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7)
“믿기지 않는군.”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방문첩이 곤륜파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지 몰라도 감덕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곳에서 서문세가까지의 거리보다 곤륜파가 더 멀다.
아무리 곤륜파의 보신경이 구파일방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가능한 일일까?
서문경의 의심이 오경을 향했다.
“곤륜파의 도사를 위장한 북적이 아닌가?”
“어린 공자께서 의심이 참으로 많으시오.”
오경이 불쾌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지만, 서문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거에 북적이 곤륜파의 도사를 자칭하여 침입하려던 적이 있소. 아예 불가능한 소린 아니란 뜻이지.”
“이보시오!”
“보신경을 펼쳐 보시오.”
서문경은 주먹으로 옆에 있는 담장을 툭 때렸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뜩이나 심하던 균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해졌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곤륜파의 보신경이라면 이런 담장 위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겠지.”
“……품행(品行)이 저급하오.”
“그게 무슨?”
“본산의 무공은 쉽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오. 군문의 자제께서는 어째서 당연한 상식을 망각하고 본도에게 억지를 부리시오?”
“아하, 억지. 내가 억지를 부렸다?”
서문경의 입가가 둥글게 휘었다.
그 모습을 본 주백경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공자님께서는 천하에서 억지가 제일 심한 사람이거늘…….”
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문경이 먼저 움직였다.
서문세가의 보신경, 꾸밈없이 직선적인 걸음이 오경의 눈앞까지 치달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저 친구 말대로 억지가 심하고 의심 많은 사람이라.”
이러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다.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이면서 주먹질했다.
완벽한 분심(分心)에서 이어지는 공력 수발.
삼 년 전 검치가 보였던 융통무애한 경지에 가까웠다.
“……윽.”
오경은 신음을 뱉고는 뒤늦게 발재간을 놀렸다.
융통무애한 경지에서 펼쳐지는 기예에 맞설 자신은 없었기에 피해야 했다.
어디로?
오경의 눈이 전방위를 담았다.
곤륜파의 보신경을 수학하면서 반드시 배우게 되는 안법이 곧 무너질 듯 위태한 담장을 담았다.
‘설마. 저 위로 도망치라고?’
서문경이 아까 말한 것처럼 보신경으로 재롱이나 부리란 건가?
오경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곤륜파의 무공을 수학한 제자로서 품행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니, 달아난다.
쩌적!
도복의 소매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곤륜파의 보신경이란 바람을 이용하는 것.
하늘과 구름의 자유로운 운행을 닮는 것.
천지간의 운행처럼 표홀(飄忽)하여 덧없음을 아는 것.
오경은 허공에 발을 내딛었다.
“……어딜!”
서문경은 주먹이 허공을 가르기 전에 어깨를 비틀었다.
한순간 사선을 그린 주먹질이 기이하게 휘었다.
뱀의 움직임처럼 집요한 추격이었다.
오경은 그것을 눈으로 담고서 뒤늦게 움직였다.
겁에 질려서 섣불리 움직이거나 하지 않고, 천인(天人)의 담대한 마음으로.
쩌적, 쩌저적!
소매가 풍랑에 찢어져 두 쪽 난 안감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오경의 보신경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움직였다.
“…….”
서문경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은 오경을 노려보았다.
양쪽으로 찢어진 소매가 볼썽사나웠으나, 그의 등 뒤에 자리한 청명한 하늘과 햇볕은 광대했다.
곤륜파의 보신경은…….
‘크다.’
성하민처럼 무학의 이치를 곧바로 꿰뚫는 수준의 재능을 가지진 못했다.
하지만 견식하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무학을 익히고 있는 남자로서 가슴을 두드리는 무언가.
그건 곤륜파의 보신경에 담긴 담대하고 거대한 의지(意志)였다.
‘그렇군. 단순히 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 몸처럼 움직이는 건가. 마교와 싸우기 전에 일찍 멸문 당한 게 안타깝구만.’
곤륜파 무학의 티끌을 막연히 이해한 순간.
오경의 쌍수가 반원을 그렸다.
바람이 갈라지고 휘도는 소리가 경각심을 울렸다.
삼 년 전, 천무학관을 지나가다가 무심결에 본 청겸의 장법.
운룡반천장(雲龍半天掌).
서문경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맺혔다.
“청겸이 쓰던 무공인가.”
“…….”
오경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오른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파앙!
찢어진 소매가 뒤로 제껴지며 광풍이 서문경을 향해 질주했다.
여름의 더운 열기가 광풍에 뒤섞여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물며, 허공에서 펼친 장법임에도 힘이 실려있다.
‘이게 곤륜이구나.’
서문경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당장 서문세가의 담장을 넘었을 때 자신의 보신경이 어땠던가?
무영신투의 암행술에 비하면 부족하단 소리를 들었다.
성하민의 성격상 좋게 돌려서 말했을 테니, 격차는 압도적으로 크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부족한 점을 채우면 된다.
‘저 무공, 수집하고 싶어졌어.’
서문경의 왼손이 허리를 헤집었다.
상의 안쪽에 바느질해서 만든 주머니에서 무공사전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운룡반천장을 오른손으로 파해하기 위해 공력을 운용하니.
“……뭐하는 것이냐!”
오경의 눈동자에 분노가 치솟았다.
여느 무인이 그렇듯, 중간에 무공사전을 쥐면 자길 무시하냐는 생각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하나 상관없다.
어차피 오해를 살 거라면 아예 기벽(奇癖) 있는 고수로 와전되는 것이 낫다.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쥔 채 주먹을 휘둘렀다.
쩌적!
광풍이 주먹질 한 번에 흩어졌다.
