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 (5)
동기들과 정이라도 쌓인 걸까?
그저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헤어질 때가 되자 발걸음이 무거웠다.
헤어짐을 이야기하려니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어려지니까 마음이 모질지 못하게 변한 걸까.’
이 무슨,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던 놈이 쓸데없는 고민을.
서문경은 피식 웃다가 천무학관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새파랬다.
각자 청운의 꿈을 품고 온 후기지수가 무(武)를 논하며 가꾸는 논밭이었다.
언제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한 새순들이 자신을 여러 감정으로 비춰 보고 있었다.
‘눈에 힘은 좀 빼지.’
호승심과 의구심, 호기심과 열등감.
천무신동이라는 위명이 강호를 주파해서일까?
주변의 만류를 제쳐 놓고 다가오는 애송이도 보인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귀엽고 우스웠다.
잘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전생에선 마교에게 한데 몰아져서 죽었을 운명이 뒤튼 것이 기뻤다.
물론 옳은 짓만 하진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불야성에서 향락을 즐기거나 망나니라는 악명을 떨치기 위해 기녀를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떳떳했다.
‘알 게 뭐야.’
칭찬받으려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언젠가 천무학관에 이르게 떠날 계획이었다.
조금 더 빠르게 다가왔을 뿐이었다.
아쉽지만,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될 때 떠나는 게 좋은 법이라면.
“비무를 신청하겠네. 나는 자네의 선배인…….”
“긴말은 필요하지 않아. 덤벼.”
서문경은 상대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쪽이었다.
그것이 열등감이든 굴욕이든 간에, 거친 바람이 되어 새순을 강하게 기르고 싶었다.
까앙!
서문경의 주먹과 칼이 부딪쳤다.
주먹은 곧 장타(掌打)로 변화하여 칼과 주인을 동시에 후려쳤다.
“……컥.”
일초반식.
일합을 이루기도 전에 선배라는 남자가 나가떨어졌다.
그마저도 힘을 제대로 싣지 않았다.
부드럽게 밀어 버린 것에 가까워서, 도가 권법의 묘리를 실었다.
“자네.”
선배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 봐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건 안 되지. 어디서 훈훈하게 만들려고.’
서문경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선배라고 하더니 겨우 장타 한 번을 받아 내지 못해서야…… 천무학관의 수준이, 쯧.”
“뭐, 뭐야?”
“봐준 게 아니라 동정심인 걸 알아야지.”
그 말에 나가떨어졌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굴욕이라고 여겼는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문경의 비웃음이 더더욱 짙어졌다.
“여기가 천무학관인 걸 다행으로 알아. 밖이었다면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을 테니까.”
전장이든 무림이든 약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서문경은 비정함을 입에 담았다.
무사부 중 몇몇이 고갤 끄덕였지만, 명문거파의 후기지수들은 진심을 알지 못하고 분개했다.
“우릴 겁박하는 건가?”
“그렇게 들렸다면 나 말고 자기 자신의 좁은 그릇이나 살피쇼.”
버릇이나 예의는 개나 줬다.
이곳에 제갈우가 있었다면 가슴을 때렸을 터였다.
중퇴에 가까운 휴학을 허락해 주었는데 왜 저러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새순이 더 크게 자라나야 나중을 기약할 수 있을 테니까.’
명문거파의 양지에서 기재로 불리며 자라 온 아이들.
이들에게 마교는 아직 먼 위협이고 천무학관은 또래와 인연을 맺을 장소에 가까웠다.
……그래선 안 됐다.
풍파를 모질게 맞아 가며,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아야 강하게 자라는 법이었다.
“나한테 불만 있는 사람은 모두, 후회 남기지 말고 칼 뽑아.”
서문경은 공력을 일으켰다.
이에 혈기 넘치는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 * *
“그만. 그마안!”
서문경이 일으킨 소란은 제갈우가 나서야 멈췄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선배를 열다섯이나 기절시키다니!”
“저를 보는 눈들이 불순해서 손을 좀 썼습니다.”
“학우들이야 그렇다 치고, 무사부들은 왜!”
서문경을 말리려다가 쓰러진 무사부의 숫자가 무려 셋.
천무학관의 수업 계획이 완전히 꼬일 판국이다.
제갈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는 때에 서문경이 기름을 끼얹었다.
“말리려고 해서요?”
“아니, 자네……!”
제갈우가 마침내 분노를 터트리려는 순간, 서문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겉으론 주위를 도발하는 듯해도 눈동자가 싸늘했다.
“제가 학관생이라 무사부들이 봐주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관주님.”
“…….”
“체면을 중시하는 듯하니 작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무영신투 스승님도 없으니 전력을 더 충원하고 분위기도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배운 건 몇 가지 없지만 잠시 무사부로 모셨으니까요.”
서문경은 언제 차가웠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혹시 몰라서 경고를 한 번 더 해 주고 싶었다는 의미가 역력했다.
제갈우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소린지 알겠네.”
“그럼 다행입니다. 너무 느슨하게 느껴졌거든요.”
무사부 셋을 손쉽게 쓰러트린 건 그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였다.
만일 작정하고 살초를 펼쳤다면 제갈우가 도착하기 전까지 싸웠을 터.
서문경은 무사부들이 앞으로 그렇게 하길 바랐다.
-만일 제가 마인이었다면 제가 쓰러트린 열여덟 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소년 마인이라? 끔찍한 소리군.
제갈우가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전생에서 본 마교에선 있었다.
그러니 미리 주의시키고 싶었다.
‘여기까지만 할까? 이러다간 천무학관에 얼씬도 못 하게 생겼네.’
