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95화 (93/250)

곤륜파 (8)

“여름이 다가왔는데 싱그러운 풀포기 하나 보이지 않고 곡소리가 때때로 들려오니.”

오경은 슬픈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 사천성과 이어진 관도로 인해 번성했던 지역.

감덕의 살림이 북적에 의해 망가지고 말았다.

물길과 발길이 막히면 자연히 안쪽에서 곯을 수밖에 없으니까.

겨우 이삼 년 만의 일이었다.

“아직 본산에 배울 것이 많이 남았으나, 고향을 위해서 하산한 참에…… 서문 공자가 찾아온다는 전서를 받고 기다렸던 거요.”

“근래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오해했습니다. 선배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지요.”

“…….”

오경이 서문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는 반말로 일관하고 억지를 부리더니, 이젠 선배니까 알아서 이해해 주란다.

‘뻔뻔하단 소리야 청겸 사질에게 들었지만, 도가 지나치군.’

가진 바 실력이 부족했다면 사흘도 살아남기 힘든 성격이나 고수에겐 한없이 자비로운 곳이 강호이기에.

한순간 치솟은 불만을 가라앉혔다.

마교와 함께 싸울 아군으로서 서문경은 서문세가라는 배경을 가진 고수였다.

그것도 십대고수나 오걸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절대고수.

서문경을 곤륜산까지 모셔야 하는 입장이라 오경은 억지로 웃었다.

“곤륜산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는 길로 안내해 주겠네.”

그 말에 서문경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랜 그러려고 했지만, 안 되겠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설마 대접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걸까?

오경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서문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마른 대지, 헐벗은 사람들, 애끓는 곡소리와 손톱이 깨져도 죽은 사람을 묻어 주려는 애통함.

마교가 망가트린 인생이었다.

정체가 들켰음에도 저들은 물러나는 일 없이 대명의 테두리 밖에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북적이나 남만, 왜구 같은 외적을 동원하면서.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께서 말했지요. 고향을 위해서 하산했다고. 이대로 곤륜산으로 돌아가도 되는 겁니까?”

“……본산에서 자네를 안내해 달라고 명하였네.”

그렇게 대답하는 오경의 목소리에 망설임과 음울함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곤륜파가 베풀어 준 은혜가 너무 무거워, 고향보다 서문경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있으면서 깨달은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북적은 자네도 알다시피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은신처를 여럿 마련해 두어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네. 물길을 어디서 막았는지 알기 어렵고.”

곤륜산에서 가르친 것은 도경과 무학일 뿐, 북적과 적대하여 이기는 법은 알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가?

오경은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고향에 지내면서 무력함을 거듭 학습했다.

곤륜파의 무학으로 악한을 잡아내겠다는 청운의 꿈은 열흘도 전에 버렸다.

“사실, 자네를 만나면 부탁하고 싶었네. 이곳 감덕에 병사를 보내어 방비한다면…… 사천과 청해의 경계를 수호할 수 있을 거라는 적당한 이유도 생각하고 말이야.”

“…….”

“부끄럽군. 나이를 먹어 놓고 자네 같은 청년에게 앓는 소리나 한다는 게.”

“……뭐가 부끄럽습니까?”

서문경에겐 전생부터 지금까지 품은 생각이 있었다.

무림인과 관인이라는 거리감을 떠나서, 설령 십대고수나 오걸일지라도 대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이야 오대세가가 얄밉게 행동하고 있지만, 언젠가 마교가 쳐들어오면 검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동네를 떠도는 개도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면 필사적으로 짖는데 어찌 도사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서문경은 오경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괜히 도사라고 겸양을 떠는 것보다 솔직한 게 나았다.

그래야만 서문경 같은 사람이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군문에서 태어난 자식이요, 대명의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라는 소임을 지키기 위해 강호로 나왔습니다.”

“……자네.”

그 말에 오경은 잠시 망설였다.

애향심(愛鄕心)에 기대어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곤륜파의 속가제자로서 그를 본산으로 데려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이기적으로 굴었다.

아예 모르는 척하며 잡아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어차피 선배는 등선하기 글렀습니다. 고향에, 이 땅에, 미련이 많아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다는 거지요.”

서두는 이만하면 됐다.

서문경은 어깨를 당당히 폈다.

시선을 넓게 해서 오경과 궁핍해진 감덕의 삶을 모두 눈에 담았다.

