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 (4)
서문패가 서문세가에 보낸 전서구의 숫자가 무려 일곱이라니.
“의중을 알아 오라고 보냈더니 일을 더 키웠군.”
서문이현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처음엔 왜 이리 많이 보냈나 의아했지만,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무림과 동맹을 꾀해야 한다? 갑자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그게 가능하다면 세상사 어려운 일이 어딨겠는가?
하물며 북적과 싸우면서도 무림세가와 갈등을 빚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 생각했었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무얼 하나 싶더니, 이것이었느냐?”
헛웃음이 나왔다.
어린 나이에 강호로 나가겠다는 것이 걱정스러워 호위무사를 붙였더니, 그보다 더한 위험과 마주하고 다닌 것이다.
애초에 무영신투가 악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일이 어찌 되었을지 모르기에.
전서를 읽는 손길이 분주했다.
모든 내용을 읽고서 서문경의 의도에 따라 도움을 주는 것이 아비로서 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한 문구에 시선이 멈췄다.
-무림맹에 빚을 지우면 마교 전선의 동맹이 될 수 있다고 하네?
-내가 협박한 건 아니고, 조카가 맹주와 말로 담판을 지었대.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것이냐?”
소년의 나이에 닳고 닳았을 무림맹주와 대등하게 설전을 벌였단 말인가?
그 외에도 무영신투의 제자가 되거나, 적마에게 치명타를 입히거나, 진무신검의 목숨을 구하거나.
단락을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단순히 뛰어난 무공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서.
소가주의 자리를 마다하고 강호에 간 이유가 이거였나 싶었다.
‘가주와 어울리지 않다고 말하더니만, 무림인과 잘 어울리고 다녔구나.’
이 순간, 가문의 누군가가 서문이현을 보았으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하하.”
서문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 철인이라고 불리는 무장(武將)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황상마저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농담 삼아 명령했으나, 어색하고 일그러진 표정만 보지 않았던가?
전서에 적힌 글귀는 그만큼 서문이현을 기쁘게 했다.
소가주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가, 속을 썩였던 첫째 아들의 활약담이라는 것이 더더욱 기뻤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몹시 건방지고 얄미웠다.
“내 허락 없이 본가를 대표하여 말하다니, 망측한 짓을 벌였구나.”
무림맹에 아무런 간섭 없이 돈을 빌려주겠다?
서문경이 꺼낼 이야기가 아니다.
가주인 자신의 의중을 물어보고 던질 제안이었다.
하물며 거짓말이라니?
옥화산에서 얻은 보물이라고 대충 둘러댔으니, 그렇게 입을 맞춰 달라?
“……건방지다, 건방져.”
말은 그렇게 해도 서문경의 판단이 대견하여 웃고 말았다.
한참을 끌끌 웃다가 여러 전서구가 작은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 모이를 주었다.
서문이현은 새가 모이를 쪼아 먹는 걸 가만히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조막만 한 전서.
그마저도 서문패의 시선에서 쓰인 글귀를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다.
서문경이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관과 무림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는지.
서문세가의 가주로서, 아버지로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천무학관에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본가로 복귀시켜서 시키고 싶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사내가 밖에서 뜻을 이루고 있는데 불러들이는 것도 과한 간섭이겠지.’
부자(父子)로서 신뢰가 있었다.
만일 서문경을 믿는 마음이 없었다면 망나니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곧바로 진위를 확인하거나 본가로 불렀을 터였다.
당장 둘째 부인이 가문 내에 소문을 퍼트리지 않았던가?
그걸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서문경의 뜻이 있으리라 여겨서였고, 그 아이가 스스로 증명했다.
“자기가 장성했음을 증명하였으니, 등 뒤를 받쳐 주는 것 또한 아비의 덕목.”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가문의 휘광쯤 이용해도 좋다.
서문세가가 무림맹을 품어서 얻을 이득 또한 적지 않다.
서문이현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머리 아픈 일 없이 정무(政務)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네 형이 정말로 큰 인물이 되어서 돌아오겠구나.”
서문이현의 둘째 부인.
은조영(檭祚榮)이 서문휘를 앞에 두고 부드럽게 웃었다.
“왜, 내가 경이를 싫어하고 있는 줄 알았니?”
“……그건.”
서문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히 싫어하는 줄 알았다.
서문경에 대한 악담이나 악소문을 퍼트리거나 누구에게나 들으라는 듯 불평을 내놓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들어온 소식을 듣고 혹여나 분통을 터트리실까 봐 행동을 조심했다.
‘……형을 싫어하시지 않았나?’
서문휘의 행동거지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지자 은조영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들아.”
“예, 어머니.”
“줄곧 모질고 나쁘게 굴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서문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속내까지 그렇진 않았다.
온종일 공부를 강요당하거나 가주의 아들로서 행동을 조심하란 교육을 받아 왔으니까.
그 화가 쌓여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에 은조영이 이해한다는 듯 서문휘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까 말할 수 있는 거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만일 경이가 가주가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니?”
“…….”
알지 못한다.
열두 살의 나이에 그렇게 먼 미래를 볼 순 없었다.
그저 어른인 척 행동하고 서문경의 영웅담을 듣고서 설레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문휘는 은조영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대답했다.
“형 곁에서 책사가 되지 않았을까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거야. 가주의 힘이나 무게가 나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따스한 체온과는 달리 어조는 냉정했다.
