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4)
“기대하마. 네가 강호에서 가져온 답이 무엇인지, 광야에서 탄생한 무공을 어떻게 뜯어고칠지 말이다.”
광야에서 탄생한 서문의 무공이라.
서문경은 서문패의 말을 귀에 담았다.
수십 년 동안 가전무공을 갈고 닦아 온 절대고수가 던진 통찰이었다.
가볍게 던진 낱말 속에 답이 있었다.
‘전생의 나는 마교와 싸우느라 바빠, 가전무공을 속속들여 볼 시간이 없었지만…… 삼촌은 달랐겠지.’
대외적으론 한직에 있으나 병영에서 서문세가의 장군을 ‘직접’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가르친 숫자만 해도 수십에서 수백.
언젠가 주백경이 뛰어넘었으면 하는 사람이 바로 서문패였다.
“……새겨듣겠습니다.”
“뭘 말이냐?”
“광야에서 탄생한 서문의 무공을 발전시킬 방법이요.”
“나 원 참, 그냥 해 본 말을 가지고 쩨쩨하게 담아 두었느냐?”
“삼촌은 한족의 무신이잖습니까.”
그 말에 서문패가 씩 웃었다.
어린 조카의 칭찬이 그저 뿌듯한 모양이었다.
“아마 나 말고 다른 놈들은 일공자가 오만해져서 저럴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줘라.”
“그래야죠.”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삶부터 지금까지.
강호에서 참으로 많은 걸 겪었다.
지면 아래서 급습하는 괴공, 남의 피를 탐하는 적혈마공, 아마 담정과 원수일 흑향의 술법…….
전장에서 역사를 쌓은 서문세가마저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 한가득이었다.
무공의 역사는 무수한 만큼 수많은 가지를 뻗었기에.
서문세가의 정직한 무공도 변화를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기쁘든 싫든, 앞으로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본가에 있던 간자는 아버지가 처리하셨겠지.’
서문이현의 외골수 같은 성정을 잘 안다.
마교를 거론한 순간부터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뒤엎었을 터였다.
호북성에 있는 동안 가신이 몇 차례 물갈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문의 무공은 정직하고, 정신은 굳세니.
전생에서 수많은 죽음과 이별을 겪고도 마교와 싸웠던 까닭이 후자에 있었다.
‘시연에 최선을 다하고, 시연이 가져올 파장은 아버지와 삼촌을 믿는다.’
네 일이 곧 서문의 일이라고 말했던 서문이현의 얼굴을 떠올린다.
서문경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앞으로 사흘 간 모습을 비추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마세요.”
“……그러마.”
서문패의 얼굴에서 흐뭇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조카가 사내다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강호에서 본 것이 강인한 무인이라면 여기선 일가를 책임질 무게를 짊어진 어른이었다.
‘하물며, 얼추 듣기로…… 휘랑 형수와 화해까지 했다지?’
아주 어릴 땐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럽다며 투정을 부렸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장성해 버렸다.
서문패는 그 사실을 새삼 곱씹으며 놀라워했다.
마주칠 때마다 항상 자길 놀랍게 하는 서문경이었기에 시연에 대한 걱정을 품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가전무공에 뿌리 깊은 신뢰를 가진 노친네들에게 한 방 먹여 주길 바랐다.
“시연이 끝나면, 나도 가르쳐 줄 거지?”
“물론이죠.”
서문경과 서문패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에게 보내는 신뢰였다.
* * *
앞으로 사흘.
서문경은 온 정념을 다할 시간을 마련해 준 가족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황실에 할 보고는 아버지가, 강호에서 있었던 보고서는 삼촌이, 소가주로서 할 일조차 동생에게 떠맡겼는데…….’
가전무공의 시연을 준비하겠다는 말에 모두가 도와줬다.
그렇기에 서문경의 마음속에 강한 책임감이 드리웠다.
“주 무사. 잠은 충분히 잤지?”
“……물론입니다.”
평소라면 얼마나 괴롭힐 거냐며 농담을 던졌을 주백경도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가전무공의 수정과 보완.
