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4)
“우와, 완전 엉망이네.”
“…….”
“청소를 대체 얼마나 안 한 거야?”
서문경의 타박에 성하민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등 뒤로 온갖 잡동사니와 옷가지, 치우다 만 무언가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방 하나를 내어 준 결과가 이거라니.
“와, 그. 참.”
“……강호에 가잔 이야기는 전부 들었으니까,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금방 치울 수 있었는데.”
“조금? 금방? 방바닥이 보이지 않는데?”
“…….”
성하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어쩐지, 짐을 챙기려면 하루는 꼬박 걸릴 것 같다더니만.
내일 짐 싸서 떠날 사람한테 당장 방구석부터 치우라는 말부터 튀어나올 뻔했다.
서문경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여기서 뭔 짐을 싸겠어. 그냥 성도의 시장에서 사 가는 게 낫겠다, 그지?”
“그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성하민의 시선이 더러운 방구석으로 향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지렵혀져, 여행에 용이한 옷차림을 찾아내기가 벅찼다.
무언의 변명은 거기서 끝났다.
“응, 그게 낫겠네…….”
“반성은?”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내 집안 내력상 뒷말 많아지는 건 안 좋아하거든?”
서문경이 키득거리며 웃자, 성하민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불현듯 부아가 치밀었다.
“그럼 네 방도 보여 줘!”
“나?”
“어! 얼마나 깨끗한지 보자!”
“후회하지 않겠어?”
서문경이 여유가 한껏 담긴 어조로 말했지만, 허세라고 여겼다.
지금까지 봐 온 서문경은 성실하기보다 파락호에 가까웠으니까.
‘두 배는 되갚아 줘야지.’
성하민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지만, 글쎄.
인생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법이다.
“……이게 뭐야?”
“군문의 공자란 놈이 칠칠치 못하게 살겠냐?”
서문경이 한심한 사람을 쳐다보듯 성하민을 흘겨보았다.
그의 등 뒤에 성하민의 더러운 방과는 판이하게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뜻 보기에 흠 잡을 곳 없이 깨끗했으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성하민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서문경의 방 곳곳을 둘러보았다.
어느 것 하나 널브러지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된 옷가지.
손으로 책장을 훑어도 먼지가 묻어 나오질 않으니, 시비가 기본적으로 청소하는 것 외에도 서문경이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허탈한 감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아는 경이는…… 이렇지 않은데.’
여러 사람에게 시시껄렁한 어조로 비무를 청하거나 서문세가의 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탈을 즐기는 둥.
군문의 공자보다는 낭인이나 식객에 가까웠다.
평소 행동이 자유분방하니 방 또한 비슷할 거라고 여겼는데, 완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너, 너…… 이거 미리 치운 거지?”
“뭘 치워.”
“날 놀리려고……!”
“내가 네 방이 더러울 걸 예상하고 치웠다고?”
“그, 그렇게까지 더럽진…….”
“애초에 방금 짐을 쌌는데 미리 치운 게 말이 안 되지.”
“……짐을 싸고 방을 정리했다?”
“말했지. 내가 명색이 군문의 공자인데 더럽게 살겠냐고.”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팔짱을 꼈다.
평소엔 가볍게 행동하긴 하지만, 몸에 배인 습관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본래 군문의 소가주였던 이상 성실함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하물며.
“출정(出征) 전날엔 아무리 껄렁한 사람이라도 진지해지기 마련이거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를 누비며 강호의 구심점을 정의맹으로 돌리기 위한 출정.
삼 년 전보다 몇 배는 어려운 여로(旅路)가 될 것이다.
서문경의 목소리에 진중함이 담겼다.
“지금이라도 생각이 달라졌으면 말해. 강호로 나가면 마교가 언제 습격할지 몰라.”
“…….”
성하민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교와 악몽,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서 비롯된 악연.
그녀 속에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군데군데 찢겼다.
스스로 잊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이 머릿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들과 마주치기 전에 성하민이 직접 선택해야 한다.
“……나는.”
성하민은 자신을 지칭하면서도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기억을 잃은 성하민일까 혹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성하민일까?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생겨나 있었던 재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사람에 불과했다.
‘예전이었다면 피하려고 했겠지.’
삼 년 전이었다면 마교와 싸우기 싫어서 피했을 터였다.
그래서 서문경을 뒤따라가 제멋대로 서문세가에 몸을 의탁했다.
천무학관에 있다가는 언젠가 다시 적마가 찾아올 것 같아서 불안했으니까.
‘경이는 그걸 알고도 묻지 않았었지. 매일 꾸는 악몽에 대해 말하기 전까지는…….’
서문경답지 않은 배려이자 자상함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성하민이 스스로 나설 때였다.
“나도 갈 거야. 직접 가서, 경험하고 싶은 게 많아.”
거처에 자주 놀러 오는 서문패에게 천하(天下)를 들었다.
안개가 군집을 이룬 봉우리와 태산의 정상에서 두 눈으로 직접 담는 경치.
추운 겨울날의 곡물 찌는 냄새와 따스한 온기.
두 눈을 잃은 화공(畫工)과 외팔로 노를 젓는 뱃사공.
애처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팔자주름에는 행복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으니.
-너는 어떠냐? 여전히 불행하냐?
서문패가 그렇게 전음으로 물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대답하지 못했다. 경계심이 한창 강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난 지금 행복하거든. 근데 계속 행복하려면…… 마교와 담판을 짓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
“응. 항상 걱정해 줘서 고맙고, 이번에도 나한테 물어봐 줘서 고맙지만…… 언제까지고 어리광을 피울 순 없잖아.”
