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5)
언젠가.
모든 싸움이 끝나고 나면 자하진수의 진수로 다듬은 동공을 화산파에 가르쳐 주겠다.
참으로 오만한 소리였다.
다른 가문의 소년이 자하신공이라는 원류보다 우월한 무학을 개척했다는 뜻이니까.
‘누가 들으면 개소리 하지 말라고, 꾸짖거나 의심했겠지만.’
주백경은 의심 한 점 품고 있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서문경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다리면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사천성에서부터 호북성까지 이어졌던 여로(旅路).
일출과 석양을 눈으로 담으며 걸었다.
주백경의 동공과 호흡은 그 시간 동안 자강(自彊)했다.
무영신투가 괜히 제자로 들이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공자님과 함께 여로를 걷고, 강호를 경험하면서…… 밉거나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행동 자체가 올바르지 않을지언정, 서문경이 바라보는 곳에 올바른 대의가 있다고 믿었다.
누구도 대면하기 싫어하는 강적.
마교를 눈앞에 두고서도 물러선 적이 없는 서문경이었으니까.
‘대명…… 아니, 천하의 평화를 위해서도 공자님을 믿어야 한다.’
한때는 동경했다.
주백경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이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왜 나는 이렇게 고지식한 건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서문경처럼 유연한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천하에 서문경이 둘일 순 없다.
그저 닮고 싶어서, 동경한다는 이유로 그릇을 억지로 넓히는 건 천치나 하는 짓이었다.
‘내가 잘하는 건 처음부터 똑같았지.’
고지식하단 말을 들을지언정 뜻을 꺾지 않는 것.
서문경이라는 주군에게 칼자루를 건네는 것.
스스로 노력하여, 날이 녹슬지 않도록 연단하는 것.
주백경은 호흡을 계속해서 넓혔다.
세맥에 묵직한 무게감이 생길 때까지, 천하의 대기를 삼킬 듯이.
들숨으로 폐부를 채우고 혈류를 가속시켰다.
“……시작하십시오. 잘 듣고서 따르겠습니다.”
주백경의 목소리에 둔중한 음색이 깔렸다.
천하, 강호에 내노라하는 고수가 흘리는 기파가 호흡에 있었다.
동공 수련에 얼마나 깊은 정념을 바쳤는가.
그것만으로 주백경은 벽에 도전할 자격을 갖추었다.
아직 스스로 알지 못하지만, 오늘 서문경이 이끌어 줄 날이었다.
-자하신공은…… 한 그루 매화를 닮아 있어.
서문경은 비무장에서 집념을 발휘하던 연준호를 떠올렸다.
가벼운 날숨에도 자색의 분진(粉塵)이 연기처럼 흩날리던 광경.
자하신공으로 만들어진 꽃가루였다.
꽃가루가 대맥에서 수없이 흐드러지고, 흘러서, 호흡 너머로 넘쳐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화산 자체가 자하신공이고, 화산파 후기지수가 공유하는 심상이었던 거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화산파에 직접 방문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호북성에서 모든 정무를 처리하고 전장을 지휘했다.
정의맹이 발족했을 때, 이미 섬서성은 함락된 지 오래인 것이다.
하지만 연준호와 검을 섞으면서 알았다.
닿는 것만으로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던 자하의 숨결과 마주하며 상상하게 되었다.
-공명(共鳴)이다.
-……예?
-자하의 신공은 하단전에서 위로 밀어붙여, 계속 부딪치며 힘을 키운다. 꽃가루를 닮은 기운은 기맥을 두드려도 상처를 주지 않고 위로 나아가겠지. 연준호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유약한 몸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건 바로 그것 때문일 거야.
눈을 지긋이 감으면 자하신공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서문경에겐 생경한 경험이었다.
무공사전으로 수집한 건 분명 매화검법일 텐데, 어째서 자하신공의 진수까지 훔치게 된 걸까?
여러 무공을 수집하다가 무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상리에서 벗어난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갑자기 떠오른 감각을 놓치지 않고 싶을 뿐이었다.
