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85화 (83/250)

삼 년 (10)

직접 필사한 비급에 장군이 십수 명씩 붙어있는 광경이라.

그 필사자가 겨우 나이가 열넷인 소년이니, 무공과 동떨어진 서문세가의 가신이나 심부름꾼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게 일공자님의 무공을 베끼는 거라지?”

“허어…… 홍가에서 안타까워하겠구만.”

“약혼을 파기했던 여식의 재능도 뛰어나다지만 저 정도는 아니지.”

서문경이 강호로 떠나기 전에 약혼을 파기했던 홍화연.

그녀의 재능이 상상 이상이라는 소문이야 이미 강서에 진즉 퍼져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배움이 빠르다는 논지일뿐, 서문경처럼 가전무공 십팔반을 전부 뜯어고칠 만큼은 아니었다.

놓친 인연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다음 날이 오기도 전에 방문패 하나가 서문세가에 보내졌다.

“홍가에서 방문을 온다고?”

“예,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합니다.”

“그것 참…….”

서문경은 왠지 홍가가 껄끄러웠다.

아무래도 일방적으로 파혼하겠다는 말도 던진 마당인데다, 동년배인 성하민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모양새가 아닌가?

그것이 설령 선의로 비롯된 것이어도 보기에 나쁠 수 있다.

하물며 본래 약혼을 맺었던 가문이라면 더더욱.

‘이거 정말 욕먹어도 싼데.’

설마 홍화연까지 오진 않겠지?

서문경은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누가 군문의 여식 아니랄까봐 전투적이었고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혹시라도 성하민 때문에 자기와 파혼했다는 오해라도 했다간…….

‘아, 위험하네.’

적마와 싸울 때도 들지 않았던 오한이 등골을 스쳤다.

그나마 아버지나 노장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이 홍가의 빈객에게 오해를 살 만한 농담이라도 던졌다가는 사소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몸집을 키울 테니까.

어쩌면 가문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군관(軍官)이 의외로 좀팽이 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지…….’

가만히 넘어가면 안 될 일에는 호인처럼 웃으면서, 아주 사소한 일에 버럭 화를 낼 때가 있다.

전장에서 싸우다 보면 그런 괴벽(怪癖)이 생기기 마련이다.

항상 최전방에 서는 홍가라면 아마도 두세 개쯤은 있을 터.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 무사, 용건이 무엇인지 적혀 있었어?”

“이번 시연에서 펼친 비급을 공유하고 싶다고 합니다.”

주백경은 아무렇지 않게 강호의 금기를 내뱉었다.

무학의 공유.

강호에 있어 절대 꺼내선 안 될 이야기이며 목숨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군문끼리는 달랐다.

“서문과 홍가의 가전무공은 일부 상통하는 면이 있으니, 대명 수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대명 수호.

군관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제일의 철칙이 있는 한, 비전(祕傳) 같은 건 사치였다.

서문검법을 위시한 가전무공과 동공까지도 모든 가솔과 군병이 익히도록 허락하는 것이야말로 군력(軍力)의 증강.

그 정신이 대명의 영토를 지켜 왔지만, 이번에는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사실 이번 시연의 중심은 공명결인데…… 홍가는 외공에 가깝잖아? 베껴 간다고 과연 쓸 수나 있을까?”

서문경이 괜히 공명결을 서문동공의 비전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었다.

설산과 사막, 밀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치우쳐진 중단전의 단련.

가히 고행에 가까울 정도의 수행이 있어야만 공명결을 펼쳐서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었다.

그걸 홍가에게 보여 줬다간 높은 가지에 있는 과실이나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실망시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주백경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홍가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익히지 못하는 것까지 신경 써 줄 이유는 없습니다.”

“……너, 갑자기 나랑 비슷해진다?”

“하하.”

그 말에 주백경이 뒷머리를 긁었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서문경을 모방하듯 서문검법을 펼쳤으니까.

모방의 여파가 남아있는 걸 들킨 것 같아서 쑥쓰러웠다.

“그야, 음. 공자님이랑 함께 다니다 보면 저 같은 사람도 불량해지지 않겠습니까?”

“장본인 앞에서 불량이라니…… 혼나고 싶으냐?”

“아직 내상이 낫지도 않았습니다!”

주백경은 질색하며 손사래 치다가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공자님, 며칠 전에 성 소저와 비무하고 되게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검법에 새로운 덧붙일 실마리를 얻었다고요.”

“……그랬지.”

“근데 시연 직전까지도 고민하시다가 멈췄었지요. 왜 그러셨던 겁니까?”

그 말에 서문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성락구검.

성하민이 스스로 창안한 검법은 가히 완벽했다.

시연 중에 일어났던 고요함이나 무결(無缺)한 일격은 그녀의 초식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지만 검법에 덧붙이진 못하였으니.

“주 무사의 실력이 너무 많이 늘었어. 그런 것도 알아보고.”

“제가 눈치 없이 물어본 거라면…….”

“아니야, 한번쯤 말하고 가는 게 맞겠지. 너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주백경이라면 한 번쯤 밝히고 가는 게 나으리라.

서문경은 잠시 눈을 감고는 성하민과의 비무와 무공사전에 수집한 성락구검을 수련했던 때를 떠올렸다.

“하민이가 익힌 검법은 어딜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기이할 정도로 빈틈없이 잘 맞물려 있어서, 다른 검법에 덧붙일 견본감이 아니야. 요컨대 작품에 가까운 검법이라는 거지.”

검법이란 요컨대 적의 의표를 찔러 죽이는 수단이다.

지금까지 서문경이 봐온 검법이란 대부분 그랬다.

도문의 검법도 결국 살기가 짙지 않을 뿐이라면, 성락구검은 애초에 적의 의표를 찌른다는 점이 없었다.

