을 호도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소우주(小宇宙)의 그릇을 키우기로 했다.
광주리만한 그릇에서 대야로, 대야의 물을 바다로 쏟아 내니…….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가능성을 상단전에 품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것이 서문경의 답이었다.
‘보자.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저 무학을 창안한 옛 도사의 뜻을 헤아려 보는 거야.’
서문경은 오경의 보신경 뿐만 아니라 사소한 잔근육의 일그러짐까지 눈에 담았다.
그 시선은 무인이 아니라 학문을 탐구하는 문인에 가까웠다.
스슷.
오경의 발끝이 바람을 저미는 찰음과 공력이 지나는 태충혈과 곤륜혈.
하나도 빠짐없이 안법으로 들췄다.
북적을 추격하던 오경이 한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흘낏 바라볼 정도였다.
“……이 무슨.”
북적을 쫓으라 시켜 놓고 팔자 좋게 타문의 무학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후배라니.
오경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대로 서문경이 곤륜파의 보신경을 눈으로 베껴 간다면 사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터였다.
‘조금 전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오경의 발걸음이 한층 더 경쾌해졌다.
……탁.
발끝이 허공을 두드렸다.
마치 대지에 선 것처럼 오경의 신형이 안정적으로 꼿꼿해졌다.
“……!”
서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직접 보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독자적인 무학 체계라는 말로 부족하다.
직관 자체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막대한 공력으로 발판을 만든 것일까?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단순한 눈속임일뿐, 서문경의 기감을 속일 순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한 번.
탁.
오경이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갈대 끝을 짓밟고 지나가는데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이, 무슨!”
그 광경을 본 북적들이 기겁하며 화살을 쏴댔다.
깃과 대가 짧아 육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화살들.
자칫 잘못하면 오경의 목이 꿰뚫릴 지경이기에 성하민이 앗, 하고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오경의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스윽, 타다닥!
오경이 갈대밭 위를 마구 달리며 화살을 쳐 냈다.
지금까지 본 고수의 보신경에 비하면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만일 무영신투나 적마였다면 소리조차 내지 않고 움직였을 테니까.
그러나 미숙하기에 서문경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나한테 보여 주기 위해서인가?’
아직 막연하게 익혔을 뿐인 곤륜파 보신경의 진수를 보여 준 것이다.
서문경은 오경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작정 곤륜파로 갔다면 이런 호의를 받진 못했겠지.’
곤륜산에서도 오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서문경이 칼을 뽑았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내딛는데.
서문경의 왼손에 무공사전이 쥐어져 있었다.
* * *
북적을 산 채로 묶어서 압송하고 난 뒤 일주일.
서문경은 운룡반천장과 보신경의 수련에 매진했다.
전자는 무공사전으로 수집한 무공이라 그런지 수련하기가 쉬웠지만, 후자는 여태껏 한 번도 겪지 못한 난항에 처했다.
“어떻게 가능한 거지?”
스윽, 탁.
오경이 일전에 보여 줬던 것처럼 허공을 발판으로 삼아서 칼을 휘둘렀지만, 공력만 무지막지하게 소모하고 제대로 된 시연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성하민마저도 고개를 여러 번 갸웃거렸다.
“어렵네…….”
“당연히 어려울 것이네. 본산의 보신경은 가히 이종(異種)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니까.”
“단서라도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어허, 사문의 무학을 아예 입으로 유출하란 소린가?”
“……음.”
성하민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차 허공을 발을 내디뎠다가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다만 그 모습을 보는 오경의 표정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봐 온 서문경과 성하민은 그야말로 일세의 천재였기에.
설마 성공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설마…….’
오경의 심중에는 뒤늦게 찾아온 후회로 한가득이었다.
저 둘에게 보여 준 보신경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렵사리 배운 운룡대팔식의 전반부 단초를 보여 주게 될 줄이야.’
서문경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너무 고마워서 보여 주고 말았지만, 곤륜파의 상승 무학을 보여 준 건 단전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였다.
도문이니까 목숨을 빼앗진 않겠지만…… 오경에게 있어 사형이나 마찬가지.
오경이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차에,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겐가?”
스윽, 탁.
한순간 서문경의 발끝이 허공을 내딛었다가 가라앉았다.
