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84화 (82/250)

삼 년 (9)

두 검객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돌로 만들어진 구령대 중앙에 발자국이 남았다.

진흙을 밟고 지나간 듯한 광경이었다.

다만 그 외에 소리가 없었다.

두 검이 부딪쳤으니 반드시 나야 할 불똥이나 찰음, 심지어는 파공성까지도.

서문경과 주백경의 위치가 달라진 것과 발자국을 제외하면 부딪쳤다는 사실마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광경에 시연을 지켜보던 장군들이 의아해하던 와중이었다.

쩌적!

주백경의 검에 실금이 일어났다.

아주 자그마한 균열이 초여름의 바람과 부딪쳐서, 스스로 크기를 키워 나갔다.

쩌적, 스르륵…….

수십에서 수백으로 조각 난 쇳조각이 구령대로 우수수 떨어졌다.

구령대에 떨어진 쇳조각 위로 주백경의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찍이 조각 난 파편이 그렇듯, 주백경도 입가에서 한 됫박이나 되는 핏물을 흘렸다.

구령대와 쇳조각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발치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주백경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입니다.”

단 한 번의 교차.

마지막 일합(一合)을 복기하던 장군들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기에 저런 내상을 입고도?’

‘개선점을 깨달은 건가?’

젊은 나이에 눈부신 발전을 이룬 주백경이라면 초식을 보완할 점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대감은 일거에 사라졌다.

“반칙입니다, 공자님…… 적마 역할을 맡으시지 않았습니까?”

“…….”

서문세가 대사(大史)에 남을 시연의 끝을 장식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투정이었다.

장군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가, 구령대에 있는 두 무인을 향해 예를 표했다.

서문세가 가전무공, 십팔반(十八般).

전장에서 태어나 적의 목숨을 쟁취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무학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다 준 젊은이를 향한 예우이자 존경이었다.

* * *

가주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왔던 자리가 일생 동안 잊지 못할 연무극(硏武劇)이 될 줄이야.

본래 전선으로 곧바로 떠나려던 장군들이 하루의 시간을 뺐다.

“헛바람 든 애새끼 놀음인 줄 알았건만…….”

“어느 하나 빼놓을 게 없어. 특히 창법과 검법, 동공의 변화는 괄목할 정도야.”

처음에는 서문경에게 한심한 눈빛을 던졌던 장군들이 비급의 필사본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 시선이 몹시 초롱초롱하여 중년이나 노년이 아닌, 소년의 눈망울을 보는 듯했다.

그중엔 서문경에게 사과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미안하네.”

“처음엔 좀…… 자네 나이를 듣고 의심했거든. 망나니란 소문도 들었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천인장이 대부분 저러했다.

아직 전장의 때가 묻지 않아서 뻔뻔하지가 못했다.

구령대 아래서 자기가 한 말을 혹시나 들었을까 봐, 나중에 큰 인물이 될 서문경에게 사죄 겸 아첨을 던지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년에 가까운 장군은 철면피였다.

“시연 잘 봤네. 근데 우리가 이걸 직접 베껴야 하나?”

“미리 가솔을 시켜서 권수를 충분히 준비하지…… 아쉽구먼.”

전장을 유지하는 수많은 전선.

그걸 총괄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사소한 실수쯤은 대범하게 넘기는 법이었다.

물론, 서문경도 이해하는 바였다.

‘나라도 이게 뭔 개짓거린가 했겠지.’

한 번의 인생, 그 절반 이상을 마교와 싸웠으니까.

마교는 짙은 안개와 같아서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싸워야 했다.

때로는 아군을 적으로 오인해서 죽이고 자결하거나 전장을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대부분 무림인이 그러했다.

그러니, 서문경에겐 나이가 어린 천인장보단 저렇게 뻔뻔하고 경험이 많은 노장의 존재가 기꺼웠다.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허.”

“알았으면 됐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노장들의 내면에 큰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린 나이에 뛰어난 경지를 이루었다.

자연히 자존심이 강할 줄 알았고, 자기들을 무시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선을 가르려고 했는데…….

‘저렇게 나오니까 내 대처가 오히려 어리석어졌군.’

‘속 좁은 놈이 되어 버렸어. 쯧. 나도 이제 너무 늙었나?’

