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11)
“이게 정말로 그 일공자가 썼다고?”
“서문패 장군이 썼다고 해도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돈데.”
홍가의 고수들이 침음을 흘렸다.
단순하지만 요체가 담겨 있다.
가전무공을 아무리 숙하게 익혔다고 한들 이렇게 집필하긴 어려울 터였다.
하물며 창법과 검법의 발전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세월을 앞서갔다’고 평할 만큼 대단했다.
“군문의 무공이 강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던 현묘함이나 부드러움이 담겨 있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고 절묘하다니…….”
“특히 검법은 명문거파의 무학에서 본 뜬 것처럼 보이지 않나? 정확하게 어디라곤 말하기 어렵지만.”
수많은 무공 비급과 검법을 마주한 고수들조차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정확하게 어디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만약 서문세가의 일공자가 강호에서 본 무공을 빌려썼다고 한들, 마교만 잘 막을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
“무림인 앞에선 그런 말하지 말라고.”
군문에 속한 사람의 관점이란 보통 이러했다.
무공 비급이라는 것도 병장기 교본(敎本)처럼 군문끼리 공유할 정도니까.
오히려 사리사욕이나 수양을 위해서란 욕망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무림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군관들.
특히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군들의 생각이란 대단히 편협했다.
“오히려 일공자가 이런 비급을 써 줘서 속이 후련하군. 무림인이 가끔 군문의 무공은 너무 단순하다고 시비를 걸어올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클클, 동감이야.”
강호의 무학이 담겨 있다면 오히려 좋다니?
무림인들이 들으면 제자리에서 칼을 뽑아 들 소리였지만, 그들한테는 재산을 숨긴 노친네에게 공납을 걷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게 끌끌거리며 웃다가…… 동공을 기술한 부분에서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 이건.”
“너무 단순무식해서 펼칠 엄두가 나질 않겠어.”
공명결.
한계에 가깝게 단련한 중단전을 바탕으로 공력의 파문을 흩뿌려 강력한 힘을 꾀하는 구결.
서문세가와 비슷할 정도로 외공에 집착하는 홍가의 고수들마저도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 정도였다.
“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내상이나 주화입마로 죽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익힐 순 없겠군.”
“서문경이라고 했던가? 일공자의 발상이 참으로 기이해.”
흑도의 하수가 흔히 쓰는 잠력 폭발과 비슷하면서도 구결의 수준이 한참은 앞서있다.
일류 무인이 잘만하면 검강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는 절정고수조차 잡아먹을지도 모를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까지 보고 나서야 홍가의 고수들은 비급을 내려놓았다.
“……하, 하하. 서문세가의 시연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군.”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필사할 도구를 가져올 걸 그랬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비급에 적힌 무학을 논했다.
아무리 홍가가 단순무식하다고 하여 예의를 모르진 않는다.
하물며 서문패가 주변에 있지 않는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도 서문경이 기술한 무공에 한가득 심취하여 어떻게 홍가의 가전무공에 접목할지 고민했다.
“하, 이것 참. 너무 뛰어난 조카를 둬도 문제네.”
서문패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단순무식하고 편협한 놈들을 비급 하나로 매료시켰다.
앞으로 서문경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빚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움직이리라.
그 생각을 하자니 조카가 너무 건실하게 자라서 귀여운 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나한테 부탁하러 오는 입장이 되어야 골려먹을 수 있는데, 쯧.’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인연을 쌓았다.
서문세가부터 강호에 이르기까지, 서문이현조차 대화를 포기한 칼잡이 놈들과 친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곁에 있는 홍화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으음.”
비급의 내용을 보고 한층 더 심각해진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동년배가 너무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으니까.
저 나이에 무덤덤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원래 약혼자였던 남자였으니 온갖 복잡한 감정이 들 터였다.
다만, 그 모습이 서문패에겐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어때, 이제 좀 후회가 돼?”
“뭐, 뭐가요?!”
“우리 잘난 조카님이랑 파혼한 거 말이야. 솔직히 쪼금 아쉽지?”
“그, 그러진 않거든요?”
지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말했지만, 홍화연의 내심은 서문패가 추측한 대로 복잡했다.
떼를 써서라도 약혼을 계속 유지했다면…… 홍가의 가전무공을 손봐주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비급을 조금만 보아도 안다.
서문경이 가진 재능은 북두칠성이 발하는 빛보다 훤하여 천하를 능히 밝힐 만하다.
그 광채에 비해 자기가 가진 재능은 반딧불보다 작아 보일 수밖에 없으니.
천재와 마주한 수재가 이런 건가 했다.
홍가의 고금제일기재라고 불렸던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던 홍화연이 서문패에게 물었다.
“……경이는 어디에 있어요?”
“왜?”
“왜는요, 비급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렇죠.”
“정말? 그뿐?”
서문패가 능글맞게 히죽거렸다.
정말이지, 체통이나 진지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아저씨 같다.
홍화연은 서문패에게 대놓고 등을 돌리곤 서문경의 거처로 걸어갔다.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면 거기에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 *
“누구세요?”
아주 작게 열린 문 사이로 젖은 머리카락과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홍화연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거처에는 서문경과 주백경밖에 거주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그래, 혹시 새롭게 들인 시비(侍婢)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모시는 사람의 거처에서 몸을 씻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홍화연은 침묵이 길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제야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 경이 처소 아닌가요?”
