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83화 (81/250)

삼 년 (8)

시연에서 보여 준 방패술, 쌍수도법은 서문경이 보거나 수집한 무공에서 몇 가지를 따오거나 덧붙이는 것에 그쳤다.

무연창을 가미한 서문창법이야 장군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지만, 딱 그 정도.

무리도 아니다.

무공사전으로 수집한 무공은 대부분은 내가기공이거나 검법.

아무리 무학을 해체하여 뜯어고친다고 해도 몸이 맞질 않는다.

요컨대 체질의 문제였다.

하지만 검법은 어떠한가?

서문검법이 내포하는 여섯 초식.

각각에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무공을 제멋대로 뒤섞어서, 어딘가 불안정할지언정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기량의 검객이라면…….

‘그 역할은 내가 아니라 공자님이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주백경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시연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어제부터 서문경과 주백경은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돋보이기 위한 주인공과 초식을 받아 내는 조연.

당연히 가전무공을 새롭게 정돈하거나 창안한 서문경이 주인공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오늘의 시연은 서문경이 아니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주백경은 주인을 따라서 강호를 떠돈 것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수로채나 적마와 싸우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역할은 서문경이 모두 해냈다.

보검(寶劍) 끄트머리에 묶는 수실이나 칼집 정도.

딱 그 정도가 자신의 위치라고, 아직은 서문경에 비해 기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얼떨결에, 시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단 말이지.’

본래 주인공이었던 서문경이 적마를 가장한 조연이 되었다.

적마의 마공처럼 강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러서 동정호 부두에서 있었던 처참한 방어전을 재현하게 만들 생각이다.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적혈마공의 사기(邪氣)에 상처 입었던 팔뚝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날로부터 얼마나 긴 휴식이었던가?

얼마나 침통해했던가, 어떻게 싸워야 했을지 복기했던가?

그 집념을 수면 아래에서 퍼 올리는 순간이었다.

-이제야 진정된 거냐?

서문경의 전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찰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주백경의 머릿속이나 정신이 전례 없이 맑았다.

‘공명결을 펼칠 때면 마음이 진정이 안 되고 성급했었는데.’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서문경에게 추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만큼 공명결은 강한 힘을 끌어내는 만큼 거짓된 전능감을 떠올리게 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하아.”

주백경의 숨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초여름.

따스하기만 하던 봄이 지나가고, 만인이 옷을 한 꺼풀 벗기 시작하는 계절.

꽃봉오리가 무르익는 시간 속에서 주백경 혼자만 차가운 겨울을 맞이한 것 같았다.

‘……추워.’

공력의 파문이 온몸을 두들겨서 체열이 올라간 걸까?

서문경이 처음 보여 줬을 때와 똑같았다.

핏줄과 힘줄이 거세게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쿵, 쿵……!

파문이 삼단전과 대맥을 두드리고 세맥까지 다다르는 일순(一巡)마다 두 눈이 크게 뜨이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몹시 불안했다.

살얼음판을 맨발로 걷는 것처럼 언제 극심한 내상을 입거나 주화입마에 다다를지 몰랐다.

당장 주백경의 전신에 엄습한 오한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코피는 흐르지 않아.’

공명결의 창안자인 서문경마저도 처음 펼쳤을 때 코피를 줄줄 흘렸어야만 했다.

하나 지금의 주백경은 출혈하지 않았다.

공력의 파문이 전신 내부를 두드리는 충격을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균형이 언제 깨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무해했다.

그러니까.

“비검절우.”

서문검법의 일초식을 입에 담았다.

장군들이 들을 수 있도록 공명결의 진기를 담아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주백경은 서문경이 폭력적으로 휘두르는 강기와 마주해야 했다.

‘……상냥하시군.’

공명결을 통제하기 전까지 사정을 봐주었다가 다짜고짜 기습이라.

주백경은 입술을 비틀었다.

머릿속에서 주군과 호위라는 개념을 지웠다.

그 대신 시야에 서문경 대신 적마를 새겼다.

