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1)
“친하진 않아요.”
“봐, 들었지?”
유화가 정색하고 서문경이 엷은 미소를 짓는다.
그것만으로 어떤 상황인지 대략 알 것 같아서, 연준호는 뒷머리를 긁었다.
‘아, 역시 검봉이네.’
아미파의 엄격한 가르침과 낯선 사람을 어려워하는 성격.
두 가지가 아주 배배 꼬여서는…… 연준호 자신도 검봉과 친해지는데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서문경이 그녀와 거리감을 좁히려면 본심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글쎄.
‘저 친구가 무공이 뛰어나긴 해도 다른 면은 부족하단 말이지.’
여기서 친절한 친우가 참견할 차례인가?
연준호가 은근슬쩍 유화와 서문경 사이에 끼려는 찰나였다.
“저는 이제 수업이 코앞이라 갈게요. 다음에 뵈어요.”
유화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거, 자기가 갑자기 존댓말한 건 자각하고 있으려나?
연준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고 있을 때, 서문경이 어깨동무해 왔다.
“안 그래도 찾았는데 잘됐네.”
“무슨 말이야?”
“유화한텐 전하지 못했지만, 이제 천무학관에 나오기 어려워질 것 같거든.”
“……뭐야. 작별인사?”
“작별까지야. 시간 나면 다시 들릴 수도 있는 거지.”
그 말에 연준호는 최근에 들었던 소식들을 떠올렸다.
귀가 있으면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천무신동 서문경.
자신의 친우가 엄청난 고수라는 점과 마교와 대놓고 척을 지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언제 날지 모를 상황이라는 것 또한.
그리 생각하니 허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역시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영웅은 달라. 학관에 이제 볼일은 없다는 거야?”
“내가 워낙 바빠져서 말이야. 인기가 많아.”
그 말에 두 소년이 푸하하 소릴 내며 웃었다.
그러다가 연준호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배울 게 없으니까 실전이라. 부럽네, 그거.”
부럽다.
처음 서문경과 마주했을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유약하게 태어나 창백한 혈색으로 살아왔다.
체력이나 근육을 키우는 건 수십 번 시도해서 실패했다.
‘소림에서 온 무사부한테 배워도…… 근골이 나아지지도 않고.’
자신에 비하면 서문경은 튼튼한 근골과 재주를 지녔으니.
그 친구가 이제 무림의 중심에서 온갖 지역을 돌아다닐 거라 생각하니, 순수하게 기쁘면서도 부러웠다.
“삼 년이면 널 따라잡을 수 있을까?”
“죽도록 노력해야지. 내 노력도 적진 않았거든.”
“그러겠지. 마도 고수한테 한 방 먹인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아, 이렇게 된 김에 무용담이라도 말해 주지 그래!”
“……귀찮은데.”
연준호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마도 고수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오걸과 쌓은 인연.
소년의 가슴을 들뜨게 만드는 영웅적인 이야기다.
하물며, 그 이야기의 장본인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마지막에 변덕이 들었다.
“천무신동, 자네에게 비무를 청하겠네.”
연준호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터무니없는 말을 흘렸다.
* * *
‘갑자기 왜 저래?’
서문경은 순간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했다.
연준호답지 않았다.
비무하자고 하면 사흘 밤낮을 앓을 거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던 친구답지 않았다.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무용담을 들려달라는 게 어쩌다가 비무 신청으로 변했을까?
‘뻔하지, 그런 이유야.’
날이 밝아서, 바람이 불어서, 별이 밝아서.
무림인이 비무를 청하는 데 큰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과거에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으나, 지금은 알았다.
‘끝없는 향상심(向上心)을 품게 된 거겠지.’
얼마나 높은지 모를 산을 오르는 기개.
무림에 발을 담군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어린 소년의 눈동자에 별무리처럼 담겨 있었다.
날이 밝아서 잘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검을 마주하기에 충분하다.
“좋아.”
서문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무인은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고 비무장의 위치를 확인했다.
비무장은 멀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십 걸음, 고작 그 거리인데.
“머네.”
연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서문경 또한 공감했다.
“그러게, 멀어.”
“…….”
어리다고 하나 명문의 무공을 배운 두 검객.
두 소년의 호흡이 얽혀서, 각자의 기색을 읽기 시작한다.
피부에 모래를 떨어뜨리면 천근처럼 느껴질 정도로 쏠린 감각.
대지를 밟고 밀어내는 무게와 촉각마저 느릿하게, 묵직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천재의 시야란 그러했다.
범인이 보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느끼고 자연스레 이해하니.
그 경치가 수십 걸음이었다.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터무니없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
“…….”
말없이 걸었다.
걸으면서 점차 발소리를 숨기고, 호흡을 적게 머금었다.
그렇게 두 소년의 걸음이 조금씩 비무에 적합하게 변화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연준호의 안색에 핏기가 가셨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서문경의 농담에 연준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비무하겠어?”
“그런가. 그렇겠지.”
마교와 직접 얽히게 된 이상 여유롭게 비무나 할 시간이 언제 생길지 모른다.
연준호의 말은 다가올 혼란을 짚고 있었다.
서문경은 쓰게 웃었다.
“섣부른 걱정하지 말고 다른 애들처럼 학관 생활이나 잘 즐기지 그래?”
“그동안 넌?”
“말했잖아. 워낙 인기가 많아서 부르는 곳이 많다고. 그 사이에 유람이나 즐겨야지.”
“캬! 내 친우가 참 멋있어.”
“……흐흐.”
가벼운 농담을 던지다 보니 어느새 비무장 위였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으로 죄였다.
언제든 출수할 수 있도록, 몸에 새겨진 투쟁을 떠올렸다.
서문경이 무시무시한 투기를 흘리는 와중에도 연준호는 고요했다.
