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9)
잠시 후.
현령의 창고를 한차례 둘러본 서문경이 생각을 정했다.
“이렇게 합시다.”
현령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공납을 환수하여 감덕 사람들에게 절반을 반환하고, 절반을 청해성의 중심인 서녕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 판단을 두고 오경이 한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절반을 이곳 사람들에게 돌려준 거야 이해하지만, 나머지는 왜 서녕에 보낸 건가?”
“애석하지만 관리 중에 청렴한 인간만 있는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과연.”
오경은 그제야 서문경의 뜻을 이해했다.
“서녕에 부정하게 걷은 공납을 보내어 경고하는 겸 감덕을 살피라는 뜻인가?”
“도경을 배우신 분이라 이해가 빠르네. 뭐, 이것도 어중이떠중이가 보냈다고 하면 무시할 테니까 제 신분이 필요하겠지요.”
서녕의 관리 중에 자기 뱃속만 채우는 놈만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서문경은 서녕으로 보내는 공납품에 서문세가의 징표를 남겼다.
“문제는 이 공납품을 중간에 빼돌리거나 약탈당하면 골치인데…….”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뜻밖에도 주백경이 먼저 손을 들었다.
그걸 본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내 호위가 질린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일개 현령 따위가 이렇게 대범한 짓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초원의 말 또한 내륙에서 구하긴 어렵지요.”
“그러니까. 북적과 지부대인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예. 뒷배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굶주려 있음에도 술판을 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백경은 서슴없이 청해성에 부정한 짓이 횡행하고 있다고 논했다.
대사부로서 쌓은 견식과 수백 번 읽은 기록물.
그렇게 얻은 지식이 이번 일을 사소한 일로 덮어선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하물며 청해성에는 신뢰할 수 있는 군문이 존재했다.
“홍가에 기별(奇別)을 보내어 도움을 받고, 초원을 수색하겠습니다. 자기 말을 아끼는 북적이 이깟 현령을 신뢰하여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주백경의 추론에는 과장하거나 꾸미는 것 없이 담담한 사실만이 담겨 있었다.
서문경은 불과 삼 년 전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이상한 말만 하더니…… 주 무사가 생각이 많이 늘었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왜 거절하겠어. 나도 이제 호위 받을 수준은 아니란 말이지.”
다만 한 가지.
서문경은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곤 엷게 웃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건 좋지만 이론에 충실하면 놓치는 놈도 생기거든.”
스걱!
서문경은 햇볕을 오래 쬐어 피부가 검어진 병사와 초원의 말들을 베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령집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옳거니.”
북적이 주로 사용하는 뿔피리가 나뭇가지에 묶여 있었다.
서문경의 시선이 그 옆으로 향했다.
“넌 뭐냐?”
“……하하.”
햇볕에 검게 탄 피부와 어색하게 머금은 미소.
남자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한손에 숨기고 있던 칼로 뿔피리를 내리찍으려고 했다.
물론, 서문경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딜.”
가볍게 휘두른 장법에 사내의 손목이 부러졌다.
쿠당탕!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사내가 땅바닥을 뒹굴었다가, 곧바로 일어나 다시 뿔피리를 내리찍으려고 했다.
노력은 가상했다.
“의지는 인정하지만, 글쎄.”
서문경은 재빠르게 다가가 남자의 목을 짓밟고 상반신을 걷어찼다.
공력을 담진 않았지만 삼 년 동안 단련한 근력이 담긴 발길질이었다.
뿌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한 됫박이나 되는 피를 토했다.
“한족의 개 따위가…….”
“시시콜콜한 변명은 거기까지 해.”
서문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이야기야 수없이 들었다.
북쪽은 척박하여 뭘 심어도 싹이 나질 않아 따뜻한 곳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정작 저놈들의 윗대가리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나.’
이곳도 흉작이 나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다.
불행은 땅을 가리지 않는다.
척박한 곳에서도 똑바른 궁리로 먹고 사는 자가 많다.
그러나 북적 놈들은 강도질하러 왔으면서 한족에게 불행한 환경으로 설득하려고 든다.
이런 쪽에서는 차라리 마교가 나았다.
허튼 잡소리로 미혹하려고 드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천하의 패권을 쥐려고 하는 놈들이니까.
쩌억!
서문경은 남자의 턱을 발로 걷어 올렸다.
“자, 이제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나 해 볼까?”
“……윽, 으윽. 절대,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하지 않겠다.”
“폭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서문경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네 의지가 버티지 못할 거야. 자신할게.”
상대의 의지를 꺾기 위해 고통을 주는 기술은 한족이나 북적, 남만을 가리지 않고 가히 수천 년 동안 발전해 왔다.
하물며 내공으로 고문하는 기법이라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뛰어나겠는가, 군문인 서문세가가 뛰어나겠는가?
“둘이서 오붓하게 이야기나 할까?”
“으윽……!”
서문경은 남자의 멱살을 쥐고서 창고를 향했다.
스륵, 스르륵.
남자의 몸이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와중, 주백경이 뒤늦게 따라왔다.
“공자님, 저도 참관하겠습니다.”
“그래.”
서문경은 짧게 대답하곤 창고로 향했다.
끼익, 탁!
창고의 문이 닫히고 빗장까지 내걸렸다.
일다경 뒤.
창고에서 서문경과 주백경이 나왔다.
얼굴이나 의복에 피는 묻지 않았지만, 언뜻 보이는 창고의 문 틈새가 피로 범벅이었다.
“……으음.”
그걸 본 오경의 안색이 하얗게 물들었지만, 성하민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끝났어?”
“어. 북적의 위치는 대충 알았으니까 주 무사가 알아서 할 거야.”
“당분간 아저씨랑 헤어져야겠네?”
