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7)
며칠 뒤.
서문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백경에게 물었다.
“오늘 어때 보여?”
“멋지십니다.”
“상투적인 말 말고.”
“적어도 긴장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으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툭툭.
서문경은 손으로 주백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크게 긴장했는지,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무리는 아니다.
강서 전역에 있던 서문세가 소속의 장군이 모두 모여…….
“뭐, 이렇게 됐지만. 크게 긴장하지 마. 주 무사.”
어린 소가주가 손 보았다는 가전무공을 지켜볼 자리였으니까.
서문경의 시선이 구령대 아래로 향했다.
수많은 상처를 간직한 얼굴과 철갑.
대명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 온갖 외적과 싸우는 장군들이 무심한 얼굴로 서문경과 주백경을 지켜보았다.
물론, 모두가 무심하진 않았다.
갑자기 전선에서 이탈하게 되어 심통이 잔뜩 난 중년인이나 노장도 있었다.
“천무신동? 흥…… 무림에서 수많은 왕이나 신검을 보았는데 딱히 대단하지도 않더구만.”
“가주님께서 아무래도 아드님을 아끼는 모양이군. 스스로 소가주에게 내려간 천덕꾸러기인데 말이야.”
작게 속삭여도 서문경의 귓가엔 똑똑히 들린다.
전생에서도 저런 말을 비슷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과 자기 호위를 사지에 버려두고서 도망쳤다고, 장군의 재목이 아니라고.
오랫동안 의심 어린 눈총을 받아야 했다.
개중에는 직계가 아니라 방계여도 능력만 있으면 가주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던 자가 있었다.
서문경은 과거를 되새김질하고는 주백경을 바라보았다.
구령대 아래에 모인 면면을 보고는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었기에, 다시 한번 조언했다.
“실력만 보여 주면 돼.”
“…….”
주백경은 창백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밤, 너무나도 긴장 돼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강서를 수호하는 장군이 모두 모여 자길 지켜본다는 사실이 부담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야말로 주백경이 빛을 발할 순간이다.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서문경과 주백경이 서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일부러 둔중한 발소리를 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것만으로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멎었다. 폭풍 속의 고요함이다.
이제 곧 두 무인이 변화한 가전무공을 보여 주리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몇몇은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어떨까…….”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이럴 시간에 주변을 정찰하거나 경계 부대를 시찰해야 하는데, 쯧.”
의심과 걱정, 그리고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짜증.
부정적인 감정과 마주하고도 서문경과 주백경의 호흡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열 걸음을 걷고서 제자리에 멈췄다.
스르릉…….
서문경이 검을 뽑았다.
가전무공을 증명하는 자리이기에 뽑는 순간마저도 예를 갖추어 천천히 공을 들였다.
그 시간에 맞춰서 주백경도 검을 뽑고서 등을 돌렸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찰나였고.
쩌엉!
호흡을 멈추어 땅을 박찼다.
돌로 만들어진 구령대가 한순간 뒤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으나, 기이하게도 서문경이 서 있던 동편(東偏)은 고요했다.
아예 지면에 땅을 대지 않은 것처럼.
그 차이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
주백경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기울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뒤덮어 바깥 종아리 근육인 비골근까지 압박했다.
어제 시연을 연습하며 언질 받지 않았다면 한쪽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를 힘이라.
눈썰미가 뛰어난 장군 몇몇이 입술을 달싹였다.
“……평범한 동공이 아니야.”
그 말대로, 서문경의 움직임에는 잡음이 없었다.
옷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없었다면 움직였다는 사실마저 의심했을 정도다.
하물며 저게 단순한 잡기(雜技)가 아니라 저런 힘을 싣고 있다니.
“제대로 봐야겠군.”
어린 소년의 흑역사 따위로 치부하고 있던 노년의 장군이 자세를 고쳤다.
그 와중에도 서문경과 주백경은 서로 검을 부딪치며 연신 불똥을 튀겼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서문경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면 주백경은 힘을 옆으로 흘리며 반격을 모색한다.
그것이 삼십 합을 넘어갔을 때쯤.
카강, 크그그긍……!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던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
“이런!”
주백경의 몸이 완전히 기울어지는 순간, 구령대 뒤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방패.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군문의 무장(武裝)이자 많은 무림인이 평가절하하는 병장기.
그 진가는 무당파가 자랑하는 태극과 비해도 모자르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검이나 창을 사용하는 무사라면.
카드드드득!
강대한 힘이 담긴 일격이 방패 겉면을 긁고 스친다.
단지 그뿐이라면 주백경의 방패술이 뛰어난 것에 그치겠으나, 뒤이은 초식이 있었다.
“저게 무슨…….”
중년의 장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수염을 매만졌다.
한순간 코피를 흘렸던 주백경이 히죽 웃고는 손목으로 기예를 부린 것이다.
마치 무림인이 말하는 화경(化境)을 펼치듯.
서문경의 검이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이건.”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뒤틀었다.
갑자기 이렇게 하는 건 예정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무공을 시연하는 자리이지, 전력을 다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물며 무영신투에게 직접 배운 기예라니?
화경의 솜씨가 말도 안 되게 늘었다.
자신이 직접 해도 저렇게 능수능란하지 못할 터였다.
……스르륵.
서문경의 검이 구령대를 긁었다.
돌로 만들어진 건물인데도 진흙을 가른 것처럼 고요하게 잘렸다.
그걸 알아차린 장군들이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소문이 맞을 때가 있군.”
“서문세가에 지복이 찾아온 것이야!”
처음에는 까탈스럽게 굴어도 서문경의 경지를 보고서 흡족한 모양이었다.