오경의 얼굴이 한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뭐, 저런…….”
“자, 한 번 더.”
서문경이 어깻죽지를 뒤로 확 젖혀 주먹을 휘두르는데, 전보다 더 강한 공력이 실린 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분노했던 오경마저도 주춤하여 뒤로 물러났다.
……턱.
오경의 발이 담장에 올려졌다.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오경은 서문경의 의도를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허…….”
서문경이 보신경을 펼쳐 보라고 했던 담장이었다.
처음부터 자길 담장 위에 서게 만들려고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오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졌네. 졌지만…… 다음부턴 내가 아니더라도 이런 짓은 하지 말게.”
“예, 무림 선배의 말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서문경은 공경을 담아서 대답했지만, 주백경과 성하민이 그걸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애초에 지키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곤륜파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했다.
‘보나마나…….’
‘비무해달라고 억지를 부리시겠지.’
성하민이야 흥미로운 웃음으로 끝났지만, 주백경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서문경이 강호에서 사고를 치면 서문패가 왜 말리지 않았냐고 온갖 지랄을 할 테니까.
‘이러니까 내 성격이 나빠지지.’
주백경의 고난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 * *
“장법의 기세와 보신경의 기틀은 좋았지만 힘 자체가 부족했소. 공력 운용 방법이 명쾌하지 않아서 그런 거요.”
“…….”
“이해했소?”
“아, 음…….”
“대답이 느리오.”
“……조언 고맙소.”
주백경은 조금 전 비무를 토대로 오경에게 가르침을 무자비하게 내리꽂았다.
대사부에 있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붙은 버릇이었다.
부족함이 보이면 지적한다.
병졸에 불과할지라도 장군처럼 완벽해지길 원한다.
그건 구파일방에 속한 타문의 도사일지라도 똑같았다.
“공자님의 권법을 똑바로 본 건 좋았지만, 의도까지 읽지 못한 건 불찰이요. 그걸 읽었다면 역습의 기회가 생겼을 거요. 무조건 담장으로 올라가게 하겠다는 속셈이었으니까.”
“……그.”
“무례하단 소린 그만하시오. 타문의 고수가 이런 가르침을 내리는 게 흔한 일인 줄 아시오?”
“주 대협이 고수인 건 알겠지만…….”
“투정 부릴 시간에 고칠 생각을 해 보시오. 이러다간 마교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을 거요.”
“…….”
“부족하면 노력으로 메꿔야 하지 않겠소?”
주백경의 말을 가만히 듣던 오경은 순간 울컥했지만, 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성격이 온건하고 바를 뿐, 억지를 부리는 건 서문경이나 주백경이나 똑같았다.
‘서문세가의 무인은 참으로…… 주관이 강하군.’
“이보시오. 함께 마교와 싸울 동맹이지 않소? 내 말 듣고 있소?”
“……그, 그렇소.”
“안 되겠군. 앞서 걸어가면서 내가 시범을 보여 주겠소.”
“컥!”
그렇게 오경은 주백경에게 끌려가 억지로 조언과 수련을 당했다.
서문경에겐 참으로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예전부터 똑바른 말만 하더니만, 그게 이상하게 변질될 줄이야.”
가르침도 한두 번이야 들을 만하지, 주백경의 가르침은 가히 속사에 가까운 잔소리였다.
그건 성하민도 크게 공감하는 바였다.
“저 도사님이 제대로 하지 못할 조언은 훈수나 잔소리 같은 거니까…….”
“자기가 너무 빨리 강해져서 남들도 그런 줄 아는 거야. 대사부로 있을 때도 저래서 악명이 심해지지 않았나? 알면 고칠 때가 됐는데, 쯧.”
서문경은 히죽 웃으면서 성하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네가 보기에 어땠어?”
“도사님이 펼친 것들?”
“어.”
“뛰어나긴 한데…… 요체는 모르겠어.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뭐?”
서문경은 깜짝 놀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것이 신기했는데, 그게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니?
‘전생에 마교가 곤륜파를 일찍 멸문시킨 이유가 있나?’
“내가 보기엔 저 도사님보다 뛰어난 분을 봐야 할 것 같아.”
“장법은?”
“장법도 마찬가지야. 뭔가 부족해.”
“……그래?”
서문경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무공사전에 수집한 무공이 왠지 가치가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운룡반천장, 수집 완료]
청겸이 쓰던 무공을 수집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는데, 대단한 게 아니었다니.
서문경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곤륜산이 있는 서쪽을 보았다.
저곳에 가면 오경보다 뛰어난 도사들이 즐비하게 있을 터였다.
‘아마 대부분 내가 전생에서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이겠지.’
호기심과 호승심이 동시에 들었다.
무공사전이란, 상대의 무공을 수집하는 것.
상대가 뛰어날수록 깊은 무학을 얻을 수 있었다.
서문경은 곤륜파에 있다는 고수를 떠올렸다.
‘현 장문인이 천하십대고수와 동격이라고 했었지?’
척안룡 담정이나 낭왕과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도사라.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꽉 쥐었다.
* * *
“서문경이 움직였다고?”
“예. 청해성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청마는 부하의 보고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군.”
언제까지 서문세가에 틀어박혀 있을지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청마는 청해성 근방에 있는 세력을 떠올리고는 전서구를 준비시켰다.
“그를 계속해서 감시하라고 해.”
“기회를 봐서 습격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청마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왜 그런 시시한 짓을 하지?”
“……죄, 죄송합니다.”
“너희가 움직이는 건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야.”
청마의 입술이 다시 호선을 그렸다.
“그래, 영웅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가 갖춰진 자리.”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