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1)
사천성을 지나는 장강 상류.
“일공자님께서 하선(下船)하신다! 모두 늘어서도록!”
내강(內江)에 서문세가의 병졸이 도열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스쳤으나 눈동자에 흔들림 하나 없이 수로채가 이끌고 온 선박을 주시했다.
창과 깃발, 주먹을 쥔 손이 땀에 짓물렀다.
-일공자님이 수로채와 친밀해졌다고 한들 수적.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병졸을 다스리는 서문의 백인장(百人將)이 누누이 강조하였다.
하선하는 도중에 나올 수 있는 불상사와 세간에서 십대고수라 불리는 담정에 대해서.
서문세가는 병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북적과 남만, 서역부터 산적과 수적에 이르기까지 대명의 천하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은 용서할 수 없다고.
긴장감은 곧 수적을 향한 적개심으로 변한다.
학습으로 뿌리내린 적의가 수적을 향하였으나.
“싸우자는 거냐?”
산길에서 마주친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이러할까?
단 한 명의 절대고수.
선박의 뱃머리에 선 남자가 흘린 기파에 병졸의 적개심이 주춤했다.
“저게…….”
“척안룡 담정인가?”
“들은 대로 무시무시하군.”
저런 남자와 서문세가의 일공자가 어찌 친밀해졌다는 걸까?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군기(軍氣)가 쇠하는 것을 경계한 백인장이 북을 두드렸다.
둥, 두둥.
가죽 북을 힘차게 내리치는 소리가 강에 파문을 남겼다.
여러 차례 만들어진 파문이 수로채의 배 하부에 닿고, 긴장감과 적개심이 고조하여 병졸들이 각오를 다잡던 그때.
따악!
당당히 서 있던 담정에게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이, X발. 왜 때리는데!”
“굽히기로 했으면서 뭐 하자는 거냐?”
“아니, 나도 체면이 있지. 관병한테 고개라도 숙이랴?”
서문세가의 일공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절대고수라니?
……맥이 풀리는 광경이었다.
고조되던 긴장과 적개심이 한순간 휘발되어 청명한 하늘로 날아갔다.
심지어 북을 두드리던 백인장마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서문경과 담정을 바라보았으니.
병졸들은 살갗이 짓무를 정도로 병장기를 붙잡고 있던 것이 우스워 껄껄 웃어 댔다.
“하하, 이게 무슨 일이야?”
“어깨에 잔뜩 힘주라더니만, 그게 다 헛짓이었다는 거지!”
불상사는 무슨.
척 보기에 서문경이 담정을 완전히 부하처럼 가지고 놀고 있지 않나?
병졸들이 계속 키득대자, 수적들이 수치스럽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거나 담정을 욕했다.
“총채주란 사람이…… 뭔 애새끼한테 저래?”
“진짜 수병으로 도망쳐 버려?”
“이러다 수로채 장사 접겠다!”
담정을 농담으로 까댔으나 진심은 없었다.
불행한 인생을 가진 도적놈끼리 품은 의리나 정이 있었기에.
다만, 이제 겨우 열넷인 소년한테 얻어맞는 담정이 창피하기만 했다.
“작작 쳐맞지?”
“알겠다, 알겠어. 젠장. 서문경 네놈 때문에 깎인 내 체면은 누가 보상하냐?”
담정의 말에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물자와 돈으로.”
“……쓰읍.”
이미 얼마나 받을지는 계산이 끝났다.
이제 더는 약탈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담정이 추측하기로 사천성 총독에게 예산을 떼어 왔나 싶을 정도였다.
고로,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몇 마디밖에 없었다.
“제때 안 주기만 해 봐라. 내가 당장 사천성의 항을 점거해서…….”
“그건 그때 따지시고. 양탄자라도 깔아 주지 그래.”
“……쯔읍.”
혀를 가볍게 찬 담정이 수하들을 시켜 발판을 내렸다.
서문경과 주백경, 성하민.
겨우 사람 셋을 사천성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수로채의 정예가 나섰다.
그 행보가 백인장 휘하의 십인장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강호의 풍문이 오히려 축소된 걸지도 모르겠군.”
“서문패 장군께서 우스갯소리로 한 게 아니었단 말이지.”
현 무림에서 제일 어린 십대고수이자 마교의 대적자.
처음에는 조카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저 광경을 보면 그저 웃을 것이 아니다.
헛소리나 거짓말이 아니라, 저 척안룡과 동격에서 말을 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서문경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
나무로 만들어진 발판을 밟고 있음에도 발소리가 평지를 밟듯 고요했다.
동공은 도가 정종의 것과 닮았다.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 안에 깊이와 치열함이 있었다.
서문세가의 동공에 도가 정종을 뒤섞었다는 뜻이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무엇으로도 숨길 수 없을 심후한 무언가를.
“겨우 반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얼마나…….”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단 말인가?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에 정통한 백인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문경을 눈에 담았다.
어린 새싹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나무가 된다지만, 시간을 너무 건너뛰었다.
그렇게 백인장 휘하의 십인장들이 각자 놀라움과 질투, 감명을 속에 품었을 때쯤.
“무림으로 향한 사이에 군기는 쇠하지 않았고, 십인장들은 자기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했다는 것이 눈에 보이니.”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소가주로서 가르침을 얼마 받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십인장과 병졸들을 치하하는 말에서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원숙했다.
저 나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마치 수십, 수백 번은 단상에 서 본 장군처럼.
“서문세가의 군세와 치세가 위성(威聲)하여 대명의 존립과 천하의 평안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내 비록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왔으나 단언하겠다.”