기준에 들지 못하면 까탈스럽게 굴 뿐이지, 아예 심성이 못된 노친네들은 아니었다.
문제는 갑자기 돌발 행동을 시작한 주백경이다.
서문경은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이런 예정은 없었잖아? 일단은 방패술로 흘리고 여러 가지 무공을 보여 줘야…….
-시연은 실전이라고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주백경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저 보여 주는 것보다 확실하게 보여 주는 편이 나을 겁니다. 저 양반들을 납득시켜려면요.
-……너,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소소한 복수기도 합니다. 공자님은 항상 저한테 이러셨잖아요.
이건 반쯤 본심이었다.
언제나 호위로서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늘 서문경에게 휘둘렸으니까.
주백경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터엉!
방패로 서문경을 강하게 밀어내고서 구령대 한쪽에 놓여 있던 창을 쥐었다.
“……자아, 갑니다.”
창을 쥔 손에 여유를 두었다.
검법이나 곤법이나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은 항상 강하게 휘둘러 적을 제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이 수정한 서문창법은 다르다.
강호의 무학을 덧붙여 만든 초식엔…… 부드러움과 강함이 공존한다.
-양 소저의 무공에서 조금 따오신 건 비밀로 하겠습니다.
-……시, 끄러.
서문경은 전음으로 투덜대고는 검을 내던졌다.
뒤이어 쌍수도(雙手刀)를 쥐었다.
마상(馬上)과 평지, 밀림 모두 유효한 무기로서 어찌 보면 서문검법보다 역사가 오래된 무기였다.
그걸 본 장군 몇몇이 자기들끼리 대화했다.
“창과 도라…… 당연히 창이 유리하겠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밀어낸 것 아니겠는가? 시연치고는 실전적이야.”
“그나저나 무공이 너무 뛰어나지 않나? 저 나이에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룬 건지 신기해.”
서문경을 우려스럽게 보던 시선은 사라졌다.
이제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서문세가에 속한 신진 고수로서 지켜보는 시선만이 가득했다.
쌍수도로 창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그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허.”
“이럴수가.”
서문경이 손 본 쌍수도법은 한층 더 강맹해지고 단단해졌다.
시연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시간을 내서 보러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법은 어떠한가?
“……저게 서문창법이라고?”
“마상보다는 대면하여 싸우는 방식에 적합해보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알던 서문창법과 확연히 다르다.
전장에서 다수를 한 번에 죽이기 위한 창법은 아니었다. 이 부분에선 주백경의 시연이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명에 찾아온 것은 대규모의 야만인이 아니다.
소수의 마도 고수.
천하에 스며든 마인과 싸워야 한다면 기존의 서문창법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장군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허, 강호로 떠나서 가져온 답이 이거였나?”
“이래서야 처음에 투덜거린 게 부끄러울 정도군.”
빈틈이 없는 유연함.
그 점이 주백경의 창에서 드러났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문경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던 그가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힘의 차이를 극복하는 기예와 전술.
그건 일선에 서서 장병을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있어 감명 깊은 모습이었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겠어.”
그렇게 장군들이 크게 만족하며 웃을 때였다.
투둥, 툭.
서문경과 주백경이 동시에 쌍수도와 창을 놓았다.
두 무기가 땅바닥에서 굴러다니자, 여러 의견이나 감탄을 내놓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에 다시 검을 들었다.
“다시 보여 주겠다고?”
“그러고 보면, 처음 일공자가 펼치던 검법은…… 특색이 없었지.”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검법.
서문검법이 지향하는 바였고 전장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호에 스며든 마교라는 적과 싸워야 한다.
그걸 직접 보여 주겠다는 듯, 서문경이 앞으로 걸어갔다.
‘일공자가 직접 펼치겠지?’
‘두 고수가 펼치는 서문검법이라…… 기대되는군!’
상반된 생각이 장군들 사이를 교차했으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쩌엉!
서문경은 짙게 웃으며 검을 내던졌다.
뒤이어 공력을 한껏 그러모아 상단전 의념으로 강기를 유형화했다.
그것만으로 장군들을 기함하게 만들 광경이었지만.
“제가 강호에서 보고 온 적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서문경의 말이 구령대에서 쩌렁쩌렁하게 퍼져 나갔다.
그 말에 주백경은 한순간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장난 좀 쳤다고 이렇게……?’
이러다간 전력을 다한 서문경과 싸워야 할 판국 아닌가!
마음을 졸이는 사이에 한 줄기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가 보여 줘.
-……예?
-새롭게 정돈된 서문검법을.
번천광검결, 매화검법, 창궁무애검법.
강호에서 일절이라 불리는 세 검법이 가미되어 새롭게 변모한 서문검법.
그 검으로 강대한 적과 어떻게 맞서길 보여 주어라.
서문경의 뜻을 그제야 이해한 주백경이 검을 다잡았다.
“……예. 제가 서문을 대신하여 보여 드리겠습니다.”
서문을 대신하여 보여 주겠다.
그 말의 무게가 주백경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물며 시연을 지켜보던 장군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서문을 대신하여 보여준다…….”
“과연 어떤지 볼까.”
수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서문경은 주백경에게 강기를 휘둘렀다.
동정호 부두에서 싸웠던 적마처럼.
쩌저적……!
강기가 검을 짓누르는 무게에 주백경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 자리, 그때에는…… 형편없이 막기만 했지만……!’
적마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이기는 사람이 되리라.
주백경은 설욕의 마음으로 공력을 그러모았다.
공명결의 파문이 전신을 두들겼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