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2)
다음 날.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훈련장을 뒤덮었다.
“검의 파지(把持)가 무르다! 더욱 굳세게 쥐어라!”
구령대에 선 남자의 말에 장병들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검을 꽉 쥐었다.
피부가 쓰라려도 참아라.
눈에 땀이 들어가도 움츠러들지 마라.
서문의 무공은 흔들리지 않는 근간에서 나오는 법이니.
장병들의 체력을 쥐어짜는 듯한 극기 훈련이었다.
자기 동네에서 장사(壯士)라고 불렸던 사내마저도 학을 뗄 정도여서, 첫날에 도망친 숫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되는 변화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늘어나고 있잖아?’
‘거대 표국에서 왜 서문세가의 퇴역병을 비싼 값에 데려오는지 알겠어.’
하물며 구령대에 선 남자는 생각보다 사려가 깊고 잠재력까지 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언제 체력이 바닥나는지.
어느 병졸의 무릎이 나쁜지조차 파악하여 각기 다른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누구 하나 낙오되는 일 없이 하나의 병사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후우.”
숙하게 들이쉬는 숨.
서문세가의 동공에서 비롯된 기운으로 피로를 한순간에 날린다.
장병들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인내하며 검법을 수련하고 방패술까지 시연했다.
그 뒤에 가장 어려운 훈련이 남아 있었다.
“대형(隊形), 삭(削)!”
서문검법과 방패술을 기초로 한 합격진.
하나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열여덟 개의 대형을 불러 주는 대로 완성해야 했다.
구령대의 남자가 말하길, 한두 걸음 안에.
“그걸 어찌합니까?”
“아니, 되더라도 우리 수준에 되겠습니까?”
합격진을 수련하는 첫날이었던가?
병사 몇몇이 불만을 토했었다.
어떻게 열여덟 개의 대형을 한두 걸음 안에 모두 변환할 수 있겠냐고, 그게 자신들의 수준에서 되겠냐고.
남자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선배 병사들을 불렀다.
“하암…….”
“연례행사라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자다가 깨우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다음 대형은 짝다리로 해 볼까요?”
“시끄럽다 이놈들!”
두 눈을 감거나 짝다리로 하는 둥.
선배 병사들은 열여덟 개의 대형을 손쉽게 해내고는 남자와 담소를 나눴다.
불만을 토했던 장병들은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진짜 되네?’
‘하품까지 하면서…… 신을 제대로 신지도 않고 했지 아마? 보법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경악을 느꼈던 것도 이백 일 전의 과거다.
스슥, 슥.
장병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형을 구축했다.
가히 일심동체.
어떠한 말도 없이 각자 자리로 이동하고 검을 치켜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요지부동이었으나 입꼬리만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귀(龜)!”
거북이의 반질반질한 등껍질을 따라하듯.
장병들이 일제히 방패를 꺼내 사선으로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칼을 놓진 않았다. 언제든 합격진의 중앙에 내지를 수 있도록 긴장을 유지했다.
그걸 본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야 쓸 만해졌군. 젠장할, 대체 언제까지 머저리처럼 가르쳐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 다음! 곤(坤)!”
사나운 웃음소리가 훈련장을 울리면 장병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움직인다.
처음에는 손발이 맞지 않아 온갖 욕과 체벌을 받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려운 대형을 취하라고 지시해도 망설임이 없다.
드디어 훈련의 성과가 드러나자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사람 새끼로 대할 수 있겠구나! 그래도 아직 남았다. 서문의 기개와 절도를 보여 봐라!”
‘처음으로 저런 소릴 들어 보네.’
온갖 욕으로 달달 볶아대던 남자가 처음으로 칭찬과 기대를 내비쳤기에.
장병들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스윽, 쿵! 촤르륵!
그들이 온 집중을 다하는 사이.
건장한 체격을 지닌 청년이 구령대로 올라섰다.
“훈련은 잘되어 가고 있나?”
“……!”
남자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곧바로 예를 갖추어 인사하려는 것을, 청년이 만류했다.
