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72화 (70/250)

동경 (2)

동경하는 마음을 버리고자 택한 변덕.

그 의지가 연준호의 검에 담겼다.

스스슥…….

매영조하(梅影造河), 매화 그림자가 강을 만든다고 하였던가?

도경에 나오는 글귀처럼 현학스러운 초식명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경지에 오른 화산파의 검객.

그것도 자하신공을 이은 장문인 직전제자라면 어떨까?

“향(香)…… 매향(梅香)인가?”

자하진기로 빚은 매화의 검기가 한껏 흐드러져 허공을 점하고, 대지를 그림자로 물들이니.

그윽한 매화의 향기가 비무장을 넘어 구경하는 이들의 감각을 곤두세운다.

“이럴 수가…….”

“저 나이에 검향을 자아낸다? 벌써 상단전 심상에 의념을 새긴 건가?”

비무장 밖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하지만 두 소년 검객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서로의 호흡, 간격, 기세가 발하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좋군. 좋아.”

서문경은 빙긋 웃었다.

한 소년이 머지않아 마교와 대등하게 싸울 고수가 될 것이란 계산 없이 그저 순수하게 웃었다.

무림에 처음 나와서 사귄 친우의 성취가 생각보다 뛰어나서, 도와준 보람이 났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널 그리워했던 이유를 알겠어.”

서문경은 전생을 떠올리고서 말했지만, 이를 모르는 연준호는 다르게 이해했다.

“내가 본산에선 귀염둥이거든. 자주 아파서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 그럴 것 같네.”

무인이면서 비무 한 번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연약하다면.

그게 천년화산의 명맥을 이어 갈 천재라면 당연히 아낄 것이다.

지금까지 만난 절대고수나 마도 고수에 비하면 언제 부러질지 모를 유약함을 품고 있다지만, 전무후무한 가능성을 품은 매화나무였다.

서문경은 자색으로 빛나는 검과 마주했다.

저 검은 매화나무의 가지였다.

카가강!

매화의 검기가 서문경을 굴복시키기 위해 허공을 점한 채 사방으로 스며든다.

화려하게 흐드러지는 화검에 천변(千變)의 기교가 있었다.

그건 일찍이, 중경에서 연준호와 나눴던 무론 중 하나였다.

‘그사이에 체득한 거냐!’

서문경은 그 사실이 기꺼워서 웃었다.

사소하게 던진 화두가 미래에 장성할 천재의 양분이 되었다.

언젠가 함께 마교와 싸울 동료이자 친우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영특한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의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꽈악,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번검유회(繁劍遊回).”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매화의 바람에 검을 맞부딪친다.

오른 어깨에서 검지까지 이르는 수양명대장경에 공력을 더했다.

검의 잔영이 검기를 낳고, 검기가 막을 이루어 칼이 닿는 곳까지 세를 키우니.

중단전의 호흡으로 이루는 검막이다.

어릴 때부터 외공의 기틀이 되는 중단전을 극도로 단련한 서문세가의 검객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하물며, 이미 일생을 경험했던 서문경이기에.

스윽, 탁.

매화에 물든 돌풍에 몸을 던졌다.

반구의 검막을 유지하면서 매화의 검기를 쳐 내고, 흘렸다.

본능에 몸을 던지듯 하며 길을 뚫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가득 채운 호흡이 이를 용이하게 했다.

“……허.”

그 광경을 본 연준호가 헛숨을 뱉었다.

서문경이 보이는 기예에 당혹했고, 유약한 체력이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화산의 가르침을 받은 무인이었다.

“매향성류(梅香成流).”

매향이 점차 짙어져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억세진다.

화려한 검기가 더욱 날카로워져, 서문경의 옷깃을 점차 찢거나 짓이겼다.

그러나 서문경의 살갗을 건드리진 못했다.

기예가 몸에 새겨진 고수의 감각이란 모래알 하나의 거리마저 흘리기 마련이니.

“……역시.”

쉽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연준호는 뒷마디를 잇지 못했다.

비무장 양끝에서 시작한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졌기에.

“매향취접(梅香醉蝶).”

후반부 초식명을 달싹이며 마주 달려들었다.

근력이나 체력이 부족하단 변명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후기지수 연준호가 아니라, 화산파의 검객으로서 움직였다.

단지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라.

까앙!

두 검이 강하게 부딪치며 비무장 바닥에 균열이 일었다.

서문경이 한손으로 쥔 것에 비해 연준호는 쌍수.

