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정 (1)
서문세가로 돌아가는 날.
순풍(順風)이 서문경의 뺨을 간질였다.
귀갓길 첫날에 길조(吉兆)가 찾아온 것 같아 빙긋 웃었다.
그사이에 주판을 튕기던 장사치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가구를 처분할 가격은 이 정도면 되겠나?”
숙소에서 쓴 가구나 침구는 처분하여 여비로 쓸 작정이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장사치를 불렀었다.
그는 무복이나 개방의 오의(汚衣)를 걸치지도 않아, 언뜻 무림과 연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개방의 고수다.
양회광이 비밀리에 부리는 부하일 터.
서문경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예. 양 대인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자네.”
장사치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언제 엄숙하게 굴었냐는 듯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골목대장이 말하기를, 감사 인사 대신 주머니나 두둑하게 챙겨 주라고 하더군.”
“그걸로 퉁 치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갚으라고 하십시오.”
“하하, 하하하! 그대로 전해 주지.”
투둑, 탁.
장사치가 주판을 옆 사람에게 대충 던져 주고는 미리 준비한 전낭(錢囊:돈주머니)을 건네고 떠났다.
크기가 제법 두툼했다.
사천성까지 마부를 고용해서 타고 갈 수준의 은원보.
‘괜히 호북성 분타주까지 올라간 게 아니야.’
짐은 단출하게, 돈은 두둑하게.
서문경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고는 전낭을 챙겼다.
기분은 한결 좋아졌으나 갈 길이 멀었다.
‘호북성까지 동공 수련을 하겠답시고 온종일 걷다가 지쳐 쓰러져 잠들길 반복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다.
편한 마차를 내버려 두고 하릴없이 걸었다는 게, 서문이현이 들었다면 시간 아까운 짓이라고 꾸짖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동안 서문경은 어리게 변한 몸에 적응했고, 삼단전의 균형을 맞추었다.
주백경 또한 한계를 넘어섰기에 무영신투에게 배울 수 있었으니.
어렵게 돌아가는 길이 도리어 가장 큰 성취를 가져다주었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적마에게 이기지 못했겠지.’
서문경이 감회를 새롭게 다지며 돌아갈 길을 셈하던 그때.
“공자님, 이번에는 걸어가지 않는 거지요?”
주백경이 다짜고짜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처럼 걸어가겠다면 반역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서문경은 장난기가 돌아서 입술을 씰룩였다.
“좋은 추억이 아니었나?”
“발바닥이 쓸리고 온갖 벌레한테 물리고 싶진 않습니다.”
“동공 수련으로써 아주 제격이었잖아.”
“아, 아니. 참.”
주백경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다가, 이번에 동행하게 된 성하민을 힐긋거렸다.
“성 소저께서 힘들어할 겁니다.”
“그런가?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허어, 허.”
“농담이야. 이번엔 시간을 지체해서 갈 이유가 없잖아.”
그 말에 주백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진짜 선을 넘었다느니, 본가로 돌아가면 가주에게 이를 거란 소리가 턱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서문경의 눈치가 그보다 빨랐다.
서문경은 어느새 주백경과 거리를 벌리고 성하민에게 다가갔다.
“짐은 다 챙겼어?”
“옷가지랑 건식 정도……?”
“그것만으로 그 크기라.”
자기 몸통만 한 봇짐을 멘 꼴이 마치 뒤로 넘어질 것처럼 위태했다.
저러다간 무한을 벗어나기도 전에 코나 뒤통수가 깨질 판이다.
‘빨리 마차를 불러야겠는데.’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사두마차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챙이 긴 죽립의 마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양 대인께서 호북성 경계까지 안전하게 모시라 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하민이 짐을 마차 안쪽에 밀어 넣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제법 무거웠던 모양.
서문경은 피식 웃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 * *
왼눈에 안대를 한 꽁지머리의 남자가 두 팔을 크게 벌려, 서문경을 반겼다.
“사실은 양 대인이 아니라, 담 대인이었다는 반전이야!”
척안룡 담정.
배신한 흑선채주를 쫓아 적마와 싸웠던 그가 방실방실 웃었다.
