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75화 (73/250)

담정 (2)

“네, 네가 이럴 리가 없잖니? 누가 쳐들어온 거야?”

도련님은 여인이 흉수(兇手)라는 걸 부정했다.

그녀의 손에 횃불과 칼이 들려있는 걸 보고도 감싸려고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가족과 함께 웃으며 일생을 살았다.

그녀가 어떻게 집안을 불태우고 가문을 멸문시키겠는가?

거짓말.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자신을 속였다.

“바른대로 말해…… 내, 내가 어떻게든. 복수할 테니까. 또, 너만은 지킬 테니까.”

“보이는 대로야.”

여인은 웃었다.

처음에는 쿡쿡 웃다가 종래엔 깔깔 웃어젖혔다.

불바다가 된 집안이 그녀의 뒤에서 넘실거렸다.

악귀가 천하에 강림한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어떻게 도련님은 보였을까?

“부정하지 마.”

“……아니야.”

“똑바로 봐. 내가 했어. 응? 그러지 마. 눈 돌리거나 잊으려고도 하지 마. 우리 선량한 오라버니.”

여인은 오른손으로 도련님의 뺨을 쓸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혼자 살아남겠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해 줘.”

“히히. 왜 다 봤으면서 그러는 거야.”

“……너는, 넌. 아니야.”

도련님이 말을 잇지도 못하니, 여인은 그걸 딱하게 여겼다.

“내가 언제부터 동생이었을까?”

“무슨 소리야?”

“잘 기억해내. 웬만한 정신력으론 떠올리지 못할 거야. 아, 그래. 내가 선물을 줄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좌도의 주박에서 벗어날 정신력을.”

여인은 도련님의 뺨을 쓸었던 손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눈을…….

* * *

“꿈자리 더럽게 사납네.”

담정은 땀범벅이 된 외투를 벗었다.

서문경 일행을 태운 뒤로 사흘째.

중경의 중앙선을 넘었다.

사천성까지 이틀도 남지 않았는데, 하루하루 악몽을 꾸고 있었다.

설마 주변에 있기라도 한 걸까?

담정의 안대 안쪽이 쓰라렸다.

그 고통이 담정을 괴롭힐수록 여인의 외관은 더더욱 뚜렷해졌다.

축 처진 눈매, 왼눈 아래의 점, 붉고 도톰한 입술…….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원수였다.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불구대천의 원수.

‘마교에 좌도방문이 있다는 말만 듣고, 며칠 동안이나 이 상태인가.’

담정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자제력이 부족해졌다.

마교의 좌도방문이 그녀가 맞는지도 모르는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매일 악몽을 꾸는 것조차 기력 낭비거늘.

‘애새끼도 아니고.’

도대체 그때로부터 몇 년인가?

얼굴이 변했거나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여자다.

어쩌다 마주치고도 못 알아보았을 확률도 있겠지.

하지만 여전히 잊지 못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집착하고 있다.

‘……당장은 서문경에게 정보를 듣고 판별하는 것이 우선이다. 격동하는 강호에 수로채가 살아남으려면 서문세가 편에 서는 것이 좋겠지.’

서문세가의 힘이야 잘 안다.

강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꼭짓점이자 군문의 정점.

장강을 쏘다니면서 충분히 보았다.

북적과 남만, 서역을 전부 상대할 정도로 병력과 물자를 갖추었다.

‘이제 그게 서향이 아니라 중심으로 향한다라…… 강호의 균형이 바뀌겠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대표하는 정파.

녹림과 수로채가 대표하는 사파.

나머지 잡졸들, 흑도.

세 축에 서문세가와 관이 끼어든다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조차 없다.

심지어 배의 선장이 열네 살의 소년이라니.

‘젠장, 의념절기를 펼칠 줄 아는 후기지수가 웬 말인지.’

이래서야 마음대로 다루기도 어렵다.

상단전 의념을 초식에 실을 수 있다는 건, 심지(心志)가 굳다는 증명이니까.

뭐 하나 제대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나.

담정은 낙심하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단은 놈한테 뭐라도 들어 볼까.”

그 생각으로.

* * *

‘운이 좋았어.’