“인사는 됐어. 훈련 도중이니까.”
“……예.”
“검법은 아직 형(形)에 집착하고 있긴 하지만, 합격진 자체는 나쁘지 않아. 호흡이 잘 맞는군.”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다.
청년의 눈은 합격진의 흠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거기, 청공(靑空)이 적궁(赤宮)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어떡하나? 침착하게 움직이도록 주의시켜야지.”
“중천(中天)이 굼뜨면 다른 방위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몸에 붙은 군살을 빼게 해라.”
“한시라도 칼끝이 땅을 겨누면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기 목숨은 물론이고 전우까지 죽게 만들 거야.”
청년은 손가락으로 병사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개선점을 말했다.
저들을 이백 일 동안 가르친 남자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결점을 잠깐 보는 것만으로 알아차릴 줄이야.
무엇 하나 틀리지 않고 옳은 말들이었지만, 훈련을 책임지는 남자에겐 참으로 살 떨리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저분이 여기까지 시찰을 오다니……!’
말단 중에 말단.
병졸의 훈련을 직접 지켜보는 대사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청년, 주백경을 바라보았다.
“저…… 그…….”
“꾸짖을 생각으로 온 게 아니네. 그냥 놀러온 거지.”
놀러온 거다, 심심해서 와 봤다.
높으신 분이 흔히 하는 이야기고 대부분 거짓말이 아닌가?
남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만히 있다가는 주백경이 병영으로 돌아가서 ‘농담’처럼 던진 말에 온갖 불행이 닥칠지도 몰랐다.
화제를 바꿔 보자.
남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으…… 들으셨습니까?”
“훈련 도중이네, 사담은 삼가지.”
“일공자님께서 강호로 다시 나가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어디서 들었나?”
“화 장군님에게 얼핏 들었습니다. 서문을 대표하여 나가시는 용기와 기개가 대단하시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한들 서문경의 행로와 목적은 갑급 기밀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주백경이 등을 돌렸다.
“내가 말한 건 확실하게 고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 대사부께선 너무 완벽한 걸 바라신단 말이지…… 일공자님한테 배운 것처럼 하겠다고 했을 땐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 다르기 마련인데 주백경은 늘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기준에 따라 맞출 수 있으면 곧장 백인장을 달고서 장군을 노릴 수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백 일을 수련한 장병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딱 저 정도였다.
그 이상을 바랐다가는 오히려 퍼지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겨우 스물일곱의 나이에 엄청난 경지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얼핏 들리는 소문으로는 십대고수와 좋은 승부를 겨룰 수 있다고 하던가?
쉬이 믿기진 않지만, 현 서문세가엔 이치에 어긋나는 괴물이 많았다.
요컨대 서문패라던가 서문경과 주백경.
또, 서문경이 거처에 은밀하게 숨기고 있다는 빈객까지.
‘재능이 참으로 부럽구만.’
남자는 혀를 차며 합격진을 펼치는 장병들을 보았다.
주백경과 대화하다가 저들을 보니 범부(凡夫)처럼 보였다.
* * *
나흘 전.
“……후우, 정말로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군.”
무림맹주 남천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밤을 새느라 얼굴에 새까맣게 기미가 앉았고 신경은 한껏 곤두섰다.
“남궁세가, 이놈들……. 언제까지 낯부끄럽게 굴 건지.”
군부는 일찌감치 한 몸으로 뭉쳐서 마교와 맞대응하고 있지만, 무림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대세가.
지역의 호족으로서 지부대인이나 현령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
그들은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특히 남궁세가는 가주도 소가주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질 않으니…… 의중을 모르겠어.’
과거에 군문이었던 신창양가가 선뜻 정의맹 결성에 편을 들어준 것이 다행일 뿐.
나머지 오대세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 한 가지 방도를 떠올렸다.
“그래.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무림의 법식이 있긴 했지.”
강자존.
강자는 약자의 뜻을 손쉽게 꺾을 수 있다.
겉으로는 도문이나 불가인 척하는 구파일방마저도 저 대명제를 부정하지 못했다.
