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68화 (66/250)

봉합 (3)

“대업이 코앞에서 고꾸라져 통탄스럽고 체면이 깎일지언정, 최악은 면하였구나.”

남궁명이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난 뒤, 남궁서겸의 첫마디였다.

듣고 있는 아들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서문경에 대한 촌평은 아꼈다.

대신에 ‘만약’을 따진 대화로 넘어갔다.

“무림맹에 계속 발을 대고 있었다면 세간의 눈 때문에 본가가 선두에 서야 했을 것이다. 명성이 오를지언정 피가 웅덩이져서야 무슨 의미겠느냐?”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남궁서겸은 단언하듯 말했지만, 남궁명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경이만큼 뛰어났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부족함을 안다.

서문경이 가진 무위와 담력을 옆에서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나이가 어렸다.

천하의 방대함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가 세기의 천재가 아닌 것에 실망할 시기였기에.

“서문경이라는 아이와 친교를 다지는 편이 좋겠구나. 가문의 체면을 상하게 했을지언정 멀리하지 않는다는 대범함을 보여 주거라.”

“……예, 아버지.”

남궁명은 마음속에서 어두운 일면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 * *

무림맹에서 돌아오니 천무학관이 시끌벅적했다.

아마 진무신검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후기지수가 궁금한 듯했다.

천무신동 서문경.

자신의 이름이 호북성 무한에서 수백 번 언급되는 모양이었다.

특히 놀기 좋아하는 동기이자 도사, 운룡 청겸이 친한 척하며 다가왔다.

“겨우 며칠 사이에 친우가 영웅이 되어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설마 오늘도 객잔에 같이 가자고 이러는 거야?”

“눈치가 빠르군. 혹시…….”

“됐어.”

이놈은 대체 천무학관에 왜 입관했을까?

설마 초면부지의 사람들한테 유망한 후기지수라고 은근슬쩍 주장하기 위해서?

서문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너는 대체 천무학관에 왜 온 거야?”

“어…… 음, 그게. 사실은.”

“사연은 다른 데서도 충분히 들으니까 대충 넘어가자고. 요점만 말해.”

“본산에서 가라고 했으니까? 하하…….”

그 말을 듣고 나니 곤륜파의 도사들이 불쌍해졌다.

한편으론 가라고 해서 합격한 놈의 실력도 궁금했는데, 도사주제에 화려한 옷을 입는 걸 좋아했다.

쉽게 말해서…….

“나한테 뭐라고 할 거면 자네도 비무하잔 소리하지 말게. 옷이 더러워지잖나!”

“무슨 풍류객(風流客)도 아니고. 그럴 거면 차라리 사문으로 돌아가지 그래?”

사문으로 돌아가란 말을 듣자마자 청겸이 갑자기 딴청을 피웠다.

“청해성보다 역시 호북성이 옷이 많아서 좋아. 거긴 어두운 색밖에 없다니까?”

“옷은 누가 사 주는데.”

“그야…… 크흠, 흠. 비밀일세!”

‘보나마나 사문에서 보내 주는 돈이나 축내겠지, 뭔 비밀?’

몸은 소년이어도 정신은 어른이라 아주 제대로 혼쭐을 내주고 싶을 지경이다.

서문경은 오지랖 부리려는 걸 애써 참아 냈다.

“다른 동기들은?”

“글쎄. 다들 수업을 받고 있지 않을까?”

너는, 이라고 쏘아붙이려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저런 녀석에게 훈계가 통할 리가 없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아쉬웠다.

“이제 천무학관에 붙어 있기 힘들 텐데, 검봉이랑은 친해지지 못했네.”

검봉 유화.

아미파의 후기지수로서 접점이 별로 없었다.

말을 붙여 본 것도 다섯 번을 넘지 못했으니.

양회광보다 적을 정도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뭐, 만나 주질 않잖아?”

“그러게.”

청겸의 말대로 유화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지 않나.

서문경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생각을 품었다.

자연히 미소가 나왔다.

‘무림맹이 중추로 나서기 시작한 이상, 마교가 대놓고 움직이진 못할 거야.’