무림맹과 동맹을 꾀한 다음에 마주한 것이 담정.

처음에는 엄청난 불행이라고 여겼지만, 수로채를 통해 사파와 교류할 기회가 생긴다면 시간을 더더욱 아끼게 된 셈이다.

서문경은 물안개를 쐬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주백경의 내심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전에 소저가 말했듯, 이놈들은 수적입니다. 신뢰해선 안 됩니다.”

“뭐 어때?”

“……예?”

“수적들은 마을을 불태우거나 사람을 무분별하게 죽이지 않아. 자기도 먹고 살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마교는 다르지. 그놈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불태우니까.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에 등 뒤에서 히죽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릴 그렇게 봐주다니 대단히 고마운데?”

척안룡 담정.

그가 물안개의 장막을 들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긴 머리를 묶지 않은 채였다.

서문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교보다 낫다는 거지, 도적놈을 좋게 봐준 적은 없어.”

“그건 좀 섭섭하네. 앞으로 뜻을 함께할 동맹 아닌가?”

“동맹이 아니라 협력.”

“……클클.”

담정이 끈으로 머리를 묶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천성이 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경을 하선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 오늘의 뱃삯은 뭐지?”

지난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정보를 들었다.

사천성까지 태워 주는 대신, 서문경은 담정에게 유용한 정보를 내놓는다.

단순하지만 간결하다.

어차피 마교와 싸울 것이라면 기 싸움을 할 필요 없이 모든 정보를 내놓으란 의도였다.

하지만 서문경은 담정의 속내를 유추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좌도방문이 있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었지.’

그 후에 다락방에 무얼 보았냐고 물었었다.

담정이 냉정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필시, 그 두 가지가 이어져 있을 터.

‘내가 척안룡에게 좌도방문에 속한 마교 분파를 말했다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꿀지도 몰라.’

무슨 과거인지는 몰라도 사연이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좌도방문을 배운 칠로두는 청마와 동렬에 세울 수 있을 광인이었다.

흑향(黑香).

전생에 마교와 전쟁을 치렀음에도 성별이나 얼굴이 어떤지조차 모른다.

철저하게 자길 숨긴 채 움직였고, 그 당시 정의맹에는 주술을 간파할 재주가 없었으니까.

저 이름조차 자기가 남긴 서명에 불과했다.

‘다락방의 책장이 아마 흑향을 추적하기 위한 기록 같은데.’

마교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할 때면 몰라도 지금은 장강에서 이탈하게 둘 순 없다.

서문경은 속으로 흑향의 존재를 묻어 두고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문세가의 물자를 수로채가 나르면 그동안은 수적이 아니라 대명의 수병으로 대해 줄 거야. 나중에 뭐, 마음에 들면 그쪽으로…….”

“내 부하를 수병으로 가져다 쓰겠다?”

“수적보다는 수병으로 사는 게 낫지. 도적질이 하고 싶어서 수로채에 들어간 사람이 있긴 한가?”

“…….”

담정은 잠시 침묵했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거나 재산을 빼앗고 싶어서 도적질에 발들이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서 약탈을 자행했다.

저마다 불행한 이유나 변명을 지니고서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게 수병이 될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적어도 절반은 혹하지 않을까?

“……그거 혹하는 소리네에.”

담정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언뜻 들으면 위협을 주는 것처럼 들려, 주백경이 서문경 앞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하지만 서문경은 담정이 어떤 인간인 줄 알았다.

“말뿐인 약조가 아니야. 공증이라도 받아 오지.”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하지?”

담정이 차갑게 웃었다.

“협력이라면서 내 부하를 수병으로 데려가겠다니. 심보인지 배려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데?”

“가족 아닌가?”

“……뭐?”

“수로채의 채주끼리 서로 가족처럼 지낸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그래서 흑선채주를 쫓아서 호북성 한복판까지 쫓아온 거고.”

서문경은 담담히 말했다.

만일 적마가 날뛰지 않았다면 호북성에 주둔하는 수병이 모두 나서서 담정의 배를 부쉈을 터였다.

제아무리 담정이라도 배가 부서지면 오래 도망치지 못한다.