성하민은 부끄럽다는 듯 서문경과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넌 너무 어른스러워서, 내 마음을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싸울 용기를 내는 데 시간이 필요했어.”
겨우 열네 살에 적마와 싸우고 진무신검에게 빚을 지운 소년.
서문경의 이야기는 아직도 호사가 사이에서 호걸(豪傑)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성하민은 마교와의 악연을 알고도 도망쳤다.
무서워서였다.
머릿속에 잠든 악몽이 자세하게 깨어날 것 같아서 힘들게 입관한 천무학관마저도 말없이 나갔다.
‘……나이를 먹고 보니 경이가 더 대단하게 보여서, 초라해.’
어린 나이에 심상을 구축하고 무공을 창안하면 무슨 소용인가?
싸울 용기가 없어서 도망치고, 친구 집에 의탁하는 겁쟁이면 아무 소용없는 것을.
성하민이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 서문경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툭, 툭.
서문경은 성하민의 어깨와 팔뚝을 가볍게 치면서 엷게 웃었다.
“웬만한 어른도 마교라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칠 텐데, 그런 결심도 다하고.”
이성을 대하는 손길이 아니었다.
군인이 전우의 기력을 북돋워 주듯,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성하민은 속으로 안도하며 마주 웃었다.
긴장감이 싹 사라지고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백 일 뒤에 열릴 정의맹 회합.
마교와의 전쟁에 회의적인 오대세가를 정의맹에 품기 위한 계책.
서문세가가 지향하는 바와 얼추 맞아떨어졌다.
남천웅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면 정의맹이 한족의 구심점이 될 테지만.
서문경이 전생의 기억을 들춰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다 좋은데, 너무 희망적이지 않아요? 흑도를 빼놓고 하면 엄청 섭섭해하든가 변절할 게 뻔한데.”
“형님이랑 똑같은 소릴 하는구나!”
서문패가 웃음을 터트렸다.
젊은 조카가 다짜고짜 긍정하는 것보다 허점부터 파고드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치. 네 무력에 의존하는 바가 커. 네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거기서 제가 왜 나와요?”
“네가 백 일 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냐?”
“……그. 회합까지는 제가 참아 볼 순 있죠.”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그 말에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구파일방을 둘러보고 가느냐, 그냥 회합에 맞춰서 가느냐죠?”
“그래.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서문패는 서문이현에게 들었던 것을 간략하게 말했다.
구파일방을 둘러보면 회합 이전에 아군을 만들 수 있으나, 무척 위험해지며.
회합에 맞춰서 간다면 서문경의 강함을 숨길 수 있기에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거기까지 경청한 서문경이 고민없이 대답했다.
“마교와 싸우는 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건 도둑놈 심보죠.”
“도둑놈 무공을 배운 네 호위무사처럼?”
“아니, 조카가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뭔 농담을…… 됐고. 삼촌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너랑 똑같지.”
서문패가 히죽 웃으니 서문경도 입술을 씰룩였다.
그렇게 삼촌과 조카가 서로 장난을 치다가, 성격이 더 급한 사람이 먼저 본제를 꺼냈다.
“내가 졌다, 졌어.”
서문패가 손을 내젓곤 서문경에게 한 가지를 제의했다.
“출발하기 전에 경로를 줄이거나 중간 지점마다 마구(馬廏)를 들르는 게 어떠겠나 싶어서 찾아왔다.”
“어떻게 경로를 줄이라는 거예요?”
“곤륜산에서 강북으로 갔다가, 곧장 호북성으로 가라는 거지. 딴 곳으로 새지 말고.”
“일단 곤륜산으로 가는데만 열흘이 넘게 걸리는데요?”
청해성은 예로부터 산과 강줄기가 빈번하여 관도가 치밀하게 깔리지 못했다.
하물며 짙게 깔린 안개는 어떤가?
식량만 떨어지면 쳐들어오는 북적마저도 헤매는 곳이다.
그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서문패는 자신만만했다.
“널 믿어.”
“……뭐요?”
“너라면 백 일 동안 구파일방 다 돌고 호북성까지 가겠지.”
저 대답에는 서문경도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뭘 믿는다인가?
그냥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네 알아서 하라 이거지 않나?
‘주 무사가 엄청 고생했겠어.’
저런 사람과 함께 대사부를 했다니.
서문경은 주백경이 겪었을 수모가 어떤 것일지 깨닫고는 짧게 묵념했다.
그 사이에 서문패를 향한 욕설도 조금 섞었지만, 육감 하나는 귀신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나 욕했니?”
“아니요.”
“그럼 됐는데, 주 무사는…… 아무리 강호에 간다지만 인수인계는 제대로 해 주고 가야지.”
서문패가 그 말을 남기고는 거처로 향했다.
보나마나 주백경을 찾아가서 일장 연설을 해댈 것 같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짜증 나면 박겠지. 검치나 척안룡한테도 대들었던 사람인데.’
서문경은 속으로 큭큭 웃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구파일방을 돌아다닐 경로와 정의맹 회합, 마교의 습격.
여러 가지가 얽혔지만, 복잡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돌아다니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확실한 방점을 찍어야 했으니까.’
마교와의 싸움이든 정의맹에서 벌어질 회합이든 강호에 변화가 몰아친다.
그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물며, 서문세가에 은거하면서 서먹해진 인연과 다시 마주할 차례기도 했다.
‘검치나 척안룡, 천무학관의 동기들인가.’
삼 년.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동등하니, 큰 사고를 친 게 아니라면 천무학관을 졸업하고 사문으로 돌아갔을 터.
“배울 게 있었으면 좋겠네.”
서문경은 어느새 제 몸처럼 들고 다니는 무공사전을 꽉 쥐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