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12)
삼 년.
서문경이 서문이현과 노장들에게 자신 있게 말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새롭게 정립한 가전무공과 동공을 익힌다면 마교와 싸울 수 있는 정예병을 양성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대사부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었다.
“이 직책에는 서문패와 주백경을 임명하겠다. 사령(辭令)에 불복하거나 불만을 제기할 사람은 가주실에 직접 찾아오도록 하라.”
서문이현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심하고 엄중했다.
그 누구도 인선에 따질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서문패 장군은 인정하지만, 주백경은 왜?”
“아직 일공자의 호위인 사람이 아닌가? 시연에서 보였던 모습은 훌륭했지만…… 겨우 그뿐이지 않나?”
가전무공의 배움을 총괄하고 관리하는 자.
그 중책에 갑자기 올라서게 된 주백경은 짓눌리는 듯한 무게감을 느꼈다.
‘이걸 공자님한테 상담해 봐야 소심하단 타박만 듣겠지.’
서문경이라면 ‘믿는다’느니, ‘알아서 해봐’ 같은 소리나 할 것 같아서 직접 가주실로 찾아갔다.
그곳엔 이미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서문이현이 공무를 한쪽으로 치워놓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주백경 대사부.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저에겐 너무 막중한 직책입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불복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저보다 뛰어난 기량의 장군이 있는데 제가 그 자리에 있는 건…….”
“우습군.”
“……예?”
“왜 그 자리에 자네가 부족하다고 예단하나? 나이 많고 어리석은 자들의 질투 따위에 휘둘릴 만큼 약한 남자였나?”
농담 따위는 없었다.
대사부 자리를 망설이는 자신에게 실망을 느낀 듯해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주백경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서 물었다.
“가주님께서 저를 대사부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누가 제일 가전무공의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나?”
“……그건.”
한순간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첨꾼이라면 서문이현을, 장군이라면 서문패를 꼽을 터였다.
하지만 주백경의 내면엔 이미 한 사람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일공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만한 이해가 없으면 가전무공을 뜯어고치는 일 따윈 불가능하지.”
“…….”
“그 아이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바로 자네지 않나? 시연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고 들었네만.”
“……지금이야 공자님께 직접 배워서 그렇지, 몇 달이 지나면 제자들에게 따라잡힐지도 모릅니다.”
대사부라면 응당 제자에게 닿지 않을 위치에 있어야 하는 법.
그 위치를 삼 년 동안 유지할 자신이 주백경에게 없었지만, 서문이현의 목소리는 냉정하기만 했다.
“자네를 추천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일공자님 아닙니까?”
“설마. 내가 아들의 말을 듣고 자네를 대사부 자리에 임명했을까.”
서문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서문경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지만 이런 큰 직책을 임명하는 판단까지 맡기진 않았다.
하물며 서문경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가문과 군부, 황실에 관한 일은 모두 아버지께 맡기겠다고.
그 말인즉 자긴 공무에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추천을 듣고서 임명했다.
“서문패. 그 친구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분께서요?”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서문이현 앞에서 칭호를 실수했다.
그만큼 서문패가 자신을 추천했다는 게 의뭉스러웠다.
어쩌면 곁에 두고서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서문이현의 대답은 명쾌했다.
“이런 일에 서문패가 농담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주백경이라는 무사에게 가능성을 본 거지.”
“…….”
“무림에서 보였던 집념과 이해, 서문동공의 원숙함…… 그 모든 걸 보고 듣고서 판단한 걸세.”
시연 중에는 공명결을 코피 하나 흘리지 않은 채 유지하지 않았던가?
주백경 스스로는 낮춰 보고 있었지만, 서문이현과 서문패가 보기에는 그 또한 여느 장군들 못지않은 고수였다.
하물며 나이가 젊으니 가능성이 유망했다.
“서문패와 함께 병영에서 지내길 바라네.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얻는 배움도 있을 테지.”
“그건…… 일공자님께서도 허락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설마 임명장을 준비하면서 경이에게 묻지 않았을 것 같나?”
“허락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네.”
“……하. 하하.”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서문세가에 속한 군세.
그 모두를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생겼다.
자신의 나이가 이제 스물셋.
어느 군문의 역사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공자님께서 이곳까지 이끄셨구나.’
사천성에서 호북성까지 이어졌던 동공의 수련.
무영신투라는 절대고수에게 배운 기예와 잡기.
시간이 날 때마다 서문경과 나누었던 대화와 비무.
이 중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사부라는 위치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주백경은 가슴 깊이 감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부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단…… 한 가지는 약속해 주십시오.”
“뭔가?”
“마교와 직접 맞서 싸우는 그때에 일공자님과 함께 싸우게 해주십시오.”
빚을 갚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청마가 적마의 머리를 회수할 때, 되살릴 방법이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시연에서 있었던 일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한 전초였다.
직접 적마와 싸워서 목을 베는 것이야말로 군문에 속한 무사로서 할 일이오, 대명의 천하를 유지하기 위함이니.
서문이현은 주백경의 얼굴에서 굳건한 의지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주백경은 그제야 대사부 직책의 임명장을 받아들였다.
* * *
“젠장, 제기랄. 이 굴욕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새빨간 핏물에 젖은 적마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문경과 주백경, 척안룡에 이어 검치까지.
온갖 잡것들이 나타나 패배를 안겨주었다.
심지어는 목만 남아서 청마에게 도움을 받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다.
‘신혈을 절반 이상 잃었으니…… 다시 힘을 회복하려면 저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젠장.’