어린 나이에 심기체가 균형을 이룬 채 안정되어있다.

노장들은 서문경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았다.

바로 석년(昔年)의 서문이현이 저랬다.

글로 읽은 전략을 남만의 전장에서 펼쳤던 장군이자, 서문패라는 보검을 방탕함에 빠지지 않게 잘 닦아 온 소가주.

노장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호부호자라. 제 아비만큼이나 뛰어난 아들일세.”

“거참, 이현 그놈도 이런 아들을 두었으면 자랑이나 할 것이지…… 자기 일 바쁘다고 안부 편지 하나 보내질 않으니!”

대놓고 말하는가 하면 은근히 돌려서 말하는 노장도 있었다.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예를 표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전생에선 한 걸음도 물러날 줄을 몰라서 어색한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렇게 편해지게 될 줄이야.

서문이현과 함께 자신을 도와줄 아군이 되면 가장 좋은 사람들.

저들이 바로 서문세가에서 오랫동안 충성한 노장이요, 황실과 군부에서 올지도 모를 압박을 막아 줄 노신(老臣)이었다.

‘전생에선 그걸 알고도 내 자존심 때문에 고집을 피웠으니……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 아니, 달라져야 해.’

마교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목하거나 거리를 두는 일 없이 힘을 합해야 한다.

서문경은 노장들에게 농담이나 전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가전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동공 말이다. 주 무사가 펼쳤던 그 위태한 힘…… 어떤 원리더냐?”

‘본제가 이거였군.’

처음부터 궁금했던 걸 묻지, 왜 저렇게 돌아서 가는지.

서문경은 속으로 불만을 숨기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이름 붙이기로 공명결이라고 하는데…….”

설명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서문동공에 복잡한 무학을 덧붙여 봐야 제대로 쓰지 못하니까.

미리 준비했던 대로 짤막하게 요점만 말하자, 노장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을 걸 알고 있었나?”

“예.”

“허, 일다경쯤은 가만히 들을 생각이었는데 겨우 몇 마디 안에 정리가 되는군. 준비가 일품이야. 비급으로 투덜거렸던 건 그저 산중의 나무 한 그루였어.”

“그래서…… 어떻습니까?”

“허, 어떤지 곧바로 답하라니. 이건 좀 급하구만 그래.”

이제야 서문경이 괴물이 아니라 소년처럼 보인다.

노장들은 안심이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이 쓰기엔 험한 방식이야. 중단전뿐만 아니라 혈맥, 기맥이 모두 강건한 사람이어야겠지.”

“예, 맞습니다.”

“그 수는 서문세가 전체를 되짚어도 적지 않을 거야. 맞나?”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략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겠지요.”

“……그 숫자가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노장들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저 질문에서 몇 가지 의도가 읽혔기에, 서문경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림도 없지요.”

“왜 그리 생각하나?”

“대명의 천하가 이리도 광대한데 어찌 서른 명 정도로 마교를 적기에 막겠습니까? 어르신들도 알다시피 수십에서 백 년을 족히 준비했을 놈들이니, 벽지에 보급처와 은신처를 준비했겠지요.”

전생에서 이미 경험해 본 바와 소가주로서 배웠던 전략적 시각.

그 모두를 종합하여 즉석에서 말했다.

노장 하나가 침음을 흘렸다.

“……음. 그럼 공명결은 소수의 고수를 위한 구결이란 말인가?”

“소수는 아닙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군. 그래, 이유를 들어 볼 수 있겠는가?”

“백 일.”

서문경은 어깨를 쭉 폈다.

노장들의 의심이나 반론을 사전에 지우려면 최대한 호언장담하듯 말하는 게 좋으니까.

목소리에 공력을 슬그머니 담아, 소년의 목소리를 사내처럼 다듬었다.

“제가 주 무사와 함께 강호를 돌아다닌 시간입니다. 주 무사가 노력하긴 했지만, 다른 병사나 장군들도 노력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한 겁니다.”

“……일공자 말대로라면 공명결을 펼칠 고수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렷다.”

호칭이 바뀌었다.

재능이 뛰어난 손자를 대하듯 하던 말씨가 냉정해졌다.