내공의 수발에 아직 직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가 직관을 버리고 새로운 감각을 깨우치면…… 사문과는 다른 독자적인 보신경을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운룡대팔식이란 허공을 자유롭게 누비며 펼치는 여덟 번의 변화 혹은 날갯짓.
사문의 검법인 구천화우검과 뒤섞으면 천하제일의 검법이자 보신경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오경의 시선이 서문경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리 어려우면 수련은 다음에 하지 그러나?”
“걸으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선배야말로 우릴 너무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겉으론 여유로운 척 피식 웃었지만, 오경은 계속해서 서문경을 곁눈짓했다.
서문세가의 보신경.
북적과 싸우는 걸 멀리서 보았기에 어떤 방식으로 펼치는지 알았다.
‘단순하고 명쾌하기만 한 보신경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성하민이 계속해서 고꾸라지는 건 이미 많은 기예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이를테면 몸에 익어 버린 버릇과 동작.
어느 무림인이 보아도 뛰어난 보신경을 지니고 있기에 새로운 보신경을 익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체형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서문경은 어떠한가?
‘조금씩 비슷해지고 있어.’
처음에는 허공에 발을 내딛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게 점차 능숙해지고 있다.
허공을 텅 빈 공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점차 또다른 발판이나 대지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저 직관을 감각으로 변화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오경은 서문경이 가진 재능에 불합리를 느꼈다.
‘사문의 도사들이 보면 피를 토하겠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점차 궁핍해지던 고향을 구해 준 은인 이전에 서문경이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군문에서 태어난 자식이요, 대명의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라는 소임을 지키기 위해 강호로 나왔습니다.
저 한마디가.
서문세가를 대명의 흔한 관리 중 하나로 여기던 오경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서문경에 비해 오경은 협의조차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차피 나에겐 과분한 무학이었을지도 모르지.’
운룡대팔식.
곤륜파 보신경의 정점에 위치한 상승 무학.
가진 재능이 부족하여 전반부로 향하는 단초만을 배웠을 뿐이지만, 이게 서문경에게 도움이 된다면 알려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음을 새롭게 다잡은 오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직관을 버리고 감각으로 대하게.”
“……?”
“그게 전부일세.”
“……아.”
서문경이 까닭 모를 탄식을 흘렸다.
그걸 본 오경은 내심 기대했다.
“감사하단 말은 하지 말게. 나도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가르쳐 준 것 뿐이니까.”
“가르쳐주지 않아도 됐는데.”
“뭐라고 했나?”
“선배께서 가르쳐 주는 것보다 제 방식으로 익히길 바랐습니다. 어차피 곤륜파의 보신경을 훔칠 순 없잖습니까?”
여기서 갑자기 상식적으로 받아친다고?
오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괜히 끼어들었군.”
“뭐, 선배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저를 도우려고 하신 거겠지요.”
“……커흠.”
“곤륜파로 직접 가서 다른 도사님들의 보신경도 보고 싶네요.”
그 말에 오경은 서문경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자네 설마, 천무학관 때처럼 비무를 청할 심산인가?”
“왜요. 안 됩니까?”
“언제 북적이 출몰할지 모르는데 누가 힘을 빼겠는가?”
“정 안 되면 청겸이라도 붙잡아서 하지요.”
“청겸 사질은 곤륜산에 없네.”
“예? 천무학관에서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경험을 쌓는다는 이유로 아직 호북성에 있다네. 겨울 마다 들러서 당해의 성과를 보여 주는데, 얼추 듣기론 보신경이 무척 뛰어나다는군.”
경험을 쌓는다?
청겸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애초에 그는 그리 성실한 성격이 아니었다.
허구헌날 수업에 빠져서 옷이나 챙겨 입던 놈이었지.
서문경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경험이 아니라 옷가지를 쌓았겠지요. 호북성에 파는 화려한 옷은 전부 모으고 싶어하는 기색이던데.”
“그게 무슨 소린가? 항상 고된 훈련을 거친 것처럼 넝마에 가까운 도복이었거늘.”
‘……이 새끼가?’
천무학관을 졸업하고도 사문에 돌아가지 않고 호북성에서 하는 짓이라면 뻔하지 않겠는가?
‘청겸 이놈, 아주 살판 났구나.’
서문경은 장담할 수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