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93화 (91/250)

곤륜파 (6)

성도에서 십방, 십방에서 아패.

닷새를 부지런히 걷기만 했다.

외지로 향할수록 활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식량이 떨어져 나무껍질 삶는 연기가 자욱해지고 보름 넘게 씻지 못해 찌든 살내가 스치는 사람마다 지독했다.

가난의 냄새이자 전쟁터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불행의 연속.

서문경은 길을 걸으며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담았다.

“다들 똑바로 봐. 우리 가문이 최대한 힘을 쓰고 있어도 이런 꼴이 나고, 자칫 잘못하면 성도가 저렇게 될 테니까.”

“……말도 안 돼.”

성하민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렇게 활기차고 이런저런 열기로 가득하던 성도가 저렇게 된다니.

전장을 겪지 못한 그녀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정이었지만, 주백경에겐 사뭇 달랐다.

평범하게 사는 게 불가능해질 때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

주백경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삼 년 동안 보았다.

“평소에 신병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병?”

“예. 마을 사람과 산적질은 하기 싫어서 입대한 장병이 많았습니다.”

“……그렇군. 성도가 가까우면 그런 선택지가 있었겠지.”

지금 이들처럼 산적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서문경의 오른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스걱!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반쪽으로 갈라졌다.

칼을 뽑는 광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기예에 가까운 솜씨였다.

“젠장, 고수다! 모두 대피해!”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에 주백경이 재빨리 땅을 박찼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 근맥이 끊긴 자들이 줄줄이 엮여져 왔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온갖 고난과 절망이 가득했다.

“차라리 죽이지…… 왜 이런 꼴로…….”

“너희가 그런 꼴로 만든 사람들이 있을 텐데?”

“…….”

어수룩한 산적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서문경은 그들을 혐오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전장이 넓어져 민가로 향했을 때, 산적으로 변화하는 마을사람들이란 늘 이러했다.

“사람은 죽이기 싫고, 통행세만 받자니 힘이 부족하고…… 멀리서 화살을 쏘거나 독물을 이용해서 반병신으로 만든 사람이 몇이나 되지?”

“…….”

“그래. 사람도 먹었겠지.”

“아, 아직 선을 넘진 않았……!”

“그게 자랑스러운 일인가?”

“…….”

아들 뻘 되는 청년에게 힐난을 받아서인가.

사지 근맥이 끊겼음에도 얼굴이 시뻘게져선 고함을 내지르는 산적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의 욕설이나 비난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들보다 심각하게 부패한 악인이 있을 뿐이다.

산적 중에서 연로한 노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라고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네…… 현령이 여자와 아이들을 핍박하는데 어쩌겠는가?”

“현령이?”

서문경의 눈동자에 짙은 분노가 타올랐다.

“북적과 접경한 이 상황에 관리가 마을 사람을 산적질로 내몰았다고?”

“……아마 자네는 무림의 고수거나 지체 높은 공자겠지. 직접 이 길을 따라서 가 보게.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사지 근맥이 끊긴 이상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담담한 목소리로 현령의 부패를 고한 산적이 혀를 꽉 깨물었다.

검붉은 피가 입가를 타고 흘렀다.

성하민이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문경의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부패한 관리라.”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자기 가족이 중요하다고 남을 죽여서 재산을 갈취한 인면수심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하지만 그 길로 내몬 사람이 있다면.

그가 대명의 관리라면 책임을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주 무사.”

“예.”

“주변에 북적이 있던가?”

“언뜻 봤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성하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패까지 오면서 북적이 타고 다니는 말조차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서문경은 주백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령에게 말해 줄 필요가 있겠군.”

“예. 지금 바로 가시지요.”

주백경이 평소답지 않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혹해지는 천하와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서, 서문세가의 일공자님이시라고요?!”

차를 권하던 현령이 깜짝 놀라서 잔을 내려놓았다.

서문경은 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최근 천하가 어지러워져 현령과 지부대인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소. 현령께서는 어떠시오?”

“저야 겨우겨우 입술에 풀칠이나 하면 다행이지요. 다른 현령은 이미 자기 본가로 돌아간 지 오래입니다.”

서쪽과 북쪽에서는 북적이, 남쪽에서는 남만이.

마교가 들끓기 시작하니 외지의 삶이 팍팍해졌다는 둥, 서문경은 현령의 불평을 모두 들어 주었다.

“하면 현령께선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거요?”

“저야 주변의 마을을 돌보아야지요. 그게 관리가 할 일 아닙니까?”

현령이 순박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걸 물끄러미 본 서문경이 한 가지를 물었다.

“근데 내 잔은 왜 안 주시오?”

“예?”

“나한테 주려고 차를 따른 게 아니요?”

“……아, 하하. 까먹고 있었습니다.”

현령이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다가 한순간 비스듬하게 비틀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진 척 내용물을 쏟아 버리는 속셈이라.

서문경이 움직일 필요 없이, 옆에 있던 주백경이 현령의 손목을 붙잡았다.

탁.

어찌나 강하게 붙잡았는지 현령의 손목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아직 절반 가까이 남았군. 직접 마셔보지 않겠소?”

주백경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현령이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무례하다! 네놈은 누구기에 이런 망발을 저지르는 거냐!”

줄곧 서문경 곁에서 말없이 있었으니 호위무사 정도일 터.

현령의 얄팍한 견식은 주백경의 대답에 깨져 나갔다.

