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77화 (75/250)

삼 년 (2)

중천에 뜬 해가 산맥 너머로 저물 때까지.

두 부자는 정말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정무(政務)를 이렇게 오랫동안 비워도 되는 겁니까?”

“정 급한 일이 있다면 직접 가주실에 찾아오겠지. 지금은 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아들 걱정입니까, 아니면 제가 강호에서 벌인 짓이 궁금하신 겁니까?”

“당연히 둘 다지.”

서문이현은 어느새 찻잔을 치우고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정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선 안 된다고 절대 꺼내지 않던 술이었다.

그걸 좁디좁은 가주실에서 편하게 앉아서 마시는 걸 보자니, 서문경의 기분이 오묘해졌다.

흔히 부자끼리 하는 이야기라기엔 거리가 멀었다.

아들이 본가 밖에서 벌인 무용담과 무림, 수로채와의 임시적 동맹 혹은 불가침.

“참으로, 제멋대로 하고 다녔구나.”

서문이현은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서문경으로선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뭐, 자꾸 마교나 강호의 고수가 얽혀서.”

거짓말이었다.

일부러 엮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진실이었지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버지인 서문이현 앞이라 연기가 어색해졌다.

‘설마 알아채진 않겠지?’

서문경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서문이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걱정과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번져있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다녔어.”

술잔을 내려놓은 서문이현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서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뒷말에 숨을 되삼킬 수밖에 없었다.

“네 삼촌이 괜한 과장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게 직접 듣고 나니, 정말이었구나. 피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는 것이.”

“……?”

“목숨을 함부로 내던질 뻔하지 않았더냐?”

본가에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치와 마주했다.

척안룡과 마주쳤음에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심상에서 다투었다.

심지어는 호북성 동정호 부두에서 적마와 죽을 위험에 처하였으니.

아비로서 가만히 있을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계획이, 선의가 깔려 있든 여기선 확실하게 꾸짖고 넘어가야 한다.

서문이현은 제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러라고 가전무공을 가르친 게 아니야. 누가 봐도 싸우면 안 될 상대에게 승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단 말이다.”

“……아버지.”

“이 아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네가 그런다고 좋아할 줄 알았느냐?”

결과적으로는 훌륭했다.

마교와 싸우기 위한 포석을 깔아 놓았다.

무림과의 한시적인 친교는 물론, 수적을 와해시킬 방안까지 들고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 무엇이 있었느냐?

그걸 생각하면 서문이현의 이성이 감정에 물들고 만다.

세간에서 철인으로 불릴지언정, 아비란 그런 것이다.

“네가 죽을 각오를 했어도 나에게 물었어야 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소리여도 말이다. 적어도 행하기 전에 한 번쯤은.”

“…….”

도저히 할 말이 없어서.

서문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잘못한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냐.”

서문이현이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히고서 술잔을 다시 붙잡았다.

언제나 금욕적으로 정무를 보던 가주실에서의 음주.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나, 오늘은 참기 어려웠다.

“네가 얽혀 있으면 너만의 일이 아니다. 서문의 일이기도 하다.”

“…….”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그 말에 서문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가족을 믿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했다.

그걸 서문이현이 직접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알지 못했다니.

‘마교와 싸울 생각만 했지, 주변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구나.’

아비로서 분하고 화가 날 만하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던 차에 서문이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느냐?”

“……예.”

“이제야 알았다면 되었다. 그런 나이잖느냐. 눈앞만 보일, 그런 나이.”

서문이현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뒤이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앞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네 일이 곧 서문의 일임을 견지해라. 그거면 되었다. 더 꾸짖었다간 네가 토라질까 염려되는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좋아.”

좁디좁은 가주실에서 웃음을 머금은 채 술을 마시는 서문이현.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서문경은 마주 웃었다.

지금만큼은 아무런 걱정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무용담은 충분히 말했으니, 아버지는 어떠셨습니까?”

“나 말이냐? 다 말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하십시오. 오늘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허허. 기특한 말을 하는구나.”