서문경은 제갈우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죄송합니다. 사흘 동안 면벽하며 반성하겠습니다.”
“……사흘로 되겠나? 보름 동안 하게!”
두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지만, 서로 거짓말임을 알았다.
사흘 안에 떠날 사람이 벽을 보겠다고 말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서 제갈우가 기간을 늘렸으나.
서문경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혀를 날름거리고는 자리에서 총총 떠났다.
“허, 이걸 어찌하라고.”
무려 열여덟 명이 기절한 광경을 방치하고서.
제갈우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 *
남궁명은 평소 그답지 않게 결석.
청겸은 자기 옷이나 사러 떠났는지 애초에 없고.
“두 번이나 허탕이라고?”
떠나기 전에 대화나 하려고 왔건만.
서문경은 선배에게 재차 물었다.
“남궁명이가 왜 없습니까? 걘 결석할 애가 아닌데?”
“나, 난들 알겠느냐! 남궁세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선배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는 높였으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흔들린다.
벌써 소문이 퍼졌나?
서문경은 뒤늦게 자신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제압만 하려다가 귀찮아서 기절시켰더니만…… 악명이 늘겠네.’
후기지수 열다섯, 무사부 셋.
작은 문파를 전멸시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양심에 찔리진 않았다.
‘헤벌쭉거리다가 마교한테 죽느니 나한테 얻어맞고 정신 차리는 게 낫지.’
서문경은 시치미를 뚝 떼고서 선배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남궁명이나 청겸 보이면 저 찾아오라고 말해 주십쇼.”
“내, 내가 왜?”
“이름.”
“뭐?”
“나이, 출신.”
“무, 무슨 소린지 잘.”
“일각만 있으면 다 나옵니다. 제 부탁 들어주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
선배가 침묵하는 모양새가 너무 애 같아서 웃었더니, 주변의 시선이 험악해졌다.
‘이크.’
이쯤 했으면 도망이나 가자.
서문경은 서둘러 다른 수련장으로 향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려져서 그런지 애처럼 행동하네.’
반로환동한 도사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천하를 방랑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 수준이었다.
나이를 먹고도 유치하게 굴면서, 짧은 시간 동안 생긴 정을 떼지도 못하는 것이.
‘그냥 인사 없이 떠나고, 연이 닿거나 도움이 되겠다 싶을 때 다시 만나는 게 편할 텐데.’
가주가 되려거든 비정해야 하며.
장군이 되려거든 무정하게 살업을 쌓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영웅은 어떠한가?
마교와 맞서 싸우는 영웅은 어때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무인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던 관존이 이런 고민도 하고. 참 따뜻해졌구나.’
서문경은 그것이 우스워서 피식 웃다가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곱게 기른 머리카락, 검객과 어울리지 않는 섬섬옥수.
검봉 유화.
아미파의 후기지수인 그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너.”
거기까지 말하더니만 갑자기 칼을 뽑고서 기수식을 취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서문경은 억울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왜 그러는데?”
“다른 사람이랑 싸우고 다닌다며. 방심하지 않을 거야.”
“…….”
틀린 말은 아니라서 부정할 수 없었지만, 억울함은 여전했다.
싸우고 싶어서 싸웠나?
제갈우와 천무학관에 경각심을 주고 싶었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유화의 반응이 옳나.
서문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싸워.”
“정말?”
“그래. 그러니까 칼은 좀 치우고.”
믿기 어렵다는 듯 자신의 위아래를 훑은 유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식으로 방심시키겠다면…….”
“아니라니까!”
“응. 그럼 다행이네.”
칼을 회수한 유화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걸 본 서문경이 순간 울컥하여 외쳤다.
“너랑 할 얘기 있거든?”
“……뭔데?”
유화가 제자리에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되물을 줄은 몰랐기에 서문경은 순간 당황했다.
“그, 하민이는 어디 있어?”
“너 만나러 간다고 하던데, 못 만났나 봐?”
“……어.”
“동편으로 가는 것 같던데.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다시 대화가 끊겼다.
서문경 처지에서 난감했다.
‘뭘 아는 게 있어야지?’
전생이나 현생이나 유화에 대한 건 알지 못했다.
하물며 마주친 적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
그마저도 그녀가 이어 가길 싫어해서 인사나 안부에 그쳤다.
‘그냥 보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유화가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왜 그랬어?”
“응? 뭐가?”
“청마와 맞섰다는 거. 그건 진짜라고 들었으니까.”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건 못 믿겠다는 건가?’
격조 높은 불가, 아미파의 후기지수답지 않게 의심이 많은 아이 같아서.
서문경은 진중한 태도로 답했다.
“내가 나서야 할 때였으니까.”
“……뭐야 그거, 스승님 같아.”
유화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기에 서문경의 마음도 편해졌다.
“적마랑 맞선 것도 목숨을 걸었다고.”
“하지만 무영신투 선배께서 나선 거란 소문이 먼저 돌았잖아?”
“그건 내가 워낙…… 그, 좋지 않았으니까 그랬겠지.”
“그래. 응. 망나니셨지.”
유화가 쿡쿡 웃다가 서문경의 손가락을 보았다.
손톱 중간이 부러지거나 깨져서 보기 흉한 손가락.
살갗에는 검붉은 딱지가 져 있었다.
“……난 깨끗한데.”
“뭐가?”
“아냐.”
유화는 황급히 자신의 손을 숨겼다.
같은 동기가 험하게 싸우는 동안 천무학관에서 깨끗한 손으로 무공을 수련했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웠다.
“이제 갈래.”
그렇게 유화가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오…… 드디어 서로 친해진 거야?”
서문경과 가장 가까운 동기.
연준호가 새하얀 웃음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