적마의 시선이 히죽거리고 있는 청마에게 향했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자신이 아는 거라곤 옛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과 괴짜라는 사실 정도.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겠어서 불안했다.
“무얼 원하느냐?”
“응?”
“날 도와준 심산이 있을 것 아니냐. 빨리 말해 보아라.”
그 말에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청마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평범해졌군.”
“……?”
“패배를 겪으니 고고한 척 굴던 모습이 사라졌어. 그게 참 우스웠는데 말이야.”
“놀리는 것이냐?”
“설마, 너 따윌 놀리려고 검치와 싸웠을까?”
검치가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적마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천애고아로 태어나 스스로 신검으로 벼려진 남자.
지금이야 별 의욕 없이 지낸다지만, 직접 싸워 본 적마는 알았다.
아직 그 힘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나저나 검치는 어떻게 된 거냐?”
“물러나게 했지.”
“어떻게?”
“그야 내가 알아서 했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어.”
“……그런가, 정말로 다행이군.”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짓는 적마라.
청마는 깊은 동정심을 담아서 적마를 쳐다보았다.
한때 신혈의 혈족으로서 고귀한 자태를 유지하던 남자가 이리도 한심하게 변모하다니.
청마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그래도 아직 쓰임새는 남아 있나.’
청마는 헝겊을 꺼내 적마의 머리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스윽, 슥.
피가 워낙 끈적끈적한지라 머리와 얼굴을 닦는 데만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청마는 자신이 한 일을 설명했다.
목만 남은 상태로 무림맹에 보냈다는 것을.
그걸 이용해서 진무신검을 죽이려고 했지만, 서문경 때문에 때를 놓쳤다는 것 역시.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적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맙다.”
“뭘 고맙냐, 이용했다니까.”
“어쨌든 회수하지 않았더냐. 너만 아니었다면 구천을 떠돌았을 것이다.”
과정이 어떠했든 적마의 목숨을 지켰다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마는 청마에게 있었던 껄끄러움을 일부 해소했다.
대신 자신의 목을 베었던 검치에게 분노를 드러냈다.
“검치는 어디로 갔지?”
“사천성으로 돌아가겠지. 원래 은둔하던 곳이 거기였으니까.”
“몸만 회복되면 찾아가야겠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
“어차피 그놈은 제대로 된 투쟁이라는 걸 하지 못해. 잃으면 안 될 걸 만들고 말았어. 차라리 검마일 때가 나았지.”
검치가 검마이던 시절에는 정말로 무서웠다.
천애고자.
가족이라곤 전무하여, 오로지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 목숨을 불태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공덕을 쌓은 도사나 고승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승천하지 못하고 천하에 머무르는 건…… 미련을 끊지 못해서야. 미혹이든, 인연이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이든.”
세 절대고수가 마교와의 싸움을 중단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오직 검치만은 갈 곳이 없었다.
그에게 강호란 방랑할 지리에 불과했으니까.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적마는 그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대인!”
한때는 협객 흉내를 내면서 외적과 싸우거나.
“양가는 그대를 언제나 빈객으로 맞이하겠소!”
신창양가에 가르침을 주는 사부가 되기도.
“농사라곤 쥐뿔도 모르는구먼. 쯧쯧! 내가 알려 주겠네!”
아예 무공과는 동 떨어진 삶을 몇 년 간 살아보기도 했다.
무적(無籍)의 절대고수.
검치는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삶에 의지나 만족을 가지지 못했다.
언제나 공허하다는 듯 실실 웃다가 술을 처마시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찾아간 신창양가에서 인연을 찾고 만 것이다.
제자.
천애고아였던 자길 떠오르게 만드는 아이를.
“양명성이라고 했지.”
청마는 검치의 제자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섣부르게 건드려서 분노를 사는 것보다 주변을 경계하다 메말라 죽길 기다려야 해. 그게 이야기에 어울려.”
* * *
끼익, 탁!
육로를 통해서 한시도 쉬지 않은 채 몇 주.
집에 도착한 검치는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이곳저곳을 뒤졌다.
“양명성! 이놈아! 어딨냐!”
전신에 쌓인 피로와 갈증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낮인데 뭐 하냐! 아직도 처자냐!”
험한 말씨보다 갈급한 목소리가 집 전체를 울렸다.
설마 청마가 경고한 대로 이미 잡혀간 거라면?
번천광검결을 뺏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검치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어, 사부. 이제 왔어?”
시장을 갔다 온 건지 양명성의 양손에 이런저런 채소와 잡곡이 많았다.
그것을 본 검치가 웃었다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웃었다.
“야 이 개 같은 놈아. 사부가 왔을 것 같으면 가만히 집에서 대기했어야지.”
“그걸 내가 어찌 안다고? 몇 달 만에 보는데 지랄이네.”
“말대꾸는!”
검치는 껄껄 웃으며 양명성의 어깨에 팔을 휘감았다.
“오늘부터 떠날 준비해.”
“예? 갑자기?”
“말대꾸하지 말고.”
검치가 뜬금없이 정색하고 말하기에 양명성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폭거에 가까운 짓이지만 목숨을 구한 은인이자 사부였으니까.
“예, 예. 그럽시다.”
“……그래. 고맙다.”
의미 모를 소릴 중얼거린 검치가 물을 목구멍에 부어 넣듯 하곤 위층으로 올라갔다.
양명성 입장에선 기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 * *
이날로부터 삼 년이 흘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