언제 뽑았을지도 모를 검을 바닥에 늘어뜨리며, 숨을 내뱉었다.
“하아.”
가벼운 한숨에 담긴 함의(含意).
서문경은 저 조그마하고 유약한 동기의 전신에 자하신공으로 빚어낸 진기가 휘도는 것을 느꼈다.
“영약을 참 많이도 잡수셨나봐?”
“몸이 약해서 사숙이나 장문인께서 많이 챙겨 주셨거든.”
“또 사숙이냐?”
“내 사숙이 우스워?”
“아니, 그건 아닌데…… 초면부터 몇 번을 들었는지, 참.”
대체 언제까지 사숙 이야길 우려먹을 건지.
서문경은 희미하게 웃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런 시시콜콜한 농담이 금방 그리워지겠지.’
앞으로 마주할 사람 중에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테니까.
긴장 속에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일신의 무위를 믿고 나댈 순 없었다.
그러니까.
“선수(先手)는…… 내가 가져가지!”
서문경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맺혔다.
동기와의 비무에선 항상 선공을 양보하곤 했지만, 연준호에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변덕이었다.
연준호가 진지해 보인다고 해서, 명백한 하수를 상대로 기습이나 하다니.
그러나 연준호의 안색에 놀람이나 초조함 따윈 없었다.
“……후우.”
내뱉은 숨결에 자하신공의 진기가 감돈다.
그 숨결은 곧바로 연준호가 쥔 검에 깃들었다.
매화의 검기.
자색을 머금은 검이 반원을 그리며 크게 춤추었다.
“매화접무.”
초식명을 머금은 입술에 자색이 물들었다.
항상 안색이 창백하던 연준호였기에 그 변화는 한눈에 들어왔다.
“……재밌네.”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까앙!
검을 한 번 부딪치는 것만으로 알았다.
유약한 건강 때문에 비무를 거절해 왔던 동기.
매화옥검의 본 실력은 다른 동기들처럼 가볍지 않았다.
자기가 늘 말한 것처럼 근골이 약할 뿐, 검의의 높이가 턱없이 높았다.
그야.
저것을 보라.
“저게 일 학년의 검기라고?”
“그냥 지나칠 수 없군.”
비무장 한가운데에 매화나무가 있었다.
소담하고 유약하여 가지를 치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또한 매화나무였다.
대지에 뿌리박은 채 매화잎을 흩뿌리는 검객.
그 위용은 수업에 늦어서 뛰어가던 학관생이나 무사부의 시선을 빼앗고도 남는다.
카강, 채챙!
촌각 사이에 호흡을 십수 조각으로 나눴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이다.
두 쇳조각이 부딪치면서 뜨겁고 메마른 공기가 두 소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보라.
서로를 직시하는 눈은 변하지 않았으니.
“매화토염.”
“일검적심.”
“낙매분분.”
“비검절우.”
초식명을 작게 중얼거리며 부딪치고 또 부딪친다.
일 학년 학관생의 비무라는 단계는 일찍이 넘어섰다.
하물며 연준호의 강함은 여태껏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다.
아프지만 재능이 뛰어난 아이.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화산파에서 꽁꽁 숨긴 이유가 있었군.”
무사부 하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매화옥검 연준호.
저 아이의 행적은 천무학관이나 친선모임 외에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재능이야 뛰어나도 생사투에선 당연히 한계가 빠르게 올 줄 알았건만.
“저 ‘천무신동’에게 밀리지 않는다니.”
두 실선이 쉴 새 없이 부딪치고 일전일퇴를 반복한다.
가끔은 선을 쪼개기 위한 절초가 펼쳐진다. 땅바닥으로 흘려서 결착을 지으려는 승부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소년은.
아니, 화산의 소년 검객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움직였다.
[연준호 – 14세]
[여린 근골을 지녔으나 타고난 의기와 재능은 이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스스로 장성할 매화의 기재이자 천년화산의 명맥을 이어 갈 천재다.]
[보유 무공 : 매화검법(梅花劍法), 자하신공(紫霞神功)]
무공은 단 두 가지만 익혔다.
다른 것을 익히기에 체력이 부족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렇기에 집중했다.
검과 신공. 두 가지로 천하를 주파하고자 했다.
그것이 연준호라는 소년의 마음가짐.
천무신동 서문경이라는 또다른 천재와 맞서기 위한 의기였으나.
“……쉽지 않네.”
카강, 카가가강!
검을 부딪친 횟수가 수십을 넘어가 어언 백 초.
과거에 마주했던 벽이 코앞에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준호에게 서문경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친우였다.
군문의 공자로서 튼튼한 근골을 타고나 전신에 붕대를 감고 다녀도 탈이 나지 않는다니.
연준호는 그럴 수 없었다.
어딜 다쳐도 쉽게 덧나거나 염증이 나서 오래 쉬어야 했다.
그 차이가 부럽고 부러워서.
문득 다른 감정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했다.
‘언제부터 이랬지?’
항상 뒷모습을 봤다.
호북성에 도착하기까지 서문경의 도움을 받았고, 불야성에서도 신세를 졌다.
천무학관에서 치른 비무를 지켜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동경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지닌, 서문경을 향한 동경.
‘언제부터…… 경이를 동경하려고 했지?’
무인으로서 품어선 안 될 감정이다.
동경은 싸움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니까.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마음속에서 이미 지게 만드니까.
연준호는 서문경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따라잡아서, 대등한 경지에서 같은 경치를 보고 싶은 친우였다.
“매영조하.”
하나하나 절초로 이루어진 매화검법의 후반부이자 화산파의 유구한 역사.
학대통 도사로부터 이어진 검법의 진수가 연준호의 검을 타고 흘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