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파 (1)
바야흐로 삼 년.
서문경은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이 되었다.
기껏해야 오 척(150cm)에 불과하던 체구가 순식간에 팔 척(180cm)까지 자라났다.
하물며 뼈와 근육은 어떠하겠는가?
미처 여물지 않았던 소년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후우.”
아침 수련을 마친 서문경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냈다.
지난 삼 년 동안 단순히 체력을 쥐어짜거나 몸을 단련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지의 영역에 도전했다.
이를테면 상단전.
번천광검결에서 유독 천결밖에 쓰지 못하던 것이 아쉬워서 미진한 상단전 심상 수련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두 번씩 수련했다.
‘전생이었다면 이럴 시간에 영약이나 먹으면서 중단전을 강화했겠지만.’
이미 그 길은 천마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으로 끊겼다.
그렇다면 천주심경과 분심조화결로서 새로운 영역으로 개척하는 것뿐.
‘역시 신화경에 가까워지려면 중단전의 수련만으론 부족해.’
무예십팔반을 완성했다던 천마의 경지.
신화경에 준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기 위해 삼 년의 시간을 온전히 쏟았으니.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서 맞고 다니진 않겠어.’
천주심경으로 쌓은 강철의 기둥은 전각에 가까울 정도로 높아졌다.
천마에게 죽을 때와 비교하면 아직 멀었지만, 현재의 십대고수와 좋은 승부를 노릴 수 있을 터.
뚜둑, 뚜두둑.
서문경은 팔과 다리를 쭉 펴며 수련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뒤이어 거처로 돌아가니 성하민이 초췌한 안색으로 반겨 주었다.
“안녀엉…….”
“또 악몽이야?”
“응…….”
성하민과 삼 년 동안 살다 보니 알게 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악몽.
성하민은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몸을 빼앗기는 꿈을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었다.
온갖 경험을 다한 서문경도 처음 보는 경우였다.
‘강호의 고수가 쩔쩔 맬 악몽이라면 주술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데…….’
몸을 빼앗긴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캐물어보기도 했지만 성하민의 답은 한결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오늘도 얼굴이 보이질 않더라…… 대체 언제까지 괴롭힐 건지 모르겠어.”
성하민을 뒤쫓아서 몸을 빼앗으려든다는 ‘누군가’.
악몽의 정체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한때 황성에 거주한다는 우도방문의 도사를 부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가 잡아먹혀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명백백한 흉조였다.
‘아마 천마와 연관된 걸 텐데.’
이쯤 되면 아예 안 묻기도 넘어가기 뭐해서 성하민에게 과거사를 물었었다.
하지만 영양가 있는 답은 듣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지, 떠올리기 싫다는 말도 덧붙였고.’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기억을 스스로 없앨 만큼 참혹한 경험을 어렸을 때부터 겪었다는 소리니까.
서문경은 성하민의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너무 용 쓰지 마. 내가 물어봤다고 해서 억지로 떠올릴 건 없으니까.”
어차피 마교에서 성하민을 노리고 있다면 언젠가 급습해올 터였다.
그때 한 놈을 붙잡아서 고문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서문경은 성하민의 망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정작 성하민은 전전긍긍했다.
“여기 지내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몇 없는데…….”
“괜찮다니까.”
천무학관에 있을 때만 해도 남궁명이 탐을 내던 고수가 바로 성하민이었다.
그 이후로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네가 언젠가 힘을 보태 주기만 한다면 족해.”
성하민의 성장 또한 괄목할 속도를 보여주었다.
지금이야 서문세가에서 은둔하고 있다지만 언젠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면 십대고수의 말석에 이름을 올릴 수준이었다.
‘무림인들이 보면 나나 성하민이나 불가해한 괴물처럼 보이겠지.’
뭐, 실없는 생각인가.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이따가 보자.”
“회의야?”
“어. 늦어도 밥 먹기 전엔 올게.”
서문경이 한쪽 손을 흔들며 거처에서 나갔다.
* * *
과거에 한족이 다른 민족에게 천하의 패권을 빼앗기던 시대상이 이러했을까?
삼 년 동안 강호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하고 야수처럼 돌변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불안정(不安定).
명나라 외곽에서는 북적이나 남만, 왜구가 칼을 뽑아든 채 양민들을 수탈했고.
내부에서도 딴 생각을 품는 자가 생겨났다.
가산을 챙기고서 명나라에서 벗어나려는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이 불안정의 중심에는 마교가 흑막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건 겨우 서넛.
“남만야수궁과 북적으로 이루어진 적성(赤星), 십만대산의 종파…… 왜구를 지휘하는 세력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마교의 근본은 한족을 몰살하려고 했던 외적(外敵)이었다.
강호에 스며드려는 걸 들켰으니 대놓고 외적을 끌어와서 지휘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문제는 그 숫자가 적고 은밀하여…… 몸이 가볍다.
한 번의 출진마다 절차가 필요한 대명의 군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이 서문이현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자께서 전권을 주셨다고 한들 군병이 움직이면 발자국이 대지에 찍히기 마련. 수십에서 수백 년을 도망치며 살아온 소수민족에겐 순식간에 들통나고 말지.’
정석대로 외곽에 병사를 주둔시키기도 해 봤지만, 별 실속은 없었다.
안 그래도 혼란한 천하인데 외지인이 우루루 몰려가봐야 소수민족의 눈에 띄게 될 테니까.
고로, 서문이현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지만…….
‘구파일방은 결국 도문과 불가라는 거지. 마음에 들지 않아.’
서문세가를 비롯한 군문은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 벽을 허물고 무림과 동맹하고 무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구파일방은 아직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도문(道門)이고 불가(佛家)라서.
먼저 걸어온 싸움에 대응하는 게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대기하는 짓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파일방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계율(戒律)이었다.