그 말은 광야의 전장에서 승리해온 중진(重鎭)에게 있어 불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미 완성된 무공에 잡스러운 것을 섞겠단 말인가?
-강호에서 전과를 세웠다고 하여 오만이 과하군. 아무리 가주님의 아들이래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있거늘.
신분이 높아서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장군 여럿이 불만을 품었다고 들었다.
이해가 가긴 했다.
가전무공을 고치면 전선에 있던 장군이나 백인장이 본가로 돌아와서 다시 배우고 습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하물며 그들이 전장에서 승리를 쟁취한 자라면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이나 정직함으로 시연을 마무리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래서야 기괴한 마공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순 없어.’
서문세가 전체가 서문패처럼 절대고수는 아니다.
이류에 머무른 병졸부터 일류, 벽에 부딪친 초일류까지.
여러 경지가 뒤섞여 있는 것이 서문세가의 현 전력이었다.
정직함으로 마도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서문패가 아니고서야, 유연함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가전무공에 어려운 무학을 덧대면 병졸에게 이해시키기 어렵지.’
시연자는 그 점까지 고려해서 와야 한다.
오성이 뛰어나지 않은 수백, 수천 명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무공.
광야의 전장에서 승리를 쟁취할 정도로 강한 힘.
이 두 가지를 모두 합하면서 유연함을 지녀야 한다?
서문패마저 불가능하다고 혀를 찰 문제였지만, 이미 서문경은 들었다.
‘기대한다고 했지.’
시연이 끝나, 자신을 가르쳐달라고.
그 말을 들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서문경은 숨을 크게 가다듬었다.
“처음에는…… 그래, 동공부터 시작할까.”
“……스읍.”
주백경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흉곽에 자연기와 대기가 차오르며 중단전을 충만케 한다.
이것이 평야와 산악, 사막마저도 정복하게 만든 서문세가의 동공이었다.
서문경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구나.”
“누가 가르친 수련인데요. 매일 거르지 않았지요.”
주백경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동공의 흐름을 유지했다.
신체의 양극단을 왕래하는 공력.
그 사이에 위치한 염천혈과 기해혈까지 순행하며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자칫 잘못하면 놓치기 쉬운 세맥까지 잘 닦여, 어느새 무예십팔반을 다루기에 좋은 신체가 되어있었다.
“영약 좀 잘 챙겨 먹였더니 동공으로선 나무랄 데 없이 성장했구나.”
서문세가의 동공이 지향하는 방점.
그 위치에 거의 가까울 정도였다.
서문패와 비교하면 당연히 손색이 있겠지만, 서문세가의 장군도 저만큼 잘 닦진 못했을 터였다.
일개 무사 수준은 일찍이 넘었다.
유연함만 갖춘다면 절대고수로 향할 벽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정확히 모르는 주백경은 서문경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뭐, 공자님이 고생만 시킨 건 아니니까요.”
“충분히 가르쳐 줬다고 생각해.”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검을 쥐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
시연은 무림인이 흔히 하는 비무가 아니라 실전에 가까운 싸움으로 진행되었다.
칼놀이가 어찌 전장에서 통햐겠냐는 구세대적 전통이었으나, 이번에는 크게 공감 되었다.
‘정직하게 적의 수급을 취하는 검으로는 마교와 싸울 수 없어.’
당장 적마를 보라.
피에 담은 마기를 이용해서 거리를 격한 채 사혈을 노렸다.
이처럼 마교에 속한 마도 고수는 상리에 어긋나는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래서 강호의 무공에서 틀을 빌리고자 했다.
‘정직한 검이 마공에 통하게 만들면 돼.’
그 점에서 번천광검결이 끌렸다.
번천과 천결, 광결이라는 세 가지 초식이 담긴 검보.
이 검을 접목한다면 서문검법의 정직함에 변칙을 뒤섞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애초에 결이 다른 검법이었다.
‘삼단전의 적공이 필요한 검법과 중단전을 중심으로 정직하게 휘둘러 치는 검법은 다르니까…… 이건 검치와 따로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어쩌다 보니 검치의 집에 들르지 않고서 본가로 직행했다.