전선을 유지하는 장군이 지도를 보며 죽일 숫자와 죽게 만들 숫자를 정할 때 저러할 것이다.

서문경은 반석처럼 변한 노장들과 마주했다.

“제가 주 무사와 함께 다니며 시킨 동공의 훈련법이 있습니다.”

“왜 그걸 진즉에 말하지 않았나? 가주를 통해서 모든 전선에 시행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반문하는 목소리에 작은 원망이 담겼다.

좋은 훈련법이 있었다면 전선에서 죽는 숫자가 줄어들었으리란 한탄이리라.

서문경은 그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건조하게 말했다.

“본가에 마교의 간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노장들의 눈꼬리가 팔자로 휘었다.

겨우 열네 살의 소년이 저런 의심암귀 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람이 컸다.

그 반응을 알아차린 서문경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무가나 문파에 비하자면 서문세가는 서문의 성씨를 가지지 않더라도 입문할 수 있는 군문이므로,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요.”

“과연, 일리가 있군.”

청년부터 밀림에서 전장을 헤쳐 나가던 서문이현의 조언이라면 믿을 수 있다.

노장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문경은 본제로 들어갔다.

“앞으로 삼 년. 그 시간이면 서른 명을 열 배인 삼백 명으로 늘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운 사람과 요령이 늘어나니 가속하겠지요.”

“자네 호위는 백 일이고 다른 사람은 삼 년이란 말인가?”

“이거야 원…… 그자만 편애하나?”

노장들의 농담에 서문경은 잠시 피식 웃었다.

주백경이 저런 성취를 이루었는데 다른 사람도 가능할 거란 관측이 언뜻 보였다.

하지만 서문경의 생각은 달랐다.

“……죄송하지만 집념이 다릅니다.”

“무슨 말인가?”

“주 무사가 저렇게 빠르게, 그리고 눈부신 성장을 보인 건 강호에서 있었던 수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전선의 상황도 분명 위협적이겠지만, 저와 주 무사가 겪은 건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 말을 마치고 나서야 서문경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래서야 전생에서 있었던 일의 반복이지 않나?

한순간 욱하여 노장들에게 따지듯 말해 버렸으니, 분명 언짢은 표정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노장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 뭐, 그렇긴 하지.”

“수로채의 배를 타고 사천성에 돌아왔다지? 그 외눈깔 놈한테 공손한 말을 들으면서…… 큭큭.”

“부두에서 적마란 놈과 싸운 건 무리였어. 내 손자였으면 매를 들었을 걸세.”

순순히 인정했다.

시연을 보러오기 전부터 서문경이 겪은 일에 대해서 많이 조사한 기색이었다.

서문경의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마치 저런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본 노장들이 껄껄 웃었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젊은 몇 놈이야 구령대에서도 애새끼니 괜히 왔다느니 했지만,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야 알지. 자네가 강호에서 무슨 짓을 해댔는지.”

“클클…… 아직은 애구만, 애야.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걸세.”

서문경의 표정이 풀어질 때까지 농담을 던지던 노장들은 한순간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소가주에서 내려갔다고 한들, 한때 망나니란 소리를 들었어도 말이야. 서문세가의 일원일세.”

“……!”

어디에서 들었던 말이던가?

서문경은 이미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임을 직감했다.

떠올리는 거야 금방이었다.

“그건…… 아버지께서.”

그 말에 노장들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다시 클클 웃어댔다.

“이현이가 그런 말을 하던가?”

“다- 우리에게 들은 이야기지. 끌끌.”

“남만에서 혼자서 싸우는 사람처럼 분투할 때 조언한 게 그거였지. 너만의 싸움이 아니다, 서문세가의 일이기도 하다. 그걸 여태 기억하다가 자기 아들한테 써먹다니……! 술이나 얻어먹어야겠어.”

노장들은 술을 대작한 것처럼 벌게진 얼굴로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그 얼굴에는 자긍심과 뿌듯함이 있었다.

서문이현과 서문경, 이대(二代).

두 부자가 이리도 건실하게 자라났음을.

성장을 지켜보는 장본인이 되었음을.

“앞으로 무슨 어려움이 생기면 말해. 가문의 어른으로서,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서문경은 석양을 등진 채 예를 취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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