“……미련하지 않은가. 문파를 유지한 오랜 전통과 기틀 때문에 멸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해는 한다.
정체성을 버리면 언젠가 무너져 내린다.
살생을 일삼는 승려와 도사를 보면 민간의 신뢰나 신망을 잃을 테니까.
그래도 지금은 어설프게 도경이나 불경을 지킬 때가 아니다.
한 민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저 견고한 정신을 어떻게 부수면 좋을까.’
서문이현이 붓대를 쥔 채 고민하는 사이.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 금방 가마.”
서문이현은 가주실에서 나가 회의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보이는 것은 벽면을 크게 차지한 군사지도와 상석이 비워진 팔선탁(八仙卓:탁자).
서문세가에 속한 관리와 장군, 소가주 등 일곱 명이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편히 앉게.”
서문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명하니 일곱 명이 제자리에 착석했다.
처음 경험했을 땐 이런 절차가 불필요하다고 여겼지만, 가주로 있으면서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자들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주인 자신이 물렁하게 살아선 안 된다는 무게감 또한.
서로를 위해서 좋은 절차였다.
그리고 이번 회의는 주간 동안의 훈련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청해성 이북에서 적성과 십만대산이 서로 힘을 합하였습니다.”
“…….”
서문이현은 침음을 삼켰다.
승마술이 뛰어난 유목민족의 정예, 적성.
이들은 식인이나 인신공양으로 강함을 추구했던 사교(邪敎)였기에 대략 이백 년 전에 탄압당했던 마교였다.
그 행동이 너무 잔학하여 유목민끼리도 적성을 꺼렸다고 들었다.
거기에 십만대산이 합류했다면 어느 종파인지가 중요했다.
“종파는?”
“현재는 천마신교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천마신교라면…… 천마를 숭앙하는 교리가 중심인 종파를 말하는가?”
“예. 다른 종파를 흡수했다는데, 의도가 무엇인지 속히 알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서문이현의 시선이 벽면에 있는 군사지도로 향했다.
“곤륜파와 공동파가 위험하군.”
“첩보가 도착하고 나서 곧바로 전서구를 보냈습니다만…… 아직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군.”
군문과 무림이 손을 잡기 이전부터 서문세가는 여러 도문과 친분을 다져왔다.
그중 북적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곤륜파와 공동파.
두 문파는 워낙 험한 전장과 접경해 있어 다른 도문에 비해 살수를 펼치는 데 망설임이 없고, 때로는 서문세가와 힘을 합하기도 했다.
답신의 중요성을 모를 자들이 아니다.
서문이현이 대응을 고민하는 사이에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서문경.
열일곱의 나이에 서문패의 뒤를 이을 제일고수로 점쳐지는 일공자.
아들이 선뜻 나서겠다고 하니 서문이현의 의중이 복잡해졌다.
기쁘면서도 착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뜻은 갸륵하나 천하의 대세가 혼란하여 신분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주님께서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압니다. 제가 그걸 해결하겠습니다.”
무얼 고민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서문이현은 서문경의 말에 큰 호기심을 느꼈다.
“한번 말해 보아라.”
“수많은 호사가들은 군문을 두고 몸이 무거운 거한으로, 무림을 칼 한 자루로 방랑하는 자유인으로 생각하나…… 정작 천하의 형세를 보면 구파일방은 계율 따위에 발이 묶여 있고 오대세가는 자기 보신(保身)에 혈안이 되어 있지요.”
“…….”
“제가 직접 천하를 둘러보며 계율이라는 속박을 끊고 오대세가를 꾸짖고자 합니다. 군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빈틈을 메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화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거늘.
서문경이 그 문제를 꿰뚫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생각했던 해결법까지도.
“서문세가의 위명(偉名)을 대신할 만큼 귀한 신분이며, 강호를 방랑할 수준의 고수이자, 여러 무림인과 연을 쌓은 사람…… 저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서문경의 목소리가 자신만만했다.
천무학관에서 쌓은 인연과 삼 년 동안 보여 준 성실함과 무공.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보낼 사람으로 서문경이 제격이었다.
‘내가 먼저 말하기가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었건만.’
서문이현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답지 않은 망설임이었다.
소가주도 아닌 서문경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다.”
“아버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서문휘가 반기를 들었다.
마교가 소수민족을 위시로 강호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이 현실이오, 서문세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상대이기에.
삼 년 전보다 수십 배는 위험했다.
‘반드시’ 칠로두에 속한 마도고수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서문휘의 눈이 서문경에게 향했다.
걱정이 한껏 담긴 시선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전서구를 보내서 천천히 설득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걸로 무림이 뜻을 꺾겠느냐?”
“……하지만.”
“우리 가문과 깊은 연을 맺은 곤륜파마저도 개차법으로 살생보다 청해성민의 목숨을 지키는 걸 우선했을 뿐이다. 전서구로 말해 봐야 명령처럼 들리기만 하겠지.”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도 좋다.
서문이현이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자, 제아무리 영민한 서문휘라도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기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일인 건 굽힐 수 없습니다.”
“나도 안다.”
아비로서 어찌 아들을 사지로 쉽게 밀어 넣을 수 있겠는가?
서문이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입술을 씰룩였다.
“제가 그 길을 어찌 혼자 가겠습니까?”
“……허면?”
“대사부와 빈객 하나를 빌려가겠습니다.”
누구를 말하는지 알겠다.
서문이현은 껄껄 웃었다.
“본가의 최중요 전력을 데려갈 참이냐?”
“앓은 소리는 마십시오. 어차피 가주님 말 한 마디면 금방 채울 수 있지 않습니까?”
서문경은 서문이현과 마주 웃었다.
서문의 부자(父子)는 웃으면서 헤어질 줄 알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