은조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속에서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중대사에서 차츰 밀리고, 네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적어지겠지…… 난 그 모습을 보기 싫었단다. 그래서 독한 사람이 되고자 했지.”
“……지금은요?”
서문휘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묻기는 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자신의 형은 무림과 너무 깊게 얽혀서 영웅이 될지언정, 대명의 장군이나 군문의 가주로 있을 수가 없다.
그 속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은조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거지. 하지만 나쁜 게 아니야. 형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
서문경이 영웅으로서 천하의 안정을 꾀하고.
서문휘가 서문세가의 가주가 되어 형을 뒷받침한다.
은조영은 이 분위기가 좋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었으니까.
이 모든 것이 서문경의 양보로 인해 이루어졌기에.
“경이가 돌아오면 내가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쁜 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겠지만, 네가 설 자리가 생겨서 너무 기쁘구나.”
“…….”
서문휘는 잠시 침묵했다.
정녕 이것이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서문경을 깎아 내린 내막이란 말인가?
기뻐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다.
‘……하아.’
복잡한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부쩍 다가온 여름.
호북성에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장강이 가깝다 보니 바람이 습하여, 때때로 어깨가 부딪치는 것만으로 싸움이 벌어진다.
무림인의 혈기는 사소한 시비도 참지 못하고 터지기 일쑤였다.
“뒈지고 싶냐?”
“오냐! 오늘 송장 하나 치우겠구나!”
두 무림인이 싸움을 벌이면, 그들 주위로 거리가 벌어져 행인들끼리 내기판이 열린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저렇게 싸우더라도 누가 죽지 않을 걸 알기에.
서로 낄낄거리며 돈을 걸거나 한쪽을 크게 응원한다.
서문경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런 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전생에선 마교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으니까.
누가 시비를 걸어도 싸울 여유가 없었다.
한쪽 팔을 잃거나 눈을 잃은 무림인이 음울한 표정으로 걷는 것이 무림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화난 척하면서 내기판에서 한몫 챙기려는 놈도 있고, 져 달라고 전음을 보내는 놈도 있다.
얼마나 여유로운 일상인가?
‘이럴 때 물놀이라도 다녀야 하는데, 느긋하게 살긴 글렀어.’
삼 년 동안 한곳에 있을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다.
청마와 적마는 물론이고, 다른 칠로두에 대비할 정보나 힘을 미리 기르려면 호북성에서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까.
서문경은 무림인의 개싸움을 지켜보다가 천무학관으로 향했다.
“진짜로 갔구먼. 이 양반.”
무영신투가 지내고 있던 동편의 수련장.
그곳엔 이미 사람이 사는 흔적은커녕 짐 하나까지 전부 챙겨 나간 듯했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 도둑은 자기 보물을 남김없이 챙겨가기 마련인가 보다.
서문경은 수련장을 한가로이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네.”
천무학관주 제갈우.
그가 향이 훌륭한 차를 데워 둔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뭇 놀라웠다.
“찾아온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언제부터 기다리신 겁니까?”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없던 눈치도 느는 법이지.”
제갈우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갈세가 사람답게 마음이 썩은 놈인가, 뻔뻔하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고갤 숙이더니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사죄하겠네.”
“……이게 뭡니까?”
“나와 학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퍼트린 악소문 말일세. 지금이 아니면 사죄할 기회가 없으리라 여겼네.”
그 말에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팔짱을 꼈다.
제갈우가 관주라서 내심 어렵게 여겼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이 갑이란 소리였으니까.
자기 잘못을 시인한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따질 건 따져야 하지 않았나?
“사죄만 하십니까?”
“……그건 아니지.”
잠시 당황스러워했지만, 제갈우는 제갈세가의 사람이었다.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는 서문경에게 되물었다.
“무얼 하면 사죄를 받아 주겠나?”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편의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편의?”
“예. 이왕 이렇게 된 거, 학관에만 있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그래도 중퇴나 자퇴보단 휴학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를 위해서 교칙을 바꾸란 말이군.”
“그렇죠.”
서문경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이왕 편의를 봐주려거든 아예 편을 들라는 소리였다.
그 말에 제갈우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무사부에게 전달해 두겠네.”
“정말입니까?”
“천무신동이 왜 천무신동이겠는가? 천무학관에 있기에, 학관의 명예가 오르는 법이지. 언제까지 신동일진 모르겠지만 말일세.”
제갈우가 껄껄 웃으며 기름칠하려 들었으나, 서문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가 언제까지 천무신동이겠습니까? 괜히 제 명성에 업혀 가려고 하지 마시고 다른 길 알아보십시오. 제 동기들, 모두 뛰어나니까요.”
“그거야 그렇지만…….”
제갈우는 심히 아쉽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언제부터 나오지 않을 생각인가?”
그 말에 서문경은 자신의 동기들을 떠올렸다.
다른 일에 매달리느라 신경 쓰지 못한 친구가 많았다.
그러니까,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둬야겠지.
“하루에서 이틀 안에 정리해야죠.”
그사이에 동기와의 인연을 조금이라도 이어두자.
그러면서도 제갈우에게 여지를 남겨 두기로 했다.
“뭐, 가끔은 얼굴이나 보러 올게요.”
“기대하네.”
서문경은 제갈우의 인사를 뒤로하고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