전생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보낸 세월이 도대체 몇 년이었던가?

물론 마교가 모습을 이르게 드러내긴 했지만, 적어도 군부와 무림이 대립할 일이 없어지겠지.

목숨을 몇 번이나 걸었기에 얻은 쾌거였다.

그래서 서문경은 청겸에게 당당히 말했다.

“마인으로 의심되는 놈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 본가도 괜찮고.”

예전에 이렇게 말했으면 미쳤냐는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연히 그래야지! 진무신검을 구한 영웅이 그러는데!”

청겸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서문세가의 망나니에서 마교와 수차례 싸운 후기지수로, 또 진무신검의 은인으로.

우연과 악운이 겹친 결과였다.

‘적마와 싸울 때만 해도 뭐 벌써 이렇게 싸우나, 운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무림인은 서문세가를 군문이라며 무작정 밀어낼 수 없을 테지.

서문경은 딱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엉? 어디 가게?”

“당연히 수업에 가야지.”

“……아. 그렇지.”

그 말에 청겸이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굴 도장은 찍었으니 이제 번화가를 뒤적거릴 모양.

대체 언제 철들까?

서문경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무영신투가 있는 천무학관 동편으로 향했다.

“이제야 오냐?”

무영신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힐 때만 해도 그의 신분을 빌렸었으니까.

‘그땐 진무신검을 구하게 될진 몰랐지.’

아예 뻔뻔하게 모르는 척이나 하자.

서문경은 아이처럼 순진하게 웃었다.

“아, 제가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수업이 못 나왔죠? 죄송합니다.”

“야,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날 잔뜩 이용해 먹었잖냐?”

어디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드냐는 듯.

무영신투가 무영보로 거리를 빠르게 좁혀 서문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때문에 천무학관에 붙어있기 글러 먹었다 이놈아. 도사 놈도 구했으니까 슬슬 헛소문도 없애지 그래?”

“뭐…… 그래야죠.”

서문경은 순간 무영신투가 화를 내거나 어깨를 꽉 붙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게 진지했다.

“네가 천무학관에 들어온 이유가 지금 이 분위기냐?”

“예.”

숨긴다고 해서 좋을 것이 있겠나.

서문경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관과 무림이 반목하지 않고 마교와 대적하는 구도가 되길 바랐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천무학관에 간자가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겠지요.”

“……네 말대로, 천무학관주도 전념을 다하고 있더구나.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진 않겠지만 빚을 졌다는 마음은 있을 것이야.”

“제가 무슨 군부의 사냥개란 소문은 과하긴 했어요.”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어차피 소문에 연연할 성격이었으면 망나니란 악명도 안 쌓았겠죠.”

“…….”

무영신투는 서문경의 시원시원한 대답을 듣고서 침묵했다.

한 번쯤, 원망이라도 토할 줄 알았다.

특히 천무학관주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에 대해 책임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러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큰 대국을 보고 있었다.

‘그 점이 천무학관주에겐 더더욱 까다로운 짐으로 자리할 테지.’

이번에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다.

무영신투는 서문경에게 미소를 보였다.

“무림은 너에게 빚을 졌다. 그리고 너 혼자서 관을 대표하여, 무림과 친교를 다진 거나 마찬가지지. 도둑놈의 제자에게 너무 대단한 업적 아닌가?”

“무영신 무사부인 줄로만 알았다고 할 겁니다.”

“이놈, 그렇게 나오시겠다?”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낄낄 웃었다.

그러다가 서문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저 혼자 한 거 아닙니다. 주 무사도 함께 있었거든요.”

“아! 그 녀석이라면 내 제자로 둬도 되겠군. 나한테 도둑놈 기술을 배웠으니까.”

“안 그래도 청마가 주 무사를 무영신투 제자로 착각하던데요?”

“그러면 끝났지. 이제 그놈은 무사가 아니라 도둑놈이란 별호가 붙을걸.”

그 이후로 여러 잡담을 나눴다.

서로 시간이 부족한 입장인 건 알았지만, 아까워하진 않았다.