서문경이 목소릴 짧게 끊어 듣는 자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어깨를 펴고 턱을 세운다.
서문경의 눈동자가 매처럼 날카로웠다.
“서문은 불패하리라……!”
불태(不殆), 위태롭지 아니함이 아니라.
불패(不敗), 패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니.
누가 들어도 오만하기 그지없다.
말한 자가 소년이라면 더더욱, 나이가 이립이 넘은 백인장이 속으로 비웃어도 당연했다.
하지만 말에 담긴 힘이 있었다.
“……허.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군.”
대사막에서 북적과 싸울 때였을까?
아니, 끈적끈적한 밀림을 헤쳐 나가며 남만이 파 놓은 함정을 해체할 때였을까?
하루하루 치열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야밤을 틈타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날이었다.
백인장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석년(昔年)의 가주님을, 일공자에게 보게 될 줄은.”
그 자리에 서문이현이 있었다.
어린 아들과 반려를 집에 두고서, 이마에 홍띠를 묶은 채 적과 맞서 싸우던 장군이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도망가지 못했다.
서문이현이 가진 집념과 악운이 천기를 이끌었기에 승리했다.
그때의 장군이 저 어린것에게 보였다.
저벅, 저벅.
백인장은 십인장들과 병졸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어린 일공자를 마중 나왔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 백인장. 인수 현 출신의 장운(將韻)이 일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여기까지 잘 와 주었다. 나는 서문세가의 일공자, 서문경이라고 한다.”
서문경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장운을 일으켜 세웠다.
단 한 번 마주쳐 백인장을 탄복하게 만든 미담.
그 이야깃거리가 병졸 사이에 떠돌기 시작하는 그때, 배 위에 있던 담정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랄들하고 있네.”
“…….”
서문경은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 * *
“성하민이라는 아이, 강호에서 데려온 짝이더냐?”
“푸흡!”
서문경은 순간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첫 마디가 네 짝이냐니.
등줄기에 한기가 흘렀다.
“오해십니다. 오해요!”
“홍가와의 약혼을 파한 이유가 저 아이인가 했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이현의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뼈 있는 농담으로 들렸다.
실제로, 자신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단 소문이 퍼지면 홍가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으니까.
이미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서문경의 웃음이 굳어졌다.
“그건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인척이 없는 아이인지라, 본가에 데려왔을 뿐입니다.”
“그뿐이더냐?”
서문이현은 찻잔을 홀짝이고는 심유한 눈으로 서문경을 직시했다.
“그 아이가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지라고 하나, 아비로서 네 성격을 안다. 필시 비밀이 있을 테지.”
“…….”
“그러니 다시 묻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듯.
서문이현은 느긋한 어조로 서문경을 압박했다.
단어 하나, 어조 하나까지 세밀하게 꾸며 내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비밀을 캐물었느냐?”
“아니요.”
“이미 알고 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화가 제법 길어지겠구나. 스무고개 하려는 게 아니라면, 네가 직접 말해 주려무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하나씩 물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게 만들려는 화법.
서문경은 서문이현이 의도하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강호로 나간다는 뜻을 밝힐 때처럼 능청을 떨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잠시 본가에서 떠나 강호로 향하였으나, 저는 무림인도 수적도 아닙니다. 여전히 서문세가의 일원이요 대명을 수호하는 군병입니다.”
“…….”
“하민이가 비밀을 품고 있는 걸 알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대명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직접 캐묻겠습니다.”
무림인은 협(俠)을 숭상한다면 군병은 충(忠)을 품고 자란다.
대명을 다스리는 천자를 향한 충의.
나라의 질서와 일원을 수호하기 위한 충직.
‘비밀을 가지고 있을 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을 문초할 권리는 군병에게 없다.’
만일 자신이 무림인이었다면 협을 지키기 위해 남 일에 기꺼이 끼어들었으리라.
하지만 서문경은 군병이었다.
그 뜻이 있기에 성하민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가주인 서문이현이 잘못이라 말한다면 기꺼이 뜻을 굽히리라.
“소자에게 답을 말씀해 주십시오.”
“……허어.”
서문이현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이 무슨 자제력이란 말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할 나이에 가까운 친구가 품은 비밀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니.
그러나 서문경이 군병이라면 서문이현은 가주였다.
한 가문을 책임지는 위치였기에 서문경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엄해졌다.
“네가 데려온 아이가 마교의 간자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마교가 일찍이 납치하려고 했던 친구입니다. 본가가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그 아이가 품은 비밀이다?”
“소자는 그리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서문경의 이야기가 짧은 시간 이어졌다.
서문이현은 차향을 맡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성하민이라는 아이에게 미심쩍은 데가 한둘이 아니었다.
마교가 납치하려고 했던 때나 남을 과도하게 경계하는 면, 무공을 알지 못했던 아이가 그토록 뛰어난 경지를 지닌 게 기이했다.
그러나 서문경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네 뜻이 옳다. 그 아이가 마교와 관련되면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양민이다. 핍박해선 안 돼. 오히려 곁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을 아이야.”
“하면……!”
“하지만 네 주위에 돌 소문까지 책임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그 말에 서문경의 말이 턱 막혔다.
이제야 겨우 망나니라는 악소문을 틀어막았는데, 정말로 군문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돌지 몰랐다.
“……끙.”
“네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안 그러느냐?”
“예, 그러겠습니다.”
“좋아. 사내라면 응당 그래야지.”
서문이현이 희미하게 웃었으나, 서문경은 골머리를 앓느라 보지 못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