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5)
한 시진 뒤.
여름의 햇볕을 머금고 싱그러운 빛을 뽐내던 나무줄기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시각.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에 천하가 자줏빛으로 물든다.
서문경은 저 빛과 닮은 복식을 갖추어 입었다.
“준비는?”
“됐습니다.”
“……응.”
주백경과 성하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문경의 시선이 담장 너머로 향했다.
“슬슬 가자.”
서문경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두 눈에 담았다.
천하를 자줏빛으로 물들이던 석양이 봉우리 너머로 사라지며 어둠을 남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경계심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만약 서문세가 주위에 암약하고 있는 고수라면?
기감을 더더욱 예민하게 갈고 닦을 것이다.
밤을 틈타서 움직이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따라서, 석양이 지는 이 시간을 노린다.
오색 찬연한 빛깔이 담장과 처마에 스며드는 시간이야말로 시각에 가장 의존할 때이며 눈이 피로할 때이니까.
“……떠나기 아쉬운 광경이네.”
성하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문세가의 담장은 높고 투박하여 오로지 실리를 위해 지어졌다.
반대로 말하자면 검거나 흰 도화지.
석양이라는 색료(色料)로 마음대로 칠해도 되는 공간이니.
하늘이 천하를 제멋대로 화려하게 물들일 때 사라지자.
서문경의 발이 가볍게 땅을 지르밟았다.
툭.
겨우 한 걸음으로 담장 꼭대기를 타넘는데 옷깃이 스칠 듯하면서도 닿지 않았다.
서문경이 무사히 안착하자, 주백경이 움직였다.
‘무영신투에게 배운 암행술인가.’
발소리나 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스윽.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서문경 옆에 서 있었다.
다만, 주백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런 걸 배워서…….”
“무림인이 들으면 널 죽이려고 들걸.”
오걸에 속한 무영신투에게 암행술을 사사했으면서 부끄러워하는 꼴이다?
무림인이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인 무영신투가 고함을 내지를 행태였다.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성하민이 옷의 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베낀 건가?’
서문경이 펼친 보법과 주백경의 암행술.
어느 쪽을 펼쳤는지도 보지 못했다.
그냥 몸이 가는대로 움직였을지도 모르지만, 서문경은 성하민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누가 더 뛰어나?”
“……갑자기?”
“어. 너라면 알 거 아냐.”
무공사전이 비무나 생사투를 통해 무공을 수집한다면, 성하민은 보는 것만으로 무학에 담긴 심원(深原)을 읽어 낸다.
그 재능이야말로 서문경에게 있어 정답지나 다름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게 말해 줘. 어쭙잖게 편들어 주다가 들키면 화낼 거야.”
“……주 무사님의 움직임이 더 뛰어났어.”
“역시.”
서문경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가전보법을 갈고 닦는다고 한들 평생 도둑질의 업을 짊어진 무영신투의 암행술보다 뛰어날 순 없었다.
아니, 애초에 서문세가의 보신경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말이 있는데 달려 봐야 무슨 소용인가?
허공을 누비는데 내공을 낭비한다고? 어리석은 소리를!
이렇게 꾸짖어 버린 역사가 있는데 구파일방처럼 현묘한 경신공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서문경에게는 이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가 있었다.
‘무공사전과 하민이의 재능이라면 뭐라도 나오겠지.’
정의맹을 천하의 구심점으로 만들겠다는 명분 외에 구파일방의 무공과 무학을 가지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건 무공사전뿐만 아니라 무학에 담긴 진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오성도 뛰어나긴 하지만, 하민이는 이해하지 못할 영역에 있으니까.’
감히 추측하건대 천마와 비견되는 재능.
성락구검의 검형(劍形)이 천마가 보였던 이질적인 무언가와 비슷했으니.
서문경은 성하민의 재능을 서문세가에서 썩히는 것보다 함께하길 바랐다.
“아, 그러고 보니 하민이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는 돌아왔나 모르겠네.”
“누구요?”
“검치라고, 삼 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거든. 주 무사는 알 거야.”
그 말에 주백경이 옛일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특이한 사람이었죠.”
“다짜고짜 한밤에 내기하자고 조르던 사람이니까.”
하늘에 별이 있으니 무인에게 충분한 불빛이라고 했던가?
생억지를 낭만 있는 척 포장하는 솜씨가 놀라운 남자였다.
서문경은 검치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성도를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시장에 들러야 하니까 겸사겸사 들러 보자고.”
그렇게 세 무인이 강호를 향하고서 몇 시진이 지난 뒤에야 서문세가를 감시하던 자들이 서문경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 * *
끼이익…….
생기 한 점 없는 폐가의 문을 열어젖히니 안쪽에 고여 있던 먼지가 자욱하게 퍼져 나왔다.
서문경은 옷깃으로 입가를 막고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올해도 돌아오지 않았구먼.”
방의 문고리를 보아도 손길에 닿은 흔적이 없으니.
검치와 양명성이 사천성에서 완전히 떠났음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나 보다.
아쉬움이 서문경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검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솔직하면서 은원에 철저한 남자.
상황에 따라 목숨을 구해 준 은혜도 무시하는 강호에서 검치 정도면 대협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서문경은 폐가에서 나와 시장으로 향했다.
밤을 밝히는 등불이 눈을 어지럽히고 온갖 향신료 냄새가 콧속을 간지럽혔다.
사천성 성도.
호북성의 불야성 못지않은 밤의 열기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거리에 자욱했다.
“어디쯤 있으려나…….”
자신이 검치의 집을 방문하는 동안 주백경에게 건식과 옷가지를 사 두라고 했었다.