남천웅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각자 문파나 가문을 대표하는 자들끼리 회합을 벌이면 되는 일 아닌가?”
한 지역의 패권을 논하는 가문으로써 참석을 거절한다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오대세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테니까.
‘가문을 대표하는 고수를 보내기엔 천하가 혼란스러우니, 후기지수들끼리 겨루도록 조율하는 편이 좋겠어.’
남천웅은 자연스럽게 천무학관을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후기지수들을 떠올렸다.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 될 것이다.
‘서문경이 있는 한…… 후기지수 나이대에서 그놈보다 뛰어난 후기지수는 없어. 오대세가 놈들도 그 사실을 알겠지만, 뭐 어쩌겠어? 클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왜 공고하겠는가?
오랫동안 무림사에 관여하면서 낯부끄러운 일 없이 권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설령 패배하게 될 싸움이어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서문경에게 모략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니.
남천웅은 까슬까슬하게 자란 수염을 매만졌다.
“무림인 간의 싸움으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판을 키워야 한다. 아, 좋은 구실이 하나 있었지.”
정의맹.
관과 무림이 힘을 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생 집단이 있지 않던가?
아무리 동맹이라고 한들 자존심 싸움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딱 적절해. 개짓거릴 하긴 애매하지만, 우두머리를 정하자는 것도 아니니까 필사적으로 달려들 것도 아니지.”
전략을 짰으니 이제 도움을 구하면 될 일.
남천웅은 창가에 다가가 전서구를 매만졌다.
전서구가 구르륵거리더니 손가락에 뺨을 비볐다.
낭인 시절부터 무림맹주가 된 지금까지도 아끼는 새 중 하나였다.
천리응(千里鷹).
영물처럼 거창한 능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아주 먼 거리를 날아갈 줄 알았다.
“너만 믿으마. 서문세가에 가서 전해 주려무나.”
천리응의 다리에 쪽지를 묶은 뒤 손가락으로 탁 치자, 순식간에 점이 되어 날아갔다.
바로 그때.
맹주실의 방문이 활짝 열리며 거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웅이, 게 있는가?”
“……거 진짜, 나도 이제 명색이 무림맹주란 말이요.”
남천웅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남자는 자기 멋대로 움직이곤 했다.
천하십대고수 중 일인, 낭왕.
전대 무림맹주이기도 했던 그는 삼 년 전에 무림맹으로 돌아와 자신의 일을 돕고 있었다.
‘낭왕의 이름값을 빌려서 편해진 것도 있지만, 언제까지 부하처럼 대할 건지…… 쯧.’
은근슬쩍 짜증을 부리자, 낭왕이 입술을 씰룩였다.
워낙 감정을 표현하는 게 드문 남자인지라 저게 다른 사람의 폭소(爆笑)와 비슷했다.
“내 사과하지. 아직도 남 맹주가 동생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남 맹주가 허락하면 낭인을 모아 볼까 해.”
“……형님이요?”
남천웅은 한순간 입술을 매만졌다.
자신을 무림맹주로 대하라고 해 놓고 자기도 모르게 낭왕을 옛날처럼 대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낭왕이 재차 입술을 씰룩였다.
“허락해 주겠나?”
“……나쁠 건 없지요. 무림맹의 힘이 아직 부족하니.”
“좋아. 나중에 경과를 말해 주지.”
“뭘 말입니까?”
“낭인을 모으기만 해서 무슨 의미인가. 우리도 갖추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낭왕이 맹주실에서 나갔다.
여전히 불친절한 사람이었기에, 홀로 남은 남천웅이 그 뜻을 유추했다.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정보 단체를 만들겠단 건가?”
낭왕이라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곰곰이 고민하던 남천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내 뒤통수를 칠 사람은 아니니까.”
협의(俠義)와 신의(信義).
한때 협사라고 불린 낭왕이라면 무림맹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훼방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 서문경 그 어린놈도 자기 몫을 하는데 나도 해야지.”
남천웅의 시선이 보고서로 향했다.
오늘도 밤을 새야 할 듯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