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3)
이제 진짜 제대로 ‘인생’을 살아 볼까.
둔걸이 생애 처음으로 노력을 다짐한 그때, 앞을 가로막은 여자가 있었다.
“서문경은?”
어디서 급하게 왔는지 붉게 물든 뺨과 모순되는 격조 어린 말씨.
아미파의 후기지수, 검봉 유화.
그녀가 저렇게 허둥지둥 움직인 걸 처음 보았다.
속에서 호기심이 불쑥 솟았으나 대놓고 묻진 않았다.
곧장 자리를 피할 게 뻔했으니까.
느릿한 어조로 유화의 속내를 떠보기로 했다.
“방금 나갔는데, 왜? 관심이라도 있었어?”
“아니, 그럴 리가. 단지…….”
“단지?”
“……휴학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유화의 어조에 복잡한 마음이 실렸다.
서문경에게 호감이 있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뭔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과 용서를 구할 것이 있었다.
“망나니란 순전히 오해라면, 계속 피했던 걸 사과해야 하니까.”
“딱히 욕을 하고 다닌 건 아니잖아? 상대하기 껄끄러워서 피한 것까지 사과하게?”
“……음.”
유화는 우두커니 서서 골똘히 생각했다.
여태껏 아미파에서 사고(師姑)와 수련하다 보니 또래라곤 구파일방 회합에서 마주치는 애들밖에 없었다.
그 애 중 하나, 둔걸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니.
“……너무 예민한가?”
“예민하지. 예민한데. 떠나기 전에 말이나 붙여 볼 거라면 그런 식으로라도 해 봐야지.”
“집으로 찾아가라구?”
“대충 말하는 거 들으니까, 오늘 떠날 것 같던데.”
“……음.”
망설임이 유화를 사로잡았다.
가뜩이나 대화하기 어려운데 남자의 집을 찾아가야 한다니.
아미파에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두려웠다.
잔뜩 혼나고 놀림 받을 게 뻔했다.
평소라면 여기서 단념했겠지만, 계속 고민을 이어 가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나서야 할 때였으니까.
서문경의 말이 작년에 돌아가신 스승님을 떠올리게 했다.
화전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적과 보름 동안 싸우셔야 했던 스승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습격 때문에 쉬질 못하니, 제아무리 고수여도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는 식량이 없어 곡기를 끊어야 했고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셨으니.
끝내 마적 떼와 동귀어진하여,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로 유언을 남기셨다.
-나라도 나서야 했단다. 미안해.
그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일 년이 흐른 지금.
서문경이 스승님의 유언과 비슷한 말을 꺼냈건만.
“내일 물어봐도 안 늦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홀랑 떠난다니.”
“뭔데, 내가 대신 가서 물어봐 줄까?”
“……아니야.”
유화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둔걸과 친하긴 하지만 중요한 기억까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아까 둘이서만 있을 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왜 후회는 뒤늦게 찾아오는 걸까.
유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서문경의 숙소를 찾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마주치겠지.’
후회를 고이 접어서 깊숙한 곳에 파묻었다.
그동안 스스로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 *
끼익…… 탁.
서문경이 숙소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안쪽에서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이제 오셨습니까?”
주백경이 자신에게 제발 살려 달라는 듯 절실한 눈빛을 보냈다.
그 옆에 눈가가 퉁퉁 부은 성하민이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민이가 날 만나러 갔다는 게 설마 숙소였나?’
유화가 말하지 않았나.
성하민이라면 서문경을 만나러 갔다고, 마주치지 못했냐고.
거기까지 이해가 되지만 어째서 저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은 성하민이 풀어 주었다.
“크흡, 큭…… 항상 나 몰래 위험한 곳으로 가니까. 이번에도 버리고 간 줄 알았지…….”
서문경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서러울 일이야?”
“이번에 크게 다쳐서 왔잖아.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그러니까 나도 돕고 싶은데, 또 금세 사라지고. 이 아저씨는 천무학관에 갔다고 했는데.”