파지법을 바꿔서 부족한 검력(劍力)을 채웠다.

서문경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

감상을 짧게 내뱉고서 몸을 뒤틀었다.

한 발을 축으로 휘두르는 각법, 회천각이 연준호의 아래턱을 절묘하게 노렸다.

매화검법과 자하신공만을 배운 연준호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 궁금증으로 펼친 기습이 허무하게 막혔다.

쩌억!

“……큭.”

턱에 꽂힐 공격을 어깨로 비스듬하게 쳐 낸다.

흘렸다곤 하나 충격이 적지 않은지 연준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사나인데?”

몸을 사라지 않는 걸 칭찬해줬지만, 정작 상대가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준호의 아래 뺨이 불룩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문 것처럼 보였다.

“재수 없긴!”

칼끝에서 핀 일곱 개의 검화(劍花).

매화를 닮은 자색.

화산파의 가르침을 머금은 검기가 서문경의 양어깨와 비골근, 마혈을 점했다.

‘숨을 헐떡여도 집중력은 줄어들지 않았나.’

서문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연준호의 본능이 자아낸 산검(散劍)의 검기는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부족한 힘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좋은 기량이라.

“……걱정할 필욘 없겠어.”

내심, 천무학관에 두고 가면 안 좋은 방향으로 빠질까 고민했는데.

저 검기와 기량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되고 만다.

서문경은 빙긋 웃었다.

비록 같은 나이의 친우이나 정신은 터무니없이 늙어서, 너무 편하게 대할 순 없었다.

다만 화산파의 천재를 경애하는 마음을 품었다.

‘언제 재회할지 몰라서 아쉬운, 작별의 검의(劍意)를 담아서.’

스르릉……!

서문경의 검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렸다.

* * *

“학, 하아…….”

연준호는 비무장 주변의 기둥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한번 끓어오른 체열은 쉽사리 내려가지 않았다.

수없이 검을 부딪친 정열이 계속해서 몸을 데우는 듯했다.

그사이에 주변은 조용해져 있었다.

수준 높은 비무를 보여 준 검객에 대한 예의였으나, 연준호에겐 그저 기분 나쁜 침묵일 뿐이었다.

‘다 봤으면 뭐라도 말을 하던가, 왜 가만히 있지?’

개중에는 두 눈을 감고서 비무를 복기하는 후기지수도 있었다.

왠지 미친놈처럼 느껴져서, 미간을 강하게 찡그렸다.

그러다 등을 보이는 서문경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갈 거야?”

“보나 마나 둔걸은 출석도 안 했을 테고…… 아쉽지만, 뭐. 심심할 때 들리면 되겠지.”

그 말에 연준호는 피식 웃었다.

비록 나이 어린 소년이지만, 유명한 도문의 후기지수이기에.

저 말이 진심인지 아쉬움이 담긴 넋두리인지는 구분할 줄 알았다.

“학기가 끝나면 서문세가에 놀러 갈까?”

“그때 내가 없을지도 몰라.”

“아, 그래. 인기가 많으시다고 했지. 젠장.”

잡담을 여럿 떠들고 나니 비무의 열기가 가라앉은 것 같다.

연준호의 입술이 밉살맞게 씰룩였다.

“그나저나 하민이는 어쩔 거야? 집도 주고, 용돈도 주고, 너 없이 못 사는 몸인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럼 최소한 작게 말하든가.”

비무가 끝난 직후라 아직 듣는 귀가 많지 않나?

서문경의 불평에 연준호가 ‘앗’ 소리를 내며 히죽 웃었다.

너무 이르게 떠나는 친우에게 던지는, 짓궂은 농담인 것이다.

그 사실을 서문경도 알았기에 웃어젖혔다.

하지만 헛소문이나 악소문이 퍼지기 전에 정정할 필요는 있었다.

“하민이는 어디까지나 본가의 도움을 받는 애니까 그런 농담은 삼가라고.”

“그러다 남편이 되는 게…… 아니, 멈춰. 나 지쳤다고.”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입방정을 교정하는 건 주먹인 법.

서문경은 꽉 쥐었던 주먹을 펴고서 연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후련해?”

“……어.”

연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튀어나온 변덕으로 시작한 비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서문경을 동경할 뻔한 것을 호승심으로 승화시키고, 언젠가 다시 만나서 되갚아 줄 각오로 다졌다.

그래, 다시 만나게 되면.

“매화옥검이란 별호가 아니라, 어마무시한 명성을 가지고 찾아갈 테니까.”