다른 수로채와 합류하기 전까지 헤엄치는 도중에 큰 상처를 입었겠지.

그 위험을 각오하고 흑선채주를 쫓아온 것이다.

‘……남의 목숨이나 재산을 빼앗는 쓰레기가 소꿉놀이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적어도 녹림처럼 사람 죽이길 즐겨하는 성향은 아니지 않나.

하물며 자기 부하가 수적질을 때려치우는 걸 반기는 것도 보았다.

비록 전생이지만.

서문경은 이를 알기에 담정이 넘어올 걸 확신하고 있었다.

“나중에 네가 잡혔을 때 수병이 된 가족한테 도움을 받는 건 어때?”

“……허, 허허.”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담정이 서문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으나, 눈치가 부족한 주백경은 적의로 받아들였다.

“이보시오!”

“전에도 봐서 느꼈지만, 참으로 충직한 친구야. 수적할래?”

“……거절하겠소.”

“아쉽군. 하긴, 좋은 자리를 두고 떠나기도 그렇겠지.”

담정의 눈동자가 주백경을 담았다.

어쩐지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금세 감정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교의 위치나 규모.

그들이 어디 숨었을지에 대한 예측과 장강에서 조심해야 할 지역.

이에 대해 서문경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가만히 듣던 담정이 기가 차서 중간에 흐름을 끊을 정도였다.

“뭐 모르는 게 없냐?”

“모르면 죽어야 하니까.”

“갑자기 헛소리하네. 나 따라 하냐?”

그 말에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사람은 어떻고?”

“……그건 그러네.”

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열네 살 소년의 조언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는 것도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말은 경청할 가치가 있었다.

“근데 넌 관과 무림의 연결자가 될 사람이니까, 주의 깊게 들어야지.”

“말이 짧네.”

“뭐?”

“며칠 전부터 계속 무시하거나 말을 돌리는데, 어쨌든 내기잖아?”

“이제 들을 것도 다 들었는데 장강에 던질까?”

“그럼 마교와 싸우기 전에 관과 싸워야겠지.”

서문경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마교의 좌도방문을 조사하고 있는 사람도 잃게 될 거고.”

“……이놈 봐라.”

담정은 끅끅거리며 웃었다.

그 안에서 증오가 스스로 불사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진무신검이 청마에게 급습당했다는 소문이 강호 각지에 퍼졌다.

처음에는 성도에만 퍼졌던 것이 사람들의 입을 거쳐 구석진 곳까지 도달했다.

또옥, 똑.

북방 계곡 주변의 동굴.

온갖 음기가 가득하여 인간이 살 수 없는 지형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마교가 나타났다?”

“예. 그렇다고 합니다요.”

남자와 마주한 상인은 오들오들 떨며 손수레로 가져온 식재와 가죽을 내려놓았다.

이만한 고생을 하는 보람은 있었다.

남자가 주는 돈은 구리나 은이 아니라, 보석이었으니까.

그렇게 큰돈을 쉽게 받기가 편치 않아서 남자의 귀까지 대신해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상인의 목소리가 음기에 의해 갈라진 채 이어졌다.

“적마가 호북성에 나타나…… 하여…… 그의 머리를 청마가 가져갔습니다.”

“진무신검이 그때 습격을 당했단 건가?”

“예, 예. 그렇습죠.”

“……음.”

남자가 낮게 웅얼거리는데 진동이 상인의 몸을 흔들었다.

무림에서 이를 두고 기파(氣波)라고 하지만, 벽지의 상인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날씨가 좋지 않아서겠거니 싶어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저어…… 이제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약조는 잘 지키고 있나?”

“예! 대인과의 거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다행일세.”

빙긋 웃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데 그 덩치가 웬만한 곰보다도 컸다.

게다가 어깨는 얼마나 넓은지 상인이 평생 본 사람 중 제일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음부터 오지 않아도 좋네.”

“예?! 하지만…….”

“많이 벌었잖나. 여기서 거래는 끝내는 걸로 하세.”

“……옙!”

상인이 두 손을 모아 올리는 사이에 남자는 호북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낭왕.

십대고수 중 하나이자 현 무림맹주가 천하에서 제일 원망하는 쌍놈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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