서문경은 인상을 한가득 찌푸렸다.
“적마한테 오른눈도 찢어졌어야 했는데.”
“어허, 몸이 불편한 사람한테 그게 무슨 소린가!”
담정이 끌끌 웃으며 서문경의 등을 두드렸다.
“우리가 그래도, 응? 적마와 함께 싸운 전우잖아?”
“전우는 무슨. 당신은 흑선채주를 쫓아온 거였지.”
“가는 길이 겹치면 길벗이고, 길벗이 곧 일행 아니겠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고.”
담정은 평소처럼 짓궂게 웃었으나 외눈의 눈동자엔 독심(毒心)이 가득했다.
서문경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마교가 흑선채주를 유혹했다고 여겼다.
“소문은 다 들었어. 청마가 적마의 머리를 들고 도망갔다지?”
“그래.”
“응, 묻고 싶은 게 딱 그거야. 그 새끼들. 어디로 간 거야?”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내기한 건 잊었어?”
“…….”
그 말에 담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내기.
지는 놈이 이기는 놈 아래로 들어가자던 과거와 처참한 패배가 머릿속을 스쳤다.
“오, X발.”
“부하야.”
서문경의 담담한 목소리가 담정의 귓가를 스쳤다.
담정은 순간 울컥하여 살기를 흘렸다.
“죽을래?”
“하극상인가? 수로채의 두목이라는 놈이 위아래도 못 지키긴.”
서문경은 담정의 살기를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러나 더욱 몰아붙이진 않았다.
저놈의 심기가 갑자기 뒤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마침 할 말이 많았는데 잘됐네. 우릴 사천성으로 데려다주는 건 어때?”
“……뭐?”
“가는 동안 청마의 도주 경로나 내가 예상하는 일을 말해 주지.”
서문경은 대담하게 거래를 청했다.
어차피 서문세가로 돌아갈 거라면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좋다.
그 점에서 육로보단 수로.
장강의 길에 해박한 담정이라면 삼십 일을 열흘로 줄일 수도 있었다.
담정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어라, 우리를 무슨 상선(商船)으로 보는 건가?”
“어차피 들을 얘기라면 험악하게 하는 것보다 유람하듯 하자고.”
“……음.”
담정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안, 성하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되는 거야?”
“가만히 기다려. 마차에서 엉덩이 문지르는 것보단 배 타고 가는 게 낫지.”
“그게…… 십대고수잖아? 그것도 수로채의 총채주…… 계속 반말해도 괜찮은 거야?”
“저 새, 예의가 없잖아.”
앞에 욕을 덧붙일 뻔한 것을 참았다.
애초에 자신한테 빚을 진 놈이 뻔뻔하게 캐묻기나 하다니.
서문경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담정을 훑었다.
‘아직 몸을 회복하진 못한 건가.’
여유로운 태도로 숨기고 있지만, 적마에게 입은 상처가 옆구리에 남아 있는 듯했다.
저런 상태로 청마를 추격하겠다는 의지는 가상하다.
하지만 때로는 억지라는 걸 자각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 몸으로 마교와 정면에서 싸우지는 마. 그러다가 흑선채주로 끝나지 않을 거다.”
“…….”
담정이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자기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마교와 싸우고 싶어도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은 적을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냉정한 이성이 주도권을 찾도록 도움을 주었다.
“내가 뭐 하러 무림맹까지 가서 맹주랑 담판을 지었겠어. 다 마교랑 싸울 준비라는 거지.”
“……허,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송이라니. 네 상급자한테.”
서문경이 피식 웃으니 담정도 끌끌 웃었다.
겨우 한두 달 사이에 소년이 십대고수와 동등하게 말을 붙이고 있으니.
수로채에 속한 수적들도 속으로 놀란 눈치였다.
“총채주가 한참이나 봐주고 있다니…….”
“애송이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단 거지.”
무공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격.
십대고수인 담정의 말을 당당히 받아치고 있는 모습은 필시 소년의 태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서문경의 내심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놈, 갑자기 게거품 물고 달려들면 어떡하지?’
담정의 성정이 워낙 괴팍해야지.