서문이현은 엷게 웃었다.

밤이 길었다.

* * *

다음날 정오.

해가 중천에 떠서 침소가 훤했다.

‘정말로 아침까지 이야기하게 될 줄이야.’

침소에서 일어난 서문경이 두 눈을 비볐다.

덕분에 서문이현이 과거에 북적과 남만에서 싸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교가 서문세가를 처참하게 멸문시킨 이유 또한, 대충 알게 되었다.

마교에 속한 분파 중 남만야수궁이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서문이현은 원수 내지는 침략자였을 것이다.

‘전생처럼 되지 않도록 막아야겠지.’

서문경은 마음을 다잡고서 창가에 다가갔다.

그곳에 전서구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무림맹주 남천웅.

그가 벌써 도움을 요청한 걸까?

서문경의 손이 바빠졌다.

스륵, 스르륵.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빠르게 펴보았다.

거기에는…….

-낭왕이 돌아왔다.

첫 줄엔 서둘러서 보낸 듯 흘려 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다음 줄은 다소 침착했다.

-무림맹에 복귀하기로 하였다. 무림맹주는 여전히 나다.

‘낭왕이 자기 자리를 뺏을까 봐 긴장했었나?’

서문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남천웅에겐 일생일대의 사건이었겠지만, 멀리 있는 사람에겐 그저 희극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진무신검에게 생긴 일로 은거했던 고수가 하나둘씩 나타나겠지. 낭왕은 시작일 뿐이야.’

전생과는 다른, 긍정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그간 목숨을 걸며 고생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위안이라고 봐도 좋았다.

‘내가 허튼짓하진 않았구나. 급하게 움직여, 상황을 오히려 나쁘게 만들지만은 않았어.’

적마가 너무 이르게 모습을 드러내서 내심 초조했다.

설마 마교가 벌써 강호를 공격할까 조심스러웠다.

너무 바뀌는 게 아닌가 긴장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은 전생에서 상상만 했던 희망이었다.

‘암중에서 움직이던 마교의 위세가 움츠러들고, 은거했던 고수가 마교와 싸우기 위해 합류하기 시작하니…… 관과 무림 사이에 있던 의심과 균열도 가까스로 막았다.’

이보다 좋은 결과가 어디 있을까?

가전무공의 발전 또한 이루었다.

당분간 서문세가에 있으면서 가전무공을 정리하고, 주백경을 통해 백인장부터 하나둘씩 가르칠 작정이었다.

“지금까지 수집한 무공을 차분히 분석하는 것도 좋겠지.”

천무학관에 떠나기 직전 수집한 창궁무애검법과 매화검법.

그 두 가지를 서문검법에 접목한다면 재밌는 초식이 나올 것 같았다.

서문경은 자기 뺨을 소리 나게 때리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이, 일어났어?”

문밖에 성하민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래도 서문세가엔 관인이나 군병이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항상 북적였다.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듯해 서문경은 성하민을 잡아끌었다.

“내가 소개라도 해 줘야겠지. 따라와.”

“어? 어.”

서문경은 성하민과 함께 서문세가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다녀도 되는 곳을 설명했다.

“기밀이 많은 집안이니까. 함부로 막 돌아다니다간…….”

“쫓겨나?”

“아니, 내가 뒷배인데 그러진 않겠지. 그래도 욕은 먹을 거야.”

“그건 다행이네.”

성하민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는 와중에 서문세가의 군병 몇몇이 시선을 보냈다.

……어쩐지 눈빛이 좋지 않았다.

‘설마 저놈들,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담정에게 배를 얻어 탈 때부터 걱정하고, 서문이현에게 직접 들었던 문제가 점차 살갗까지 다가오는 것 같다.

서문경은 팔뚝에 돋은 닭살을 긁었다.

“미리 말하는데, 넌 일단 식객인 거니까. 남들이 물어보면 손님이라고 말해. 알았지?”

“으응. 그런데 저긴 어디야?”