“아. 오늘 방문한다던 친구분이신가요? 저는 성하민이라고 해요.”
“친구 아니에요.”
“네?”
“……약혼자였거든요. 한때지만.”
“…….”
“…….”
홍화연과 성하민이 서로 눈빛을 마주했다.
당황스러운 시선과 경계심 가득한 눈빛.
두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에 안쪽에서 서두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서문경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두 여자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가, 서로를 보고 정색했다.
‘……뭐 하는 여자야?’
‘약혼자가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거짓말이겠지?’
만약 문이라는 경계가 없었다면 서문경이 파혼을 선언했을 때처럼 다짜고짜 비무를 행했을지도 모른다.
홍화연에게 대화란 대부분 비무나 싸움에 가까웠으니까.
그 기세를 알아차린 성하민도 눈을 가늘게 떴다.
“싸우자는 건가요?”
“……그럴 자신이 있다면.”
곧바로 도발로 응수하는 홍화연의 모습에 성하민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라면 싸우게 되는 거야 시간문제.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서문경이 서둘러 외쳤다.
“그만, 그만!”
“…….”
그 말에 성하민은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하지만 홍화연의 성질은 몇 달 전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쩌적!
문짝이 가로로 갈라지며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성하민에게 휘두른 게 아니라, 서문경에게 짜증을 대놓고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건 아니지 않나요? 파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외간 여자를 자기 거처에 들이고…….”
“오해야!”
“오해라…… 대체 어딜 보고 오해를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 잠깐 있어 봐.”
“한 집에 동거하면서 몸도 씻을 정도면…….”
“있어 보라니까!”
홍화연의 오해가 망상으로 번지기 전에 빨리 멈춰야 한다.
서문경은 서둘러 경공을 펼치고는 성하민을 데려온 이유를 설명했다.
천애고아여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며 마교가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육성으로 전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전음으로 말했다.
-그게 정말이어도 남는 집에 지내게 하면 되잖아요?
-마교와 직접 싸우면 알아. 가까이 두고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고 당할 거야.
-…….
홍화연은 잠시 서문경과 성하민을 번갈아 보았다.
정분이 든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명나라에서 열네 살은 성년이 되었다고 할 나이였다.
그 나이의 남녀가 한집에서 산다는 건 무슨 일이어도 불순하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 간섭하는 것도 선을 넘는 짓이었다.
“하아. 이미 파혼한 사이인데 뭘 어쩌든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오해라니까.”
“세간에선 그걸 동거라고 해요.”
“…….”
서문경은 홍화연의 정론에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내가 쓴 비급은 봤어?”
“봤어요. 너무 대단해서 질투가 날 정도였죠.”
“뭐 궁금한 건 없고?”
“서둘러 말을 돌리는 게 좀 애처롭네요.”
“……아, 그래. 일단 여기까지 왔는데 간식이나 먹고 가.”
서문경은 홍화연의 손목을 거처 안으로 잡아끌었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홍화연이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성하민의 시선이 좋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화연이가 괜히 홍가에서 안 좋은 소리라도 떠들었다간…….’
그 괄괄한 가문이라면 가주가 고수들을 대동해서 찾아오겠지.
서문경의 안색이 한순간 핼쑥해졌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외공의 고수들이 우루루 찾아와서 따지는 건 기피하고 싶었다.
“그, 어르신들껜 잘 이야기해 줘. 절대 아니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화연아!”
“……쿡쿡.”
드디어 약점을 하나 잡았다는 듯, 홍화연이 쿡쿡 웃었다.
그에 비해 성하민은 입술을 삐쭉거리고 있어서, 서문경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설마 절대 아니라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나?’
대체 어떻게 말해야 이 상황을 유연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느 쪽도 정답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저 두 여자 사이에서 얻어맞을 수밖에.
서문경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 * *
며칠 뒤.
서문세가에 속한 군관과 장병들에게 재정립한 가전무공을 보급했다.
“……전보다 어려운데?”
“하지만 봤잖아. 그놈이 백인장으로 올라간 거!”
전공과 성과로 이루어지던 평가에 무공의 성취를 추가했다.
처음에는 다른 군부나 황실에서 의문을 제기했지만, 마교가 곳곳에서 일으키는 환란을 보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현령의 곳간을 털자!”
“흉작에 고통 받는데 공납이 웬 말이냐!”
농민의 봉기.
배고픔을 참지 못한 화전민의 산적화.
이러한 움직임에 마교가 은근슬쩍 등을 떠밀고 있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북적과 남만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예. 왜구의 숫자도 늘었다고 합니다.”
“외적(外敵)놈들이 감히……!”
쿵!
황제의 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마교란 본래 한족이 용인할 수 없는 사교(邪敎)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그들의 뿌리가 외적들과 같았다.
요컨대 여러 시대에 걸쳐 한족과 대적했던 민족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놈들이 왜 천하를 불태우겠다는 건지 알겠군. 명나라의 천하를 불태우고, 사교로 점철된 새 천하를 세우겠다는 것이야.”
그건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황제는 주먹으로 보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대명의 천하에 혼란이 닥쳤으니 일천의 고수를 모아 짐에게 찾아오도록 무림에 명하여라.”
“…….”
“그 이름은 정의맹이라고 하겠다.”
전생에선 십수 년 뒤에야 만들어졌던 정의맹.
그 이름이 서문경의 노력으로 인해 일찍 창설되었으니.
천하대세가 격변하는 순간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