성하민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삼 년 동안 서문세가에서 숨어 지내던 그녀에게 성도의 야시장은 평생 보지 못한 볼거리이자 즐길 거리일 테니까.
‘전갈 구이를 보면 아마 놀라 자빠지겠지?’
그 광경을 상상하면 웃음이 히죽 튀어나온다.
서문경은 취객의 어깨를 슬쩍 피해 가며 야시장의 거리를 걸었다.
“이 사람아 많이 취했어!”
“아니, 얼마나 깎아 보려고 이러는가?”
“도둑이야!”
세상은 언제나 선하지만 않다.
야시장의 혼란을 틈 타 도둑질하거나 볼썽사나운 짓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평화였다.
마교가 한족의 성문을 불태우고 그 위에 사람을 매다는 꼴보다야 나았기에.
서문경이 바라는 광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그게 뭐냐고 타박하겠지만, 어쩌겠어.’
정말로 하찮고 따분한 일상.
이 시간은, 야시장의 활기는 머지않아 부서질 것이다.
변방에 머무르고 있는 외적 무리가 칠로두와 함께 강호를 침범하는 순간 야시장은 무기한 폐업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이런 좀도둑질이 아니라 강도가 들끓고 산을 홀라당 태워 먹는 사람들도 나올 터였다.
‘적어도 이번 생에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지.’
서문경은 마음을 다잡고는 동행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도의 유력 인사가 주백경에게 온갖 재화를 들이밀고 있었다.
“지부대인, 이게 무슨 무례요!”
주백경이 평소답지 않게 엄한 목소리로 남자를 꾸짖었다.
사천성의 중경부를 관리하는 지부대인.
높은 위치에 있는 관리가 서문세가의 대사부에게 연신 고개를 굽실거리고 있었다.
“저희 집안에 병력을 조금이라도 차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보시오. 여기서, 그것도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소?”
주백경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서문경이 듣기에도 저 말이 옳았다.
병력을 차출하는 부탁을 하려거든 장소와 사람을 가려야 했다.
하지만 지부대인의 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면 영악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뭐라도 확답을 받을 생각이구나.’
서문이현의 성정상 군병을 훈련하는 동안 다른 곳으로 차출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지부대인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높은 직급에 있는 대사부의 권위라도 빌리고 싶었던 모양인데…….
“지부대인께서 저자세로 나오다니?”
“정말로 북적이 들끓고 있는 건가?”
“나, 나도 들었어! 마교에 남만야수궁이 있다고 하던데!”
야시장 전체에 감돌던 활기에 불안이 전염된다.
석양이 천하를 물들일 때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아니, 아는 척하기 위해 상황을 더 최악으로 과장하는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서문경은 이 상황이 불쾌했다.
이게 뭔가?
야시장의 활기가 갑자기 뚝 끊기고 지부대인 눈치나 보는 꼴이라니.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고 하찮은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관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지부대인은 그 본분을 망각하고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주백경을 난처하게 만들고, 야시장의 분위기를 흐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
서문경의 발걸음이 사람 틈바구니를 비집고 지부대인 앞까지 향했다.
스윽.
경쾌한 걸음소리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주백경 옆에 선 성하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아!”
“이, 일공자 아니신가!”
지부대인의 얼굴에 낭패라는 감정이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자신에 관한 소문을 그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만이다.
서문경은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지부대인, 여기서 개망신 당하고 싶소?”
“……예?”
“중경부의 지부대인이라는 자가 군문에 속한 무사에게 청탁을? 하하…… 어디까지 일러 주면 되겠소?”
당장 서문패에게 말해 주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중경부에 주둔한 병력을 외곽으로 돌려 버릴 것이다.
서문세가의 권한이란 그 정도였다.
지부대인이 아무리 높은 관직일지언정 황제에게 군권을 넘겨받은 군문을 이길 순 없다.
하물며 지금은 마교와 대치하고 있는 전시가 아닌가?
-주 무사를 난처하게 만들어서 북적과 싸우고 있는 장병을 자기 마당에 돌려볼 생각이었겠지만 정말로 어리석었소. 저놈이 있으면 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지. 전시가 우습소?
-……일공자, 무례를 용서해 주게. 강호의 영웅에게 내가 너무 못난 꼴을 보였군.
지부대인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하기야, 저런 계산이 느리면 저 위치에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지부대인에게 더한 망신을 줄 수야 있지만…… 아니꼬운 감정을 해결한다고 만사 좋은 게 아니야. 오히려 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지.’
지부대인쯤 되면 자기 집안에 축적한 재산이 수북이 쌓여 있겠지.
그러니까 자기 집안에 서문세가의 장병을 차출해 달란 부탁을 하지 않았겠는가?
서문경은 중경부에서 걷는 공납과 현 지부대인의 나이를 대충 계산했다.
-서문세가의 병력을 차출 받으려거든 이런 짓 말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도움을 구하시오. 창고 정리도 좀하고.
-……알겠네.
-그리고 아부를 하려거든 내 동생에게 하시오. 뭐, 먹힐진 모르겠지만.
지부대인의 얄팍한 수를 서문휘가 보았다면 어땠을까?
앞에서는 차출해 주는 척하면서 나중에 엄청난 요구 사항을 들이밀었을 터였다.
서문경은 딱 그 정도를 원했다.
-좋은 밤 되시오.
-……일공자도 좋은 밤 되게.
그렇게 말하는 지부대인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문경은 그를 뒤로하고 주백경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다른 건 다 샀어?”
“예.”
“하민이는?”
“볼 일은 끝났어.”
“좋아.”
서문경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야시장을 돌아보다가,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헛?”
잠시 한눈을 팔았던 지부대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서문경이 깊어지는 성도의 밤 사이로 사라진 것 같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