그러지 않고서야 최선을 다할 수 없으니까.

주백경이 품은 고집이나 신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외골수였다.

그걸 반대로 말하자면 마음껏 살초를 휘둘러도 되는 적수라면…… 북적이나 남만, 혹은 마인이라면 전심(專心)을 다할 수 있다.

……스극.

주백경이 쥔 검이 강기를 부드럽게 갈랐다.

비검절우, 내리는 비마저 자르는 쾌검에 한줄기 열기가 담겨있었다.

서문경은 이를 두고 또 다른 이름을 붙였다.

“백열(白熱).”

번천광검결과 천무학관에서 비무한 무인들의 무공을 참고했다고 했던가?

쾌검 속에 핏물마저 증발시키는 염열(炎熱)이 있었다.

아직 초여름임에도 아지랑이가 두 무인 사이에서 피어오를 정도였다.

“…….”

“……허.”

새롭게 정돈한 서문창법이 개량이나 발전이라면 서문검법은 일초식만 보아도 진화.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사라진 신비문파의 열양장과 닮아 있다.

그러는 사이에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도달해 봐라.”

적마를 흉내내듯 희미하게 웃었다.

저번처럼 방어만 하다가 쓰러지는 게 아니라, 가까이 와보라는 도발을 던졌다.

그건 회귀자로서 품은 희망이기도 했다.

적마 본인이 아니라 따라하는 정도마저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있을 싸움에 전력으로 쓸 수 없다.

그 희망은 주백경에게 있어 회한으로, 집념으로, 분노로 변화하니.

“오냐.”

주백경답지 않게 험한 어조로 내뱉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서문경의 말버릇과 닮아 있었다.

자기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내.

하물며 서문검법을 뜯어고친 장본인이기에, 내심 원초(原初)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방한다.

원초와 대등한 선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서문경을 모방하여 의도를 샅샅이 긁어 내는 수밖에 없다.

“가까이 다가가서, 베어 주마.”

주백경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구령대를 넘어서 시연을 지켜보는 장군들에게까지 훤히 들렸다.

……꽈악.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말 정도로 강한 집념과 적의.

서문경이 아니라 정말로 적마와 싸우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주백경의 의지는 굳건하고 순수했다.

“일검적심, 천경(穿經).”

순식간에 펼쳐진 서문검법의 이 초식.

주백경은 서문경에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칼을 앞으로 내질렀다.

“……?”

“뭐지?”

이해가 불가능한 광경.

자기가 아는 일검적심엔 강호의 무공처럼 거리를 격하여 통(通)하는 검격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그러했을 텐데.

쩌적!

닿는다.

사술이라도 쓴 것처럼 서문경의 호신강기에 둔중한 충격이 후려갈겨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음.”

서문경은 얕은 내상을 입고 뒤로 물러섰다.

역시 적마처럼 무식하게 강기의 막을 펼치기란 부족했다.

적어도 이 갑자 이상.

백 년 이상 공력을 쌓아서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괴(老怪)가 아니면 호신강기 따위는 비효율의 극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일검적심을 개량한 천경의 초식은 호신강기에도 통한다는 뜻이었다.

‘검치의 번천광검결, 역시 검보라고 부를 만해.’

번결, 천결, 광결.

삼단전으로 펼치는 세 초식의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그중 중단전으로 펼치는 천결은 서문세가의 무공과 걸맞았다.

무지막지하게 단련한 호흡으로 펼치는 동시 이타(二打)는 폭발적이라는 단어와 걸맞았으니까.

‘거리가 조금 멀어서, 검이 닿지 않더라도 검기로 연장할 수 있는 기량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해.’

이른 바 경지(境地)라고 부를 수 있는 기량.

검기로 상대의 육체를 해할 수준이라면 일검적심의 검로에 연장할 수 있었다.

서문경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주 무사의 검기가 이 정도였나…….’

미약하지만 호신강기를 꿰뚫고 내상이 치달을 정도의 강격.