“이제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믿겠니?”
어린아이를 달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는 듯.
주백경이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른은 못 믿겠다는 둥…… 울고불고…… 아휴.”
“고생이 많았구나.”
주백경이 힘든 걸 진심으로 토로하는 사람이 아니거늘.
서문경은 진심을 담아서 주백경의 노고를 위로했다.
“본가에 돌아가면 포상을 내려 주마.”
“돈보다는 휴가…… 휴가를 원합니다…….”
“그건 불허하지.”
“……아.”
외마디 소릴 흘린 주백경은 지금이라도 쉬어야겠다며 침소로 향했다.
그제야 성하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천성으로 돌아간다고?”
“본가와 얘기할 것도 있고, 만날 사람도 있어서.”
“……천무학관은?”
“쉬기로 했어.”
그 말에 성하민이 재차 눈물을 글썽였다.
“나 혼자 천무학관에 다녀라?”
“뭐가 혼자야. 다른 동기도 있는데.”
“하지만…… 그, 무영신 무사부님도 사라졌고 친한 동기가 없어.”
“그건 좀 유감이네.”
합당한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붙잡고 늘어지는 꼴이기에.
서문경은 성하민의 투정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성하민이 한 가지 부탁을 꺼냈다.
“그럼 나도 서문세가에 가면 안 될까?”
“……뭐?”
저 부탁엔 서문경일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세가가 평범한 가문이던가?
북적과 서방을 동시에 경계하는 군부의 중추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군문이 바로 서문세가였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데려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
또…… 홍가와 약혼을 깬 주제에 성하민을 본가에 들인다?
‘홍가가 분노해도 이상하지 않겠는걸.’
약혼을 반기는 듯한 기색이 있긴 했지만, 어찌 됐든 체면이 걸린 문제다.
무슨 말이 오갈지 뻔하다.
‘무림에서 망나니라고 불려 봐야 한철 소문이지만, 군문 사이에서 퍼지는 악소문은 평생 가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이니.
서문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성하민을 설득해서 천무학관에 계속 다니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하민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데려가 주면 안 될까?”
어딘가 절실하면서도 두려움을 참는 듯한 모습.
천무학관에 계속 있다가는 횡액을 당할 거란 확신이 가득해 보였다.
‘도대체 왜?’
전부터 과거사가 불분명하단 의문이 들긴 했다.
아니, 사실 방금 주백경의 말을 듣고도 기이하게 여기긴 했다.
어른은 못 믿겠다니. 평범한 아이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애초에 은혜를 갚겠다고 사천성에서 호북성까지 온 것도, 상식 부재야.’
어떻게든 답을 들으려면 지금이 최적이다.
말하면 데려가겠다, 얼마나 쉬운 거래인가?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일보(一步)가 코앞이었다.
그저 무심하게, 답을 쥐어 짜내면 그만이지만.
“그래, 까짓것 욕먹는 거. 더 먹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서문경은 성하민에게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언젠가 어련히 말하리라 믿었다.
의지할 데가 자신밖에 없어서 호북성까지 온 아이에게 모질게 굴고 싶지 않았다.
군문에 속한 사내로서 어린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인의(人義).
서문이현에게 배운 가르침이 머릿속에 있었다.
“너도 짐이나 챙겨서 와라. 내일 아침까지야. 늦지 마.”
“……정말?”
“마음 바꿔?”
“아, 아냐! 내일 아침까지 챙겨서 올게!”
언제 훌쩍거렸냐는 듯 성하민이 헤헤 웃다가, 서둘러 숙소에서 나갔다.
서문경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오늘 보지 못한 동기를 떠올렸다.
남궁명 그 녀석, 어디서 뭘 하고 있기에 결석한 걸까?
* * *
“소가주님, 문 앞에 식사 놓아두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남궁명은 침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잠긴 목을 풀었다.
소가주로서 지켜야 할 체면이나 행동거지.
그걸 떠올리며 시비가 문 안쪽에 밀어 넣은 따스한 물과 마주했다.