그가 직접 서문세가에 찾아오면 좋으련만, 성격상 그러진 않을 것 같았다.
어쩌겠나.
시연이 끝나면 집에 찾아가 보는 수밖에.
서문경은 시시콜콜한 불만을 속으로 숨긴 채 주백경을 바라보았다.
“주 무사, 전에 가르친 검법은 숙지하고 있지?”
“예. 매일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넘어가고.”
“넘어…… 예?”
진검을 저렇게 꽉 쥐고서 검법은 넘어가자니?
주백경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문경이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검법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으니까. 가장 쉬운 부분부터 고치자고.”
“그게 뭡니까?”
“동공.”
“…….”
검법보다 쉬운 부분이 동공이라고 할 줄이야.
주백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서문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그 표정은?”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동공은…… 고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서문세가가 한족의 군문으로서 자리하고서 수백 년.
그동안 동공이 고쳐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순하지만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가전무공의 근간이었다.
그걸 고치면 뿌리부터 달라지는 셈인데, 시연 도중에 날아올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미친 건가?
-허, 이 나이에 들숨부터 다시 수련하게 되겠군.
‘공자님의 재능이 뛰어나긴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주백경은 서문경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짜고짜 검치의 집에 가자거나 옥화산에 오르자고 할 때가 떠올렸다.
‘결국 끝은 좋았었지.’
검치라는 절대고수와 연을 맺고 옥화산에서 보물과 신공을 얻었다.
그 사실이 떠오른 순간에 의문을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다.
“설마…… 동공을 한층 더 상승시킬 방도가 있으십니까?”
주백경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리자, 서문경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방도도 없이 그런 말을 꺼냈을까? 내 호위가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쓰겠나. 씁.”
“아니, 그거야 말씀을 해 주셔야 알죠!”
“무한한 믿음이나 신뢰를 이제 가질 때가 됐잖아.”
서문경은 히죽 웃고는 한 남자의 이름을 거론했다.
“연준호. 기억하지?”
“예. 공자님의 친우이자 화산파의 후기지수 아닙니까?”
“걔가 썼던 심법을 떠올려 봐. 피부가 빨개지고, 우리 동공 못지않게 중단전이 단단해지던 때를.”
“……자하신공 말씀입니까?”
주백경은 연준호가 자하신공을 펼치던 때를 떠올렸다.
그렇게 유약하던 남자가 가히 땅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여서는 산적의 양팔을 베었으니까.
강호의 심법이 동공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한데 그건 왜……?”
“내가 그 연준호랑 학관에서 떠나기 전에 맞붙었었거든.”
“정말입니까? 지금껏 비무를 거절했잖습니까!”
“그래. 변덕이 났다고 하더라고.”
언제부턴가 왼손에서 무공사전을 놓지 않았다.
연준호와 비무하던 날도 똑같았다.
기물을 쥐고서 싸웠고 비무에서 이겼다.
수집한 무공은 매화검법이었지만, 수없이 초식을 교환하면서 명료해진 안법으로 기의 흐름을 관조했다.
‘아마 여러 무공을 수집하고 해석하다 보니 얻은 오성 덕분이겠지만.’
자하신공이 어떻게 순행하는가?
그리 유약한 연준호가 재빠르게 움직였던 원리가 무엇인가?
서문경은 늘 그 고민을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수로채의 배에 타서 담정과 기 싸움을 하면서도, 눈에 담았던 흐름을 분석했다.
그 답은 서문세가의 동공에 덧붙일 수 있었다.
“앞으로 비밀로 삼아. 자하신공의 진수를 동공에 끼워 넣을 테니까.”
“……!”
주백경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무심코 떠오른 한마디를 흘렸다.
“그건…… 무공을 훔치는 것이…….”
“나중에 사과하고 화산파에도 가르쳐 줄 거야.”
서문경은 주백경을 납득시키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가 되면 비급만 보내 주고 도망치든지 해야지. 정말로 그 나중이 온다면.’
부디 그때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