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3)
“공자님께서 강호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저를 두고 가실 생각이었습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자신을 의심하다니.
서문경은 주백경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저 몰래 가시려고 했습니까?”
“설마. 안 그래도 아버지한테 널 빌려가겠다고 했는데.”
“역시!”
주백경이 주먹을 꽉 쥐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참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집 나가면 온갖 고생만 하게 될 텐데 뭐가 그리 좋다고? 게다가 강호 전체를 떠돌 예정인데?”
“삼 년 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대사부 노릇을 했으니 바깥바람을 쐴 때가 되었지요.”
“허, 그 노릇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잖아. 누가 들으면 억지로 시킨 줄 알겠네.”
……실제로 억지로 시키지 않았나?
주백경은 순간 울컥할 뻔할 걸 참았다.
단순히 서문경이 주군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옳기도 했다.
타인을 가르치면서 검법의 실체를 고민하고 안법을 수련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합격진의 틈을 모두 짚어 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기에.
“하아, 공자님이 최고십니다.”
“비꼰 거야?”
“설마요. 저를 대사부로 추천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말에는 사소하게나마 원망을 담았다.
삼 년 동안 대사부로 있으면서 무공 실력만 늘어난 게 아니었으니까.
‘서문패……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한결 편했을 텐데.’
삼 년의 시간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존경심을 완전히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일은 아예 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거나 장군들과 술자리를 즐기기도 했다.
자연히 업무는 주백경에게 쌓인다.
서문패의 일이 아니냐며 거절하려고 해도 문관이 우는 표정을 지어왔다.
“자네라도 해 주지 않으면 이 문서는 아마 삼십 일 동안 방치될 걸세. 제발…… 제발 부탁하네.”
높은 관직에 있음에도 서문패에겐 쩔쩔 매고 마는 걸까?
주백경은 혀를 차며 서문패의 업무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한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본래라면 서문패가 봐야 했을 군사 전략과 대응, 음습하기 그지없는 암계까지.
그 모두를 주백경이 검토하고 허락해야 했다.
물론 자의로 판단하진 않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문패나 서문경을 찾아가서 묻곤 했다.
그걸 삼 년이나 하면 아무리 싫어도 군사적 안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드디어 해방이다, 해방!’
주백경은 환히 웃으며 서문경에게 물었다.
“첫 행선지는 어딥니까?”
“청해성에서 지부대인과 함께 곤륜파로 가려는데…… 괜찮겠어? 편한 여행이 되진 않을 거야.”
‘대사부 노릇보단 훨씬 낫지요!’
……라고 대답할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주백경은 제법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부의 직위를 받으면서 저도 장군에 준하게 되었습니다. 대명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힘을 내야지요.”
“오늘따라 되게 적극적이네?”
“저야 원래 이랬습니다.”
“어, 음…… 그거야 삼 년 전이고 대사부가 되면서는 좀 어두워졌잖아. 주…… 뭐라고 해야 하나?”
“예전처럼 편하게 주 무사라고 부르십시오.”
“주 무사에다가 하민이를 데려갈까 하는데 괜찮지?”
“괜찮긴 하지만……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서문경은 즉답했다.
“어딜 가다가 칠로두나 마교와 손을 잡은 고수와 싸우게 될지 모르는데, 둘이서는 힘이 모자랄지도 몰라. 하지만 셋이면 할 만하지.”
“으음.”
주백경은 자연스럽게 삼 년 전의 적마를 떠올리곤 세 명이서 합공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상단전 심상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과거에는 상단전을 제대로 수련하지 못해서 능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연, 셋이라면 할 만할 것 같습니다.”
“주 무사가 그려봐도 그렇지?”
“예.”
눈을 깜빡이는 찰나 동안 셋이서 적마를 합공하는 심상을 그려 보았다.
적마의 모든 무공을 본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기량을 계속해서 되새기며 복수전을 다짐한 주백경이었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저와 공자님, 성 소저라면 적마쯤은 이길 수 있습니다. 대략 일다경이면 되겠지요.”
“정확해. 뭐, 주변이 좀 망가지긴 하겠지만.”
동정호 부두길이 적마의 손짓에 망가져 버렸듯.
주백경과 서문경의 경지도 적마 못지않게 상승했다.
검력(劍力)을 정제하지 않고 휘두른다면 건물 하나쯤은 무너뜨리고도 남을 테니까.
“가급적이면 영산에서 싸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인을 죽이고도 도문에게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데?”
“누가 칠로두를 죽이다가 서문세가의 부지를 날려 버리면…… 화내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마도고수가 죽은 건 기쁘겠지만, 마냥 기뻐하진 못하겠네.”
서문경은 자신이 소인배라는 것을 인정했다.
어차피 남들처럼 대인이 되는 건 원치도 않았고, 그런 욕심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서문세가가 잘 먹고 잘 살고 마교 같은 걸 적기에 때려죽이기만 하면 그만.
도덕이나 협의를 따질 생각이었다면 신비한 무공사전 따윌 쓰지 않을 것이다.
그저 군문에 속한 군관으로서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
“하민이는 어디에 있지? 이왕 계획이 잡힌 이상, 바깥에 유출되기 전에 출발하고 싶은데.”
“아마 거처에 계실 겁니다.”
“좋아.”
서문경은 주백경과 어깨동무하고는 거처로 향했다.
* * *
두 청년이 강호로 떠나기 위해 거처로 향한 시각.