서문세가 안채와 조금 동떨어진 곳.

성하민의 손가락이 후처와 서문휘가 사는 집을 가리켰다.

“아, 저긴…… 내 동생이랑 어머니가 사는 곳이야.”

“근데 왜 큰집이랑 멀어?”

그 말에 서문경은 순간 대답을 주저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자신이 투정을 부렸었노라고.

차마 있는 그대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변명을 쏟아 냈다.

“저 집을 뒤늦게 지었거든. 또, 가장 안쪽에 있어서 안전하고.”

“그렇구나.”

성하민은 나름대로 이해한 듯했지만, 서문경은 내심 찔렸다.

전생의 과오는 마교와의 전쟁에만 있지 않았다.

동생인 서문휘나 둘째어머니와 평생 거리를 두고 살았던 것이 후회 중 하나였다.

‘지금이라도…….’

대화하면 늦지 않았을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성하민이 깜짝 놀라 입가를 가렸다.

“저기 네 동생 아니야? 귀엽다……!”

“……!”

서문경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의 말대로 서문휘가 저 멀리서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서.

‘마지막에 무슨 대화를 했더라? 아, 소가주를 왜 양보했냐고 물어봤지. 네가 더 잘할 거라고 말했고…….’

설마 그 대답이 개운하지 않았던 걸까?

서문휘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형.”

“……그래.”

차라리 적마와 싸우는 게 마음이 편하다.

서문경은 어렵사리 대답하며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냐?”

“형제끼리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대화하는 건 아니잖아.”

‘……전생에선 일이 있을 때만 대화했는데.’

하물며 이번 생에도 항상 데면데면하지 않았나.

이렇게 거리감을 허물고서 가까이 다가온 것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음. 오랜만이다. 내가 강호에서 선물이라도 사 왔어야 했는데, 그것까지 신경 쓰질 못했어.”

“괜찮아. 선물은 소식으로 충분히 받았는걸.”

“소식?”

“형이 강호에서 한 일들.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거든. 내 그릇이 좁았다는 것만 깨달았어.”

‘얘도 아버지처럼 나한테 뭐라고 하려는 건가?’

서문휘는 자기 속내를 숨기는 솜씨가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저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서문경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야. 오히려 아버지한텐 잔뜩 혼났는걸.”

“왜?”

“자길 믿지 못한 거냐고. 고수와 무리하게 싸우냐고.”

“……그건 그러네. 주 무사님이랑 둘이서만 다녔으니까.”

지부대인이나 현령과 함께 움직였다면 훨씬 안전했을 거라며, 서문휘가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성하민이 귀엽다는 말을 조잘거렸다.

“동생이 몇 살이야?”

“열 살.”

“이름은?”

“휘. 외자야.”

“서문휘라…… 형제, 참 좋네.”

형제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성하민에게서 쓸쓸함이 엿보였다.

천애고아로서 우애 좋은 형제가 부러운 듯했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왜 저러지?’

항상 데면데면했던 서문휘가 친근하게 다가올 줄이야.

서문경은 속으로 적잖은 긴장을 품었다.

나이를 얼마나 처먹었을지 모를 마인보다 열 살짜리 동생이 대하기 어려웠다.

“……그럼 내 소문을 모두 들은 거야?”

“응. 망나니라는 소문이 들릴 때부터.”

“그건 좀 부끄럽네.”

“뭐 어때? 다 형이 일부러 만든 소문일 텐데.”

서문휘의 얼굴에 영악한 미소가 맺혔다.

다 알 만한 사람끼리 왜 그러냐는 듯한 모습에 서문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함은 어릴 적부터 없었구나. 내 동생.’

저러니까 소가주의 자리를 양보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서문경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서문휘의 시선이 성하민에게 향했다.

“아직 누나의 소개를 듣지 못했네요.”

“나는 성하민이야.”

“형이랑은 언제 혼약을 맺으실 거예요?”

“……컥!”

서문경은 헛기침을 토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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