그 말에 주백경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저씨가 아니라……”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저씨 말대로 지부대인이 결탁한 상황이라면 분명히 습격할 텐데요.”
“……중간에 홍가와 합류하면 괜찮을 겁니다.”
적갑 홍가.
과거 서문경의 약혼자였던 홍화연이 있는 집안으로, 서문세가 못지않은 명문 군문이었다.
이딴 허접한 계획에 연루되어 있을 리가 없다.
주백경은 서문경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겠습니다.”
“아마 보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우리가 어디까지 가 있을 줄 알고?”
“제가 아는 공자님이라면 곤륜산에서도 사고를 치실 테니까, 생각보다 오래 체류하실 수도 있지요.”
“호위라는 사람이 이젠 아주 대놓고 험담이네!”
“그러니까 평소에 잘 대해 주셨어야지요.”
그 말에 서문경이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농담이라곤 전혀 모르던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대화할 줄 알았다.
그 변화가 기꺼워서 웃고, 심적으로 의지가 되었다.
“이제 홍가 사람한테 답답한 소리하다가 시비 걸릴 일은 없겠네?”
“그게 언제 적 일입니까?”
“됐어. 따지지 마.”
서문경은 주백경의 등을 탁 때렸다.
“소중한 공납품이니까 흘리지 말고 서녕까지 똑바로 가. 홍가랑은 거기서 합류하고.”
“공자님도 그동안 다치지 말고 건강하십시오.”
주백경은 서문경에게 예를 표하고는 쓸 만한 마차가 있는지 현령의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법 긴 헤어짐이 될 테지만, 어느 하나 붙잡는 일 없었다.
그것이 서문경과 주백경 사이의 신뢰였다.
* * *
주백경과 감덕에서 헤어지고 셋.
그 말은 즉, 중간에서 서문경을 잡아 줄 중재자가 사라졌다는 뜻이라.
“선배가 보여 줬던 장법에서 살짝 흉내만 내봤는데 어떻습니까?”
“아니, 대체 몇 번째인가?”
오경은 이제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텅 빈 책을 들춰 보다가 허공에 장법을 펼치길 다섯 번.
그게 끝나니 자신에게 운룡반천장과 비슷하냐고 계속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말로 비슷했다는 것이다.
‘반천을 그리는 기예가 참으로 비슷한데, 운행이 다르니 따질 수도 없고.’
어쩌면 시비가 걸리지 않게 일부러 바꾼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서문경은 곤륜산에서 몇 년 동안 배운 사람처럼 ‘약간 다른’ 운룡반천장을 계속해서 펼쳐댔다.
펼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새로운 무공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놀라웠다.
그 과정에 성하민이 개입했다.
“손으로 반천을 돌릴 때 손목이 어색해. 공력이 먼저 앞서가면 어떡해? 그건 도가의 무공답지 않잖아. 군문이지.”
“아니…… 무공은 원래 직선적이야지.”
“서문세가에서 있을 때 느꼈지만 네 가전무공은 자꾸 단순하게 가려고 한다니까. 누그러뜨려.”
언제 말없이 수줍어했냐는 듯.
무학을 대하는 성하민의 태도는 몹시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오경은 그걸 보면서 겉으론 껄껄 웃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괜히 사문의 무공을 펼쳤구나! 두 천재를 앞에 두고서……!’
딱 한 번.
비무 중에 펼쳤다는 죄 하나 때문에 사문의 무공이 유출당하게 생기지 않았나?
다급함이 오경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얼른 움직여야지! 왜 비슷하지 않은 걸 펼쳐놓고 억지를 부리나?”
침착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소리였다.
십대고수와 범접했다는 서문경에게, 그것도 억지가 심한 걸 알면서도 채근하다니.
뒤늦게 실책을 깨달은 오경에게 성하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도사님이 다시 보여 주세요.”
“……뭐?”
“저랑 경이는 도사님의 무공을 보고 경탄하고, 얻어가고 싶은 게 있어서 노력하는데, 억지라고 하신다면 진짜를 보여주세요.”
“…….”
오경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사이에 서문경이 곧바로 치고 나왔다.
“전 사실 장법보다는 보신경을 보고 싶습니다. 곤륜파의 무학하면 역시 보법과 경신법 아니겠습니까?”
“…….”
목적이 뻔히 보이는 소리였다.
이대로 보신경을 보여 줬다가는 운룡반천장처럼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따라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 소저가 말한 대로 억지를 부린다고 역정을 냈던 건 본도이니…….’
완전히 벽에 몰리지 않았나?
오경이 속으로 끙끙 앓던 때에 갈대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여럿 나타났다.
“감히 네놈이 우리 형제를 죽였단 말이냐?”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깃이 짧은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처음부터 머리를 노리지 않았다.
서문경의 옆에 있던 갈대 하나가 끊어져서 땅바닥에 뒹굴었을 뿐이었다.
“네놈이 고수라고 한들 초원의 사냥에서 벗어날 순 없다. 네가 어딜 가든, 청해성 안이라면 잠 한숨 재우지 않고…….”
“나 같으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을 텐데.”
“감히 우릴 능멸하느냐?”
“한두 놈 죽었다고 역량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복수하겠다 나타난 거잖아, 너희들.”
서문경은 옆에 있는 오경을 슬쩍 가리켰다.
“너희가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해서 여기 계신 곤륜의 도사님께서 놓칠 것 같냐?”
“……?”
갑자기 왜 자길 거론하냐는 듯, 오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서문경은 깍듯한 예를 취하며 부탁했다.
“곤륜산으로 가는데 저놈들이 아-주 불편하게 굴 것 같은데 붙잡아 주시면 안 됩니까?”
“……너!”
또 이런 식으로 사문의 무공을 보여 주게 되는가?
오경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속으로 지어내면서.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