-자하신공이 하단전에서 치솟아, 전신의 대맥을 바탕으로 한 공명의 신공이라면 서문세가의 동공 또한 마찬가지야. 자하신공과 다른 방향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설마.
주백경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사천성에서 막 출발했을 땐 뛰어난 수준의 무사에 불과했으나, 백 일 동안 서문경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서문경 또한 서문세가의 무공에 관해서는 어엿한 고수라고 자칭할 수 있었다.
-동공으로 단련한 공력을 자하신공처럼 공명시킨다는 겁니까?
자하신공의 진기는 분진처럼 자그마하고 부드럽기에 내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공력은 다르다.
전장에서 명맥이 이어진 동공이다.
지향하는 바만 따지자면 소림사와 비슷하다 볼 수 있었다.
그걸 자하신공처럼 다루겠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주백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수련이 부족하면 주화입마를 넘어서 즉사할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서문의 동공은 자하신공처럼 세밀하게 순행하지도 않으니…… 세맥에 다다를 겁니다.
세맥까지 완벽하게 갈고 닦지 않으면 자기 공력에 터지고 말 것이다.
주백경의 말에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알아.
-공자님의 무론(武論)대로라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겠지만, 본가 내에서 몇 명이나 가능하겠습니까?
-아마 극소수겠지. 백인장은커녕 천인장 이상, 장군의 위치에 있는 무인이어야 시도해 볼 만할 거야.
강서의 군부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세가에서도 장군은 많지 않았다.
중추에 있는 서문패를 포함하여 스물이나 될까?
오직 그들을 위한 동공은 가전무공의 시연회라는 취치에 맞지 않는다.
주백경이 무엇을 지적한 건지야 알았지만, 서문경의 눈빛은 냉정했다.
-애초에 그 수준이 아니면 마교의 칠로두와 대적할 자격조차 없어. 주 무사는 강호에 있던 시간 동안 그 자격을 얻은 거고.
-…….
-설마 다른 무사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수련했던 동공.
강자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악.
그 과정을 겪었기에 현재의 주백경이 있었다.
옥화산의 기연으로 먹은 영약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다른 무사들도 버텨 낼 수 있을까?
주백경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혹할 겁니다. 서문세가의 정예라도 정신력이 남아나지 않겠죠.
-그 가혹한 걸 우리 주 무사는 견뎠단 말이지. 대단해.
서문경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정말로 저 수준까지 성장해 줄지는 몰랐다.
중도에 호위를 그만두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날이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큰 보상을 주고자 했다.
“잘 봐, 이게 내가 고안한 동공이니까.”
서문세가의 동공.
그 중심이 되는 중단전에 칠 할의 공력이 집결했다.
자하신공과 비교하면 무척 투박하고 단단한 결정에 가깝다.
대맥에 부딪치면 내상을 입을 정도.
하지만 서문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 할의 공력으로 단련하지 못하는 맥의 이음새를 보호하고서. 천천히, 규칙적으로, 하지만 무르지 않게.”
서문세가의 보신경처럼.
중단전을 중심으로 공력을 천천히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공명시켰다.
대맥과 세맥을 가리지 않고, 그저 꽉 차게 두들겼다.
쿠궁, 쿵……!
몸속에 있는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같다.
가죽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서문경의 코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강대한 충격이자 흐름이었다.
“범람한 장강의 물을 다루는 거다. 여기에 천주심경을 덧붙이면 제어하기 쉽겠지. 심상에 강철의 기둥을 세웠던 것처럼 부동한 의지로 삼단전을 감싸면 되니까.”
“…….”
그 말과 동시에 주백경이 뒤늦게 공력을 운용했다.
서문경과 마찬가지로 코에서 피를 흘리고, 팔뚝의 핏줄이 터질 듯 맥동했다.
그러나 동공에 담긴 힘은 평생 겪어 보지 못한 경이에 가까웠다.
“……이건.”
공명을 다루는 감각이 아직 미숙해서,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주백경은 내상이 시시각각 쌓이는 것을 알고도 짙게 웃었다.