“…….”
작게 너울지는 수면(水面)이 남궁명을 비추었다.
고민과 번민으로 눈가가 거뭇해졌고 총기가 가득했던 눈동자는 물기 없이 메말랐다.
이대로 되는 걸까?
이러다 동생이나 외척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한심하게도, 남궁명은 그런 걱정에 연일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서문경과 타고난 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일인데.”
거기까지 말하다가 쓰게 웃어 버렸다.
과거에 패배자의 생각이라고 비웃었던 것을, 이제 자신이 입에 담을 줄이야.
까득.
아랫입술을 피가 나게 씹었다.
이미 헐어있던 입 안에서 쓰라린 통증이 일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배운 엄격함이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결국 자존심 때문에,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간 친우보다 잘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가.’
자기 그릇이 이리도 좁았나.
남궁명은 실소하고는 얼굴을 씻었다.
방구석에서 궁상을 부리는 것도 여기까지다.
억지로라도 찬바람을 쐬어, 천무학관에 출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수하는 사이, 한 남자가 침소에 앉아있었다.
“남궁세가의 경계도 이 정돈가, 생각보다 뛰어나진 않네.”
남궁명의 호흡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분명, 저 얼굴을 며칠 사이에 본 적이 있었다.
“……청마.”
“기억력이 좋군.”
왼쪽 눈 아래의 점이 눈웃음에 따라 불룩해졌다.
청마가 남궁명의 어깨를 슬며시 붙잡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를 딱 보았을 때, 자리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
“날 모욕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죽겠다.”
“쉬잇, 쉬이…… 널 왜 모욕해? 차라리 죽였으면 죽였지.”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목울대를 거쳐 뺨, 눈을 쓸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희롱이라도 할 생각일까?’
팔뚝에 닭살이 돋으려고 할 때쯤, 청마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불만이 많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냐!”
“너무 흥분하진 말고. 차분하게 들어. 솔직히 말해서…… 천무신동에게 편한 마음을 가진 건 아니잖아, 그치?”
“…….”
마음속을 훤히 내다보는 듯한 언동에 즉답하지 못했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즉시 부정했을 텐데.
그 사실마저 번민 중 하나였던지라, 남궁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같은 마인에게 놀림이나 당하자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죽여라!”
“……나이 어린 장군이 뛰어난 힘과 신비한 움직임으로 나라에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고사(古事), 너도 하나둘쯤 알고 있겠지?”
청마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악의 따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듯, 언뜻 보면 무해했다.
하지만 저 속에는 뱀이 있었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꽤 좋아하거든. 호쾌하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너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야. 고사 속, 나이 어린 장군과 항상 비교당하는 일개 주변인에 불과하지.”
그 말에 남궁명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간질이더냐?”
“하하. 솔직하게 터놓고 말할게. 난 네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거든. 고민이 많은 아이라고, 나랑 통하는 바가 있겠다고.”
“닥쳐라, 닥쳐!”
“네 꼴을 봐.”
청마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서문경은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천무학관에서 소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을 텐데, 너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주변인이 아니라, 주인공을 위협할 위치까지 올려 줄…….”
“그만 놀리고 사라져라. 다시는, 다신, 남궁세가에 얼쩡거리지 마.”
뚝, 뚝.
남궁명이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파고든 살갗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청마가 그걸 보고 웃었다.
이해한다는 듯, 그럴 만하다는 듯.
어린 소가주의 열등감과 조급함을 긍정했다.
“나중에 마음 달라지면 언제든 찾아. 나는 네 편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청마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궁명은 곧바로 남궁서겸에게 고했다.
“청마가 제 방에 찾아왔었습니다.”
“뭐라고 하였느냐?”
“마교의 행사에 방해하지 말라고 제 목숨을 위협했으나, 바깥의 기척이 가까워지는 걸 듣고 사라졌습니다.”
“……시건방진 마교 놈이 감히.”
남궁서겸이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는 가운데, 남궁명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해졌다.
그러나 아직 밝은 면이 남아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