서문이현은 남들 몰래 서문패와 서문휘를 가주실로 불렀다.
“무림맹주가 보낸 전서구가 있어서 불렀네.”
피로 물든 천리응.
가까스로 격추되지 않았을 뿐이지 암기에 스친 상처가 다섯 개나 됐다.
서문이현은 천리응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빼냈다.
그 겉면에 여러 문자가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호북(湖北), 중경(重慶), 성도(成都).
천리응이 중간에 휴식한 지점이었다.
“호북성에서 사천성까지 겨우 세 번 쉬고 왔는데 상처가 있다는 건 우리 가문이나 무림맹 주위에 날파리가 많다는 뜻이야. 혹시 조작되었다고 보는가?”
“매듭을 다시 묶은 흔적은 없어.”
서문패는 진지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상처를 품은 채 여기까지 온 새야. 괜히 의심하진 말자고.”
“……충심(忠心)이 뛰어나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서문휘가 천리응을 호기심 깃든 눈으로 보자, 서문패가 히죽 웃었다.
“가끔 이런 놈이 있어. 웬만하면 쪽지고 뭐고 도망칠 상황에 끝까지 오는 놈이. 아마 무림맹주가 귀하게 기른 놈이겠지.”
스윽.
서문패가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으니 천리응이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걸 본 서문휘가 두 손으로 천리응을 감쌌다.
“제가 의방에 데려다 놓고 올게요.”
그 말을 끝으로 서문휘가 의방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평소라면 서문이현의 허락을 기다렸을 텐데.
서문패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좀 애 같지 않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건 좋은 일이지.”
“……형님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내 아들들이 칼을 붙잡는 일은 없었으면 했지만, 이미 경이는 먼 길을 가지 않았나. 휘라도 그러지 않길 바랄 뿐이지.”
군문에서 태어나 살생을 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서문이현이나 서문패나 잘 알았다.
하지만 전서구마저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면 지켜 주고 싶은 법이니.
그 흐름을 깬 건 서문패였다.
“너무 감상적이야, 형님.”
“그럼 거두절미하고 내용이나 볼까.”
서문이현은 남천웅이 보낸 쪽지를 폈다.
그곳에는 의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의맹 회합이라…… 재미있는 소릴 적어 놓았군.”
“이거 너무 희망적이지 않아?”
“낭인의 꾀주머니치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나. 마땅히 치하할 일이지.”
남천웅의 제안은 얼핏 듣기에 아주 좋은 것처럼 들린다.
관과 무림의 자존심을 걸고서 한판.
자리를 피하려고 드는 오대세가를 집결시키는 일수(一手)가 될 수 있었다.
좋은 점만 보자면 그렇다는 소리였다.
서문패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후기지수 중에서 수많은 실종자가 생길지도 모르고, 마인이 숨어들 틈이 뻥뻥 뚫려 있단 말이지.”
“이 허점을 채울 내용까지 적었다면 칭찬해 줬겠지만, 적어도 지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니 문제지.”
남천웅의 쪽지는 딱 절반까지만 채워져 있었으니까.
서문이현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꾀 자체는 나쁘지 않아. 무림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
“우리 가주님께서 돕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이 경우에는 수로채를 이용하는 편이 낫겠지.”
“그 수적 놈들은 왜?”
“무림맹주가 너무 어리숙하게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 회합을 열 거라면 아무리 흑도라도 빼먹어선 안 돼.”
관과 무림이 자존심을 놓고 겨룬다.
이런 자리에 흑도를 빼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흑도의 성격상 대부분은 웃고 넘어가겠지만, 몇 놈은 앙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차피 개무시당할 거 마교에 붙어먹겠다는 생각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서문이현은 떠오른 것을 나열했다.
“흑도를 그냥 포함해선 안 돼. 수로채가 회합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그쪽의 후기지수도 참여할 권리를 주는 거지. 그러면 녹림도 고개를 들이밀 수밖에 없을 거고.”
“……회합에 부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나오도록 만든다?”
“바로 그거지. 척안룡에게 큰소리를 뻥뻥 치도록 시키면 더욱 효과가 클 거야.”
평소에 그렇게 무시하던 수적 놈팡이도 나왔는데 정파 겁쟁이 새끼들은 뭐 하고 있냐?
무림인에게 딱 이 정도의 도발이면 적당하다.
서문이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마교라도 척안룡이 직접 지휘하는 수로채를 습격하는 건 쉽지 않겠지. 명문의 후기지수를 노리려면 큰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듣다 보니까 우리가 그렇게까지 회합을 도와줄 필요가 있나?”
“경이를 잊었는가?”
“아!”
서문패가 탄성을 터트렸다.
후기지수 중 최강자가 가문에 있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뒤늦게 깨닫고 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합이 열리는 날은…… 경이가 구파일방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나서 호북성에 도착할 즈음이면 되겠네?”
“그걸세.”
“……흐흐. 빨리 경이한테 알려 주고 싶은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공개적으로 꾸짖을 수 있는 자리라.
서문경이 강호를 둘러본 다음, 방점을 찍을 기회였다.
문제는 오직 하나.
서문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이가 내 아들이긴 하지만, 회합이 열릴 때까지 조용히 있을 것 같나?”
“……음.”
당장 곤륜파에 가면 도사의 멱살을 잡고 싸우고도 남을 조카다.
서문패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
서문이현도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