이 다음부터 언제 다시 마주할지 모른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잡초로 무성하던 수련장도 이렇게 정리하시고…… 왜 떠날 때가 돼서야 깔끔해지는 겁니까?”

“원래 도둑놈 본거지는 떠나기 직전이 제일 깨끗한 법이야. 자기 재산을 챙겨 가는 법이거든.”

“갈 곳은 정하셨습니까?”

“애물단지처럼 가지고 있던 신공의 주인이 정해졌으니, 이제 내가 배울 신공을 또 찾아봐야지.”

“마교랑은 언제 싸울 겁니까?”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무림맹으로 갈 테니 보채지 마라.”

그 말이 대화에 방점을 찍었다.

서문경과 무영신투가 마주한 나날은 고작 보름에서 스무날 남짓.

짧은 시간이었으나 노인과 소년은 큰 것을 나누었다.

노인은 자기가 익히지 못한 신공을.

소년은 쇠잔해지던 열의마저 일으킬 의지를.

자기가 가진 것을 떼어 주고서 결별했다.

“앞으로 몸조심하고 살아.”

“스승님이야말로 어디 발목 붙잡히지 마십시오.”

서문경이 고개 숙인 채 두 손을 모아 올리는 순간.

……스륵.

바람 한줄기가 뺨을 스쳤다.

찰나 사이에 무영신투의 신형이 사라져 있었다.

* * *

……스륵.

천무학관주는 무영신투가 담장을 박차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사귄 지우(知友)였다.

마교와 싸우다가 마음이 상한 것을 보고, 무사부라도 하면서 사람과 뒤섞여 지내라 강권했었다.

한데 저 오랜 방황을 자신이나 무림인도 아닌 군문의 소년이 끊을 줄이야.

“……내가 오해를 품었던 것 같소.”

“당연하지. 아무리 체면이 상해도 그렇지 악소문을 퍼트리면 쓰나!”

서문패가 콧방귀를 뀌며 천무학관주를 쳐다보았다.

그가 권한 찻잔은 손에도 대지 않았다.

‘제갈세가 놈이 준 걸 어찌 믿겠어?’

천무학관주 제갈우.

머리는 문사처럼 잘 정돈했을지언정 턱과 목 사이에 상처가 남아있다.

서문패의 경험상, 이런 남자는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아예 아군으로 만들든가 적으로 만들든가.

여기서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서문경의 부탁이 떠올랐다.

-무림의 훗날이 천무학관에 있어요. 화나 짜증이 나도 제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주세요, 삼촌. 부탁드릴게요.

‘하, 옛날에는 그냥 내 뒤만 졸졸 따라왔는데. 이젠 날 이용해 먹으려고 한단 말이지.’

자기가 가 봐야 어리다고 무시할 가능성이 있으니, 자신이 가서 동맹으로 만들어 달란 뜻이렷다.

서문패는 인상을 한가득 썼다.

“이보시오. 제갈 선생. 앞으로 경이나 서문세가를 적대하지 않고, 이곳에 마교의 간자가 있는지 확실하게 밝혀 주길 바라오.”

“알겠소.”

“그러니까…… 음?”

“서문경 학관생에게 직접 사과하겠소. 또, 간자는 지금도 발본색원하는 과정이니 천천히 기다려 주시오.”

제갈우가 순순히 인정하자 서문패는 순간 당황하여 되물었다.

“마, 말만 그런 게 아니고?”

“원한다면 투명하게 과정을 공개하겠소. 물론 서문세가 전체가 아니라, 우리도 마교의 간자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요.”

“……흐음.”

저 정도면 완전히 고개를 숙인 거나 마찬가지.

여기서 더 요구하면 관주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과 다를 게 없었다.

서문패는 놀라움을 속으로 삼키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본가가 관여하면 소란해질 뿐. 제갈 관주가 잘 처리해 주리라 믿지.”

“한데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그 말에 서문패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여태껏 제갈우에게 하대하듯 말했으니까.

“……죄송합니다.”

“…….”

서문패와 제갈우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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