머릿속에 분연히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곤륜파의 도사라고 하여 대명의 양민과 다르지 않으며, 군문의 자식으로서 감덕의 불행을 지나칠 수 없으니, 나는 눈앞에 보이는 곤궁함과 어려움을 해결해야겠습니다.”

“…….”

오경의 얼굴에 창피함이 얹혔다.

누구보다 감덕에 남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으면서 체면 때문에, 본산에서 보낸 전서구 때문에 이러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심지어 대명의 양민이면 협력하라는 명분까지 만들어 주지 않았나?

하지만 서문경은 관대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겁니다. 곤륜산은 조금 천천히 가지요.”

“……억지가 심하군.”

“하하, 내 성격이 원체 이래서 선배도 낭패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것도 억지였지.”

오경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주 작게, 서문경에게만 들리길 바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맙네.”

“별말씀을.”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이곤 곤륜산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고을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제대로 된 보수조차 하지 않는 놈.

감덕의 현령이라는 쌍놈 낯짝이나 한번 볼까 했다.

* * *

호화로운 담장이었다.

누런색이 드문드문하게 박힌 벽돌과 적색으로 물들인 천정의 쇠 가시.

누구라도 출입을 불허한다는 뜻이었다.

가시에 피가 묻어도 겉으론 원래 저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서문경은 그것을 슬쩍 쳐다보고는 정문으로 향했다.

“주인장 있냐?”

“꺼져!”

문지기의 윽박에 서문경이 히죽 웃었다.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듯한 미소였다.

“누가 꺼지게 될까?”

“어디서 말장난을……!”

문지기가 장대를 강하게 휘둘렀다.

바깥의 사람들은 궁핍하여 살이 바싹 말랐는데, 문이나 지키고 서 있는 놈의 팔뚝은 제법 튼실했다.

서문경은 입술을 비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쩌억!

서문경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일수가 장대에 이어 문지기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아악!”

문지기가 내지른 비명이 담장 너머로 울렸다.

뒤이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서문경은 가볍게 팔짱을 꼈다.

“주 무사.”

“예.”

“웬일로 뭐라고 안 하네? 딴 길로 샜잖아.”

“그럴 만한 일이잖습니까.”

주백경은 담담하게 군문에 속한 자로서 가져야 할 정신을 논했다.

“공납을 내는 사람들에게 녹봉을 받아먹는 자가, 환란에 지레 겁먹고 거북이처럼 등껍질에 숨어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으니…… 갈 길이 바빠서 방치하면 곯을 뿐입니다.”

“내가 그놈을 죽여도?”

“……그건 말려야겠지요.”

아무리 선을 넘었을지언정 군관이 문관을 때려죽이는 건 그만한 죄가 있거나 지부대인에 준하는 자가 참관해야 가능한 일.

주백경은 언제나 그렇듯 정론을 입에 올렸지만, 서문경은 심중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내기요?”

“나 말고 주 무사가 현령을 죽이게 될 거야. 내가 지면 사흘 동안 형님으로 깍듯하게 대접해 주지.”

“……뭐 그런 내기가 다 있습니까?”

주백경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현령 하는 짓이 맘에 안 들긴 했지만, 서문경도 아니고 자신이 칼을 빼 든다니?

그걸 내기로 삼은 것이 우스웠다.

하물며 성하민도 의아한 표정을 지어서는 서문경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내기를 한 거야?”

“감덕에서 제일 부유한 놈 집만 멀쩡한 게 우습잖아.”

감덕 중심에 있는 시장이나 집들이 모두 풍비박산 났는데, 왜 현령의 집만 멀쩡한가?

서문경은 심중에 품었던 확신을 풀었다.

“나였다면 언제든 지부대인이나 군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현령부터 죽여서 입을 막았을 거거든.”

보급로를 끊는 것이 목적이라면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

현령이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 말을 뒤늦게 깨달은 오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처음부터 북적과 붙어먹던 놈일 수도 있습니다. 마교가 한족의 천하, 대명을 불태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그 말을 누군가가 들은 것일까?

걸걸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디서 하찮은 소릴 해대느냐!”

정오부터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던 것인지 술과 음식이 섞인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주둥이가 저러하니 옷 상태는 더 개판이겠지.

서문경은 정말로 예상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단 사실에 기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빈곤해지고 있는데 너 혼자만 호의호식했더냐?”