서문경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내면에 던지는 호기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체력이 부족해서 멈추는 게 아니라, 끝까지 선 채로 검을 마주하는 호적수가 되길 바랐다.

보라.

지금도 서문경은 똑바로 서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나.

“……각오해.”

그 사실을 자각하니 목소리가 작아지고 만다.

연준호의 표정을 본 서문경이 하하 웃었다.

“무섭네. 천년화산의 명맥을 이을 고수가 날 따라잡겠다니.”

“아니, 뭔 천년화산? 뭔 헛소리를…….”

“얼굴 빨개지는 거 봐라. 금칠에 익숙해져야 강호 다니기 편해.”

“누가 들으면 경험 많은 낭인인 줄 알겠네.”

“적어도 너보단 많지?”

“……흐, 그러네. 인정.”

연준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열등감이나 열패감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웃음.

언젠가 재회하면 콧대를 눌러 주리란 향상심이 가슴에 수북이 쌓였다.

“자기 혼자 바쁘다고 먼저 휴학하고 말이야. 천무학관에 다닌 지 스무날도 안 돼서 배울 게 없다고 나간 건 네가 처음일걸?”

“배울 게 없는 건 아니고.”

“괜히 겸손 떨기는.”

“미안하지만 나는 관에 속한 사람이라서, 겸손해야지.”

“어어? 선 긋네?”

“관인한테 진 도사는 조용히 해.”

그 외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야성에서 술을 마시다가 서문경이 제멋대로 토라졌던 날.

연준호가 너무 마셔서 업고 가야 했던 날.

이 자리에 없는 주백경에 대한 험담이나 농담도 곁들였다.

그러다가 연준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체력이 돌아와서 혼자서 걸을 만했다.

이때, 서로 약속한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엔 내가 이길 테니까.”

서문경은 천무학관을 나가서 세상으로, 연준호는 연약한 근골을 고치고자 천무학관 안쪽으로 향했다.

그 둘을 심유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서문경을 뒤따라갔다.

* * *

“진짜로 가는 거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경이 발걸음을 멈췄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담긴 머뭇거림.

이 목소리를 가까운 시일에 들은 적이 있었다.

“둔걸이냐?”

“어.”

“뭐야, 평소처럼 출석하지 않은 줄 알았더니.”

서문경은 뒤로 돌아서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한데 둔걸의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눈을 덮을 정도로 지저분하던 머리를 잘 모아 묶은 것이, 게으름뱅이보단 열의 넘치는 후기지수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남궁명처럼.

“이거 완전 반대가 됐네. 성실하던 남궁명이 결석하고, 네가 출석하는 날이 올 줄이야.”

“…….”

“야, 머리 깔끔하게 정돈하니까 얼마나 좋냐? 옥면(玉面)이 훤하네.”

잘생긴 걸로만 따지자면 연준호보다 이놈이 더 빼어나지 않던가?

그 옥면을 지금껏 지저분한 행색이 가리고 있었는데, 정돈하니 보기 좋았다.

서문경은 실실 웃으며 머뭇거리는 둔걸을 채근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어서 해.”

“……너, 망나니였잖아.”

“너도 유화처럼 비꼬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음. 그게.”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자니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둔걸은 여러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짧게 답했다.

“앞으로 학관에 열심히 다니려고.”

“오. 분타주께서 드디어 쫓아낸 거냐? 짜식, 그러니까 평소에 잘 보이지 그랬어!”

“……그런 건 아니고.”

둔걸은 서문경을 보았다

그는 본래 서문세가의 망나니라는 악명으로 유명했다.

그런 동기가 있어서 좋았다.

자신이 게을러도 될 이유처럼 느껴져서 친근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보름 사이에 완전히 뒤바뀌었지.’

천무신동이란 별호 아래에 쌓인 명성이 작은 성벽을 이루고도 남는다.

이제 망나니라고 부를 수 있는 호사가는 극소수에 불가하다.

마교에 속한 마도 고수와 스스로 맞서 싸웠으며, 오걸의 목숨을 구한 남자에게 어떠한 악명도 붙일 수 없으니까.

그것이 둔걸에게 무언가 크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천무학관에 열심히 다녀야겠단 마음이 들어서.”

“이제 제정신 차렸네. 마음에 들어.”

앞으로 잘 다니라며, 서문경이 짧은 말을 남기고는 천무학관에서 떠났다.

둔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무학관 안쪽으로 향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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