주변에 있는 수적들에게 공격하라고 말하는 순간 이도 저도 못 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문경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전생에서 수십, 수백의 전투를 경험하며 쌓은 재주였다.
“나한테 고운 소리 들으면서 자세한 정보 듣고 싶으면 배나 몰아. 빠르게, 안전하게, 흔들림 없이.”
“……쯧!”
담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전에는 그저 호기가 대단한 애송이라고 여겼는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시각을 잃은 건 아니다.
적마와 싸울 때 자신은 틀림없이 보았다.
서문경이 펼치는 의념 절초를.
소년의 검기가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모습까지도.
담정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이놈을 본선에 실어서, 수적으로 만들어 버릴까. 그런 충동이 속에서 일었다.
‘하지만 참아야겠지. 득이 실보다 적으니.’
마교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하물며 서문경이 무림맹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적마와 같은 놈이 무려 일곱이나 존재한다고.
이른바 칠로두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정파와 사파 간의 싸움은 멈춰야 한다고.
거기까지 회상하던 중 궁금증이 일었다.
“서문 장군.”
“왜?”
“마교 놈 중에 좌도방문도 있나?”
“…….”
그 말에 서문경이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고민하자, 담정은 괜한 호기심을 접었다.
설마 자세한 것까지 알 리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있어.”
“……정말?”
“왜 궁금해하는진 모르겠지만, 있어.”
“…….”
탁, 탁.
담정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검지로 팔뚝을 두드렸다.
짧은 시간 동안 상단전 심상에서 크게 고함을 내지르고, 절초를 수천 번이나 펼쳤다.
당장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까지 숨기진 못했다.
“……이봐, 총채주의 대장님.”
“자꾸 호칭이 바뀌네. 왜?”
“내 집 다락방에서 뭐 본 거 없지?”
“…….”
이번에는 서문경이 침묵할 차례였다.
중경에 있던 담정의 집.
그곳의 다락방에서 무공사전을 회수하기 위해 올라간 적이 있었으니까.
크고 작은 책장과 서적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물.
누군가를 뒤쫓기 위한 여정으로 보였다.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는 게 지금, 이렇게 아까워질 줄이야.
서문경은 속으로 아쉬움을 토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못 봤어. 아쉽긴 하지. 약점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앞에서 그런 소릴?”
“솔직한 게 거짓말보단 낫잖아.”
“그건 그래.”
담정은 피식 웃었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문경에게 협박할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 * *
“이게 무슨 꼴이야?”
가녀린 여인이 목만 남은 적마를 보고 깔깔 웃었다.
그녀 옆에 술을 따르는 미남이 여럿 있었으나, 적마의 목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실혼인(失魂人)처럼.
청마는 그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아직도 가족 놀이인가? 옛날 버릇 여전하군.”
“놀이라니. 오라버니들이 들으면 화낼걸!”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술을 따르던 미남들이 청마에게 칼을 겨누었다.
“감히…….”
“내 여동생에게 무슨 말이냐!”
그마저도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그저 텅 빈 그릇과 같으니.
여인이 싫증을 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됐어, 그만해.”
평범한 육성이 아니라 언령에 가까운 목소리.
미남들이 금세 해골처럼 변하여 순풍조차 이기지 못하고 가루로 흩날렸다.
여인이 옛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적마만 아니었으면 옛날처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내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네.”
‘본교의 존재가 들켜서 좋은 일도 있었군.’
청마는 속으로 여인을 헐뜯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가 유일하게 혐오하는 것이 있었다.
탁란(托卵).
멀쩡한 집안에 슬며시 들어가, 끝내 파멸시킨다니.
이처럼 허무한 이야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교훈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지독한 불행에 불과하다.
특히 그것이 생존이 아니라, 자기만족 때문이라면.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청마의 말에 여인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이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거든.”
“듣고 싶지 않은데.”
“평생 날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천하에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을까?
야생화를 따다 주던 모습이 선량해서 좋아했는데.
‘그날 한쪽 눈을 잃었으니…… 진즉 죽었으려나?’
참 아쉽네.
여인은 집안을 불태운 자신에게 저주를 쏟아 내던 한 도련님을 떠올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