한순간 전능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했다.
“이건, 정말로……!”
일권으로 언덕을 무너뜨리고, 단칼에 건물을 무너뜨릴 것만 같다.
주백경의 미소를 본 서문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문의 동공에 덧붙일 이름으로, 공명결(共鳴訣).”
“좋은 이름입니다.”
“마교와 싸울 때가 아니면 허락하지 않을 거야. 지금 네 꼴을 봐라.”
“제가요?”
“그래.”
서문경은 주백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코피를 계속 흘리고 있음에도 공력 운용을 멈추지 않고서 미친 듯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평소의 주백경이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힘에 홀려서, 자칫 잘못하면 범람하는 강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정말로 극소수만 쓸 수 있게 해야겠는걸.’
장군 중에서도 서문패와 동렬에 있는 자.
혹은 공명결을 창안한 서문경 자신까지.
그 수준이 아니면 공명결을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서문경은 주백경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까, 시연이 끝나면 차차 보완하든가 네 단련을 도와주마.”
“왜요? 이대로 충분한데!”
“충분하지 않아. 일단은 푹 쉬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쩌억!
서문경의 수도가 주백경의 요혈을 때렸다.
* * *
“공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추태를 부릴 줄이야!”
주백경은 두 시진이 넘어서야 깨어났다.
하지만 공명결을 시전한 내상은 여실히 남아서, 속이 쓰라리다거나 기운이 없었다.
서문경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네가 공명결을 펼치면 어떨지 궁금했으니까.”
“그 말인즉. 제 몸으로 실험했다는……?”
“실험이라니. 창안한 지 얼마 안 된 무학이니까 시행착오가 필요한 거지.”
서문경은 주백경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하며 진검을 쥐었다.
원래라면 비무하며 무공을 시험하려고 했지만, 주백경이 내상을 입었으니 혼자서 해 볼 작정이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성하민?”
“하루 종일 맛있는 것만 먹고 자려니까 부담스럽더라고.”
성하민은 자신에게 보라는 듯 허리에 찬 진검을 뽑았다.
무슨 의미인지야 알았다.
주백경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자기와 비무하자는 소리겠지.
서문경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가전무공의 시연이라는 건…… 서문세가의 무공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거야. 네 마음이야 알겠지만.”
“눈으로 봤어.”
“……뭐?”
“그러니까 충분해. 경이도 가능하잖아? 서문세가에서, 무연이에게 그랬듯이.”
터무니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모든 무인이 몸을 비틀 소릴 해댄다.
그러나 서문경은 저 말을 다짜고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불가사의한 재능이 있었다.
스스로 창안한 검법으로 천무학관의 시험을 통과하고,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의 자존심을 꺾었으니.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을 눈으로 베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그 말, 마음에 들지 않네.”
여태껏 선의와 동정심으로 대했던 성하민에게 처음으로 짜증이 났다.
자신에게 가전무공을 파훼당한 양무연의 마음이 이랬을까?
역지사지를 당한 기분이라 괜히 미안해졌다.
하지만 서문경은 자신의 마음에 늘 솔직했다.
“가전무공이 별것 아니라고 들은 것 같아서 편하지가 않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성하민이 그제야 자기 말실수를 깨달았다.
눈으로 봤다, 그러니까 충분하다.
그 말에 담긴 은유가 있었다. 행간이라고 봐도 좋았다.
서문세가의 무공은 성하민이나 서문경 같은 천재에게 있어 눈으로 보아도 베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전장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한 무학 체계란 본래, 단순한 강함을 추구하기 마련이니까.’
서문경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언젠가 강호인에게 들을 줄 알았던 쓴소리를 가까운 친구에게 듣게 될 줄이야.
그 사실을 떠올리니 짜증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라앉아서 생긴 빈자리에 궁금증이 생겼다.
‘하민이가 펼치는 가전무공이 또 다른 가능성의 단초가 될 수도 있어.’
이렇게 된 이상, 화가 난 척이라도 해서 비무하는 게 낫다.
서문경은 왼손에 무공사전을 쥐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