“감히 어느 안전에 망발을!”

쾅!

정문이 강하게 열리자, 문지기가 얻어맞아 땅바닥에 뒹굴었다.

서문경은 자신의 발치까지 뒹군 문지기를 흘낏 보았다.

“자기 사람도 아낄 줄 모르는데 고을 사람들이야 더 하찮게 보였겠지.”

“……흥! 유언은 다 끝났느냐?”

더러운 주둥이에서 하찮은 소리가 나왔다.

살 때문에 턱이 보이질 않았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서문경은 돼지 뒤에 우르르 도열한 병사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타고 있었다.

‘아, 어쩐지.’

북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천성과 접경한 이곳까지 쳐들어오는 건 무리였을 텐데.

또, 어째서 현령의 집만 멀쩡했을까?

해답이 서문경의 눈에 훤히 보였다.

“일개 현령 따위가 사병(私兵)을 부려? 게다가 초원의 말들까지 붙잡아서?”

“팔이 잘리고 나서야 용서를 빌 놈이구나!”

“사병을 북적으로 위장시켜서 자기 고을을 수탈한 놈보다는 낫지. 꼴을 보니 감덕만 이러진 않았을 거야. 그치?”

그 말에 현령이 한순간 침묵하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법 영민하구나. 좋다. 살려 둘 필요가 없어졌어.”

돼지인지 현령인지 분간이 안 가는 놈이 제멋대로 자신의 생사를 결정했다.

서문경은 그것이 우스워서 끌끌 웃었다.

어깨만 흔들리는 게 아니라, 폐부에 고여 있던 숨까지 뱉어내며 크게 웃어젖혔다.

“하, 하하하……! 욕심에 눈이 멀어 귀인이 눈앞에 있음을 몰라보고 돼지 울음소리만 지껄이고 있기는!”

그 말과 동시에 하단전의 공력을 일거에 중단전으로 끌어올렸다.

압도적인 존재감.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드러낼 수 있는 기파가 정문을 넘어 현령까지 압박했다.

현령의 입술이 삽시간에 바싹 말라붙자, 서문경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다스릴 자들을 수탈한 기분은 어떠냐? 울상이 되어서 잡곡이라도 나눠 달라고, 구휼미는 없냐고 물었을 때 희열을 느꼈더냐?”

“그…… 그건…….”

“여기서 한바탕하고 성도로 갈 작정이었나?”

“네, 네놈에게 말하겠느냐!”

“말해야지.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야지.”

서문경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현령을 꾸짖었다.

“네놈을 징치하기 위해 온 염라대왕이 바로 나다.”

“……으, 윽.”

강대한 기파에 짓눌려 한쪽 무릎을 꿇은 현령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살로 뒤덮인 얼굴에 식은땀이 범벅이었다.

“그, 그래! 서문세가의 일공자! 서문경 공자 아니시오? 부디 이번만 넘어가 준다면 서문세가에 지금까지 모으고 숨긴 재산을 넘기겠소!”

“…….”

“자고로 전장에서 힘을 쓰려면 지리를 아는 자와 돈이 필요한 법이요! 난 둘 다 가지고 있소!”

지리멸렬한 구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번 어디까지 하나 볼까 싶어서 구경하던 차에, 현령이 기어코 선을 넘었다.

“서문세가라고 언제까지 깨끗할 성 싶으냐! 네놈의 가문도 머지않아서 풍비박산이……!”

스걱!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 전에 주백경이 칼을 뽑았다.

가히 열 장 넘게 날아간 검기가 현령의 목을 벤 것이다.

주백경의 얼굴엔 살얼음판 같은 한기가 가득했다.

“더러운 입으로 서문세가를 논하지 마라.”

“주 무사, 하나 더 말해 줬어야지.”

서문경은 주먹이 으스러질 정도로 쥐고 있던 오경을 가리켰다.

“돈은 이미 충분하고, 지리를 아는 자는 여기 있는 애향민(愛鄕民)으로 충분하다고.”

“……고맙소.”

오경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서문경에게 예를 표했다.

울음을 터트릴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가장 먼저 나서야 했을 내가 곤륜파의 도사라는 신분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때, 서문 대협은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나섰구나.’

이래서야 누가 무정한 군관이고 누가 협을 아는 무림인인가?

오경은 속으로 크게 뉘우치며 흐느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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