사천성에서 막 출발했을 때의 이류 검사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서문경이 마주한 것은 짧은 시간 동안 경지에 도달한 검사.

검기로 상대를 죽이고도 남을 고수.

주백경이 다시 자세를 갖추고서 달려들었다.

“흡족하다, 흡족해.”

서문경은 감탄성을 흘리고서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반죽을 주무르듯 손가락으로 유형화한 강기를 매만졌다.

이 광경은 서문경의 기억속에 새겨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마가 유형화해서 휘두르던 창.

“적영창.”

주백경의 입술에서 적마의 성명절기가 흘러나왔다.

그 역시도 잊지 못했다.

계속 방어만 하다가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던 무력감이 후회와 집념을 일으켰을 것이다.

과연 이번에는 막을 수 있을까?

“흐흐.”

서문경은 너저분하게 웃었다.

악한(惡漢)을 넘어서 남의 피를 탐하는 마귀, 적마처럼.

쩌적!

강기를 의념으로 빚어낸 창.

그 창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나선, 무형의 신장(神將)이 휘두른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

주백경의 인상이 일그러졌지만 반응은 늦지 않았다.

깊은 후회로 점철된 복기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었다.

본능과 계산이 반반 섞인 대응이란, 역시.

뼈와 정신을 깎아 가며 벼린 칼이었다.

“번검유회, 구천행(九天行).”

양어깨가 한순간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위로 올라갔다.

한손검이 아니라 대검을 억지로 치켜든 모양새라, 장군들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저래서야…….”

유연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한 번은 막아 내도 다음은 반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떠올리던 찰나에 주백경이 느리게 움직였다.

스르륵.

허공에 나타났던 창이 풍차 돌아가듯 원을 그렸다.

그 방향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눈썰미가 뛰어난 장군 몇몇이 호성을 터트렸다.

“허!”

“저건 분명……!”

태극.

짧은 역사를 지닌 무당파가 순식간에 구파일방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만든 지고의 무학.

그 원리가 주백경의 칼에 담겨 있었다.

비록 원본에 비해 투박해도, 투박하기에 가지는 강점이 있으니까.

챙강!

무당파라면 지면에 꽂히게 했을 태극이, 주백경의 손에서는 적의 숨통을 노리는 역공이 된다.

주백경은 창이 끝까지 날아가는 걸 보지도 않고 서문경에게 뛰어들었다.

“……닿는다, 도달한다.”

애초에 구령대는 여느 비무창처럼 넓지 않다.

앞으로 두세 걸음.

겨우 그 걸음을 아직도 좁히지 못한 채로 있었다.

그만큼 서문경의 경지는 고수가 된 주백경마저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높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몸에 맞지도 않는 적마의 마공을 따라하는 서문경과 가전무공을 마음껏 휘두르는 주백경.

그 차이가 도달하지 못하던 걸음을 좁히게 했다.

“……서풍광아.”

주백경은 초식명을 입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번천광검결과 매화검법, 창궁무애검법까지 뒤섞었다고 하던 절초.

쑥스럽게 웃으며 덧붙은 이름은 바로.

“벽검(劈劍).”

무공에 흔히 붙곤 하는 휘황찬란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저 쪼갤 뿐이라고 해서 벽(劈).

군문의 남자다운 작명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단순해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위력은 사뭇 다르다.

꽈르르릉……!

검기에 휘감기는 강기.

주백경이 처음으로 펼친 검강에 서문경의 얼굴에 웃음이 지워졌다.

“하, 이거 참.”

서문경은 적마 역할을 하던 걸 집어치웠다.

새로운 초식을 만들고 작명한 입장에서 저런 걸 보고, 남 흉내나 내는 건 불가능했다.

“훌륭하다. 주 무사.”

진심을 담아서 말하곤 검을 쥐었다.

시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역시 똑바로 마주하는 것.

검 대 검.

무인 대 무인.

또한, 같은 가전무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청운적하.”

서문경의 입술에서 새로운 초식명이 비집어 나왔다.

“천검(天劍).”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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