“나는 서문세가의 대사부 주백경이요.”

“직위만 따지자면 일공자인 나보다 높지.”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말릴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주백경을 도와서 현령이 쥔 찻잔을 입가로 밀어 올렸다.

“서문세가에만 있으니 천하에 이런 덜떨어진 쌍놈이 있을 줄은 몰랐소. 현령씩이나 돼서 신분을 확인하기도 전에 독을 준비하는 머저리. 당신 말이요.”

“이익……!”

현령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황과 격정, 처연함 따위가 눈동자에 실렸다.

“나, 나라고 이러고 싶진 않았네! 도망치는 것보단 낫지 않나!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겠단 생각에…… 험한 짓을 시켰을 뿐이야!”

“하.”

서문경의 얼굴에 차디찬 비웃음이 실렸다.

성도에서 마주한 지부대인부터 지금의 현령까지.

세상이 혼란하니 대명의 관리마저 보신(保身)에 급급하여 더러운 짓을 저질렀다.

‘무림인이 이런 꼴을 보게 될까봐 두렵군.’

이러는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어찌 관을 믿겠는가?

서문경은 더러운 가지를 잘라내듯 칼을 휘둘렀다.

스걱!

온갖 변명을 입에 담던 현령의 목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러고서 성하민의 눈치를 살피는데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괜찮아?”

“내가 천무학관에 입관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겠어?”

“……아.”

삼 년 전, 열네 살의 소녀가 단신으로 사천성에서 호북성까지 가는 길이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하민이를 약한 아이로 보고 있었나.’

성하민의 성정이 착하다고 해서 유약하진 않을진대.

서문경은 쓰게 웃고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청해성이 머지않았다.

* * *

청해성 감덕.

사천성과 연결된 관도가 깔려 있어 비교적 오고가기 용이한 곳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한 명의 지부대인과 세 현령과 마주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문경의 배경을 보고 도움을 요청했으며 떳떳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선을 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시오.”

마을 사람을 산적으로 만든 현령에 비해 그들은 숨어서 지내거나 도망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저 몇 가지 경고만 남겼다.

목숨이 귀한 줄 알면 뒤늦게라도 관리로서 직무를 다할 터였다.

‘천하가 혼란하긴 하구나.’

서문경의 한숨이 본가에서 멀어질수록 깊어졌다.

삼 년 동안 가문에서 지내다 보니 천하가 얼마나 참혹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원래 변방이었던 청해성에 이르러서는.

“관도가 이어진 시(市)인데 너무 조용하네…….”

성하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문세가에 있으면서 그녀의 학식이 제법 쌓였다.

관도와 연결된 현이나 시는 비교적 발달하여 상회나 표국의 지부가 있고 사람이 바글바글하기 마련인데, 감덕은 거주자를 제외하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들조차도 외지에서 온 서문경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가 뭐 도적놈인가?”

“저희 복식을 보면 대놓고 무림인 같긴 하지요.”

주백경이 자기 옷깃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서문세가의 담장을 넘었던 날 그대로.

자줏빛으로 물들인 무복을 걸쳐 입은 상태였다.

더러워진 흔적이 있긴 해도 염료로 물들인 옷은 대부분 가격이 비쌌기에.

‘평범한 이유로 청해성에 올 사람은 아니다 이건가.’

서문경의 눈이 거리를 훑었다.

여러 습격을 겪은 듯 담장에 균열이 지거나 불로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북적이 남긴 흔적이다.

그것도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주변에 군부가 있던가?”

서문경의 말에 주백경이 턱을 매만졌다.

“감덕에 군문이 몇 있긴 하지만 북적과 싸워서 이길 정예는 아닙니다. 지리상 사천과 접경해 있어 방비가 부실하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여기까지 북적이 침범해 올 정도란 거네?”

“제가 서문세가에 있으면서 처음 보는 일입니다.”

“……음.”

서문세가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닷새 사이에 천하가 나쁜 방향으로 격변하고 있었다.

서문경은 서문이현이 추구한 방도를 떠올렸다.

“역시 곤륜파의 고집을 꺾어서라도 청해 도문과 연계해야겠어.”

청해성의 문제는 땅덩이가 너무 넓어서 북적의 침입을 조기에 색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해답은 역시 기지.

요충지마다 병사와 지리에 밝은 도사가 주둔한다면 완벽하겐 아니더라도 이렇게 청해성 안쪽이 침범당할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도문의 계율에 반한다는 건데. 개차법으로 설득을 해 봐야겠지.’

개차법이란, 상충하는 계율이 있으면 더 무거운 것을 우선한다는 뜻.

살생이 무거운 중죄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귀하진 않다.

서문세가는 이런 식으로 곤륜파나 공동파와 힘을 합했지만, 한 지역에 거점을 두고서 북적을 죽이는 건 무게가 다르긴 했다.

마을을 습격한 북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북적을 먼저 죽이는 거니까.

선후의 문제를 어떻게 설득시키느냐.

서문경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혹시…… 서문세가에서 오신 빈객이십니까?”

정갈하게 걸쳐 입은 도복과 정수리가 보이지 않게 묶은 머리.

누가 봐도 복식을 잘 차려입은 도사였다.

천무학관에서 만난 동기인 청겸과는 다르게 말이다.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시오?”

“저는 곤륜파의 속가제자인 오경이라고 합니다.”

자기 이름을 밝힌 도사, 오경은 온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산에 서문세가의 방문첩이 도착하여,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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