“이렇게 휘두르면 죽겠지, 이러면 못 막겠지…… 이런 망상 따위가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이건 무학이나 뭣도 아니야.”

무공사전으로 성락구검을 수련하다가 문득,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천마.

십만대산을 평정한 마인이자 무예십팔반을 완성한 무인.

그놈은 일권으로 소림사를 멸문시켰으며 정종의 무가를 각기 다른 무기로 꺾었다.

그야말로 신화경.

전인미답의 경지에 다다른 괴물에게 느꼈던 인상을 성락구검에서 떠올렸으니.

“아마 우리가 하민이를 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그냥.”

“뭐, 그거야. 마인에게 붙잡혀서 몹쓸 일을 당했겠지요.”

주백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쳤다.

하지만 성락구검을 무공사전으로 배우려했던 서문경에겐 사뭇 달랐다.

‘……어쩌면.’

마교는 아이들을 납치하려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성하민을 노렸던 게 아닐까?

그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판을 키운 거라면 어떨까?

마인이 성급하게 천무학관 시험장에서 나타난 것과 적마가 직접 동정호에 나타난 이유까지 명쾌하게 설명된다.

서문경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만약 하민이가 마교와 연관돼 있다면 지금 캐묻는 게 좋을까?”

“으음.”

잠시 고민하던 주백경이 또렷한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시간을 들여서 지켜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예.”

짧은 문답에 생략된 말이 많았다.

사천성에 있었던 소란이 아직 백 일도 지나지 않았고, 경계심이 강한 성하민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듣기로 어려울 것이라는 말들.

그러나 그 이전에 주백경의 선의와 도리가 존재했다.

“그 아이도 마교가 일으킬 학살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그걸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곁에서 지켜보고 있지요. 그러니까…….”

“때가 되면 말할 것이다?”

“예.”

그 말에 서문경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참,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과 똑같네. 물론 주 무사처럼 선의가 아니라 양민을 핍박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지만.”

“공자님과 의견이 같다니, 이건 좋군요.”

서문경과 주백경은 서로를 보며 클클 웃었다.

* * *

다음날.

홍가의 명판이 달린 마차가 서문세가 정문을 통과했다.

방문자는 홍화연 외 다섯 명.

정문에서부터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릴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워낙 성정이 급한 가문인지라 그들에게 무례를 논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정문에 있던 사람 중에는 그러했지만.

“너희들, 뭐 하냐?”

병영에서 죽치고 있던 중년인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심심한 차에 잘 걸렸단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군문의 고수 중에서 제일 엮이면 안 될 남자였다.

그를 본 고수들이 일거에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수그렸다.

“서, 서문패 장군님…….”

“남의 집에 들러서 그렇게 ‘나 여기 왔소’ 하고 자랑하고 싶었냐? 응? 진짜로 한 번 싸워 줘?”

“그게 아니라…… 오면서 듣기로는……”

“뭘 들어, 뭘?”

“그으…… 일공자가 파혼한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하민이가 왜? 뭐 어쨌다고?”

“그으게…… 법도 이전에 예가…….”

“약혼이 무슨 백년가약이냐? 파혼했으면 끝인 일에 자존심 좀 부려 보겠다?”

서문패는 실실 웃으며 홍가에서 온 고수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완전히 하수를 대하는 행동이었으나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강서의 군문.

아니, 천하의 군문 중 제일고수라고 불리는 이 괴걸(怪傑).

서문패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걸어서 나가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난처한 상황에 처한 고수들 중 하나가 홍화연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도, 도와주십시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홍화연이 마차에서 내렸다.

“패 삼촌, 이쯤에서 봐주시면 안 될까요?”

“오…… 화연이냐?”

서문패가 크게 반색하며 홍화연을 반겼다.

아무래도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성정을 가진 둘이기에 약혼을 유지하는 동안 친분을 쌓아 둔 터였다.

하물며 서문패는 유독 어린아이에게 약했다.

“네 체면을 세우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네가 말렸어야지?”

“죄송해요 삼촌.”

만약 홍화연이 어른이었다면 저렇게 다정다감한 어조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홍화연은 자신의 나이가 어린 것을 참으로 감사히 여겼다.

‘어른이 되기 전에 저 삼촌보다 강해져야 할 텐데.’

얼핏 듣기로 서문경이 서문패와 비견될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지 않았나?

홍화연은 그 소문을 듣고 열의를 불태웠다.

“그런데요, 경이가 새롭게 썼다는 비급이 그렇게 뛰어난가요?”

“뛰어나지. 내가 바쁘지만 않았어도 시연을 보러 갔을 텐데 참으로 아쉬워.”

그 시연을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장군이 어디 한둘인가?

칭찬이라곤 평생 하지도 않은 인색한 노장조차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니.

서문패에겐 올해 중 가장 큰 후회로 남았다.

“훈련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갔어야 했는데…….”

“저지르게 되는 죄가 한둘이 아닌데요?”

“뭐 어때. 가주가 내 형님인걸.”

“…….”

홍화연으로선 할 말이 없었지만,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기에 피식 웃었다.

“삼촌께서 저를 안내해 주시겠어요?”

“나 비싼 몸이야?”

“홍가의 귀한 여식을 안내할 기회예요.”

“맞는 말이긴 하네.”

서문패가 큭큭 웃으며 홍화연의 왼손을 붙잡았다.

그리고서 쾌활한 콧소리를 흘리면서 걸어가니.

“…….”

“……허.”

본래 홍화연의 호위를 위해 왔던 고수들이 헛웃음을 터트리곤 두 명을 뒤따라갔다.

서문경이 썼다는 가전무공의 개량본.

그 비급이 얼마나 대단한지, 배울 점이 무엇인지 보고 홍가주에게 보고해야 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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