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 (2)
무림맹주 남천웅.
그는 낭왕에 이어 당대 맹주로 추대된 자로서, 낭인 출신의 고수였다.
처음에는 무림맹주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나는 전대 맹주처럼 마교 같은 허상이 아니라, 무림의 안정을 위해 싸우리라!”
……하지만 그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남천웅은 천하십대고수였던 낭왕과 달리 여러 가지가 부족했다.
무공이나 영향력부터 시작하여 인망(人望)까지도.
심지어 불운한 점도 있었으니.
“전대 맹주가 남긴 빚을 갚아 주셔야겠소!”
낭왕이 맹주일 땐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던 남궁세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증서를 가지고서!
‘아이…… X발, 낭왕 X새끼야!’
갑자기 은거한 이유가 뭔가 했더니 겨우 이거였나?
남천웅은 낭왕이 몹시 원망스러웠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그 와중에 적마의 머리가 복덩이처럼 보였다.
가만히 가지고만 있어도 무림맹의 무게감이 한층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웬걸?
진무신검이 냉큼 나타나선,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야? 무당산에 가져가겠다?
‘이런 X발! 약한 게 죄지!’
이래서야 계속 남궁세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가 죄를 안고서 은퇴할 판이다.
맘껏 즐기다가 사라진 낭왕 선배가 항상 부러웠다.
언제고 나타나면 찾아가서 죽탱이를 갈기고 싶을 정도로.
그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을 즐길 수 있었다.
“진무신검이 마교에게 습격을 당했고, 자네가 그걸 막았다고?”
남천웅은 눈앞의 소년을 껴안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만약 자신이 무림맹주가 아니었다면 함박웃음을 지었을 테지.
그만큼 기쁜 일이었다.
“천무신동 서문경. 자네는 진정 소영웅으로 불릴 자격이 있군!”
“칭찬이 과하십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서문경이 입술을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였다.
감정을 숨기는 게 아직 미숙한 듯했다.
‘이 아이를 쫓아내려고 남궁세가가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는데…… 꼴좋군! 꼴좋아! 진무신검이 감싸는 아이한테 그딴 짓을 하려고 했단 걸 낱낱이 밝혀 주마!’
지난 몇 년 동안 빚을 가지고 얼마나 압박을 당했던가?
오걸의 명망을 빌린다면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무림맹에서 모두 쫓아낼 수 있다!
남천웅은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그래, 서문 소협. 무림맹에 찾아온 이유가 뭔가? 그것도 삼촌, 호위무사와 함께 말이야.”
다부진 몸을 가진 사내 서문패와 호위무사라고 소개한 주백경.
두 남자가 서문경의 양옆에 앉아 있었다.
그것 또한 남천웅에게 신비하게 보였다.
‘보통은 연장자가 상석에 앉아서 의사를 밝히기 마련인데, 천무신동이 대장처럼 보인단 말이지.’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서문경이 비범하단 뜻일까?
남천웅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저 진무신검 선배의 소식을 논하고자 온 건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서문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호탕하신 것이 마음에 듭니다.”
“과거에 나랑 본 적이 있었나?”
“아, 농담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끼리 유행하는 농담인가…… 어렵군.”
사소한 잡담은 여기까지라는 듯.
두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남천웅이나 서문경이나 괜히 예법을 따져 가며 대화를 빙빙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군문 출신인 서문경이 그러했다.
“이번 일로 마교가 오걸이나 십대고수를 노린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무림맹에서 이 소식을 알리고 ‘중심’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오호.”
무림맹이 오걸이나 십대고수 사이에서 중심이 된다?
사라진 입맛이 돌아오는 말이라, 남천웅은 입술을 핥곤 눈을 가늘게 떴다.
서문경의 말이 너무 달아서 신경이 거슬렸다.
“무림맹이 마교 타도의 구심점이 되길 바라는가?”
“전대 맹주인 낭왕께서 본래 그 짐을 지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림맹이 중심에 설 명분으로 충분하겠지요.”
“……아, 그거 말인가.”
여기서 체면을 내려놓고 민망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남천웅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서문경이 먼저 꺼내 들었다.
“일행이었던 남궁명에게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마교의 존재가 불확실했고, 그 때문에 남궁세가에게 큰돈을 빌렸다고.”
“민망한 이야기를 들었군 그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남천웅의 고민에 방점을 찍었다.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농담하나? 남궁세가 다음에 서문세가가 무림맹의 목줄을 쥐겠다고?”
남궁세가야 무림세가지만, 서문세가는 군문이지 않던가?
군부 아래에 무림맹이 놓이게 되는 꼴이다.
남천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남궁세가가 던져 주는 밥이나 주워 먹고 말지. 갑자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제대로 듣지 않으셨잖습니까?”
“뭘 더 들을 필요가 있다고!”
“서문세가가 아니라, ‘제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요.”
“……!”
그 말에 남천웅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서문경은 서문세가가 아니라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곡해한 건 자신이었다.
“……미안하네. 워낙 치이는 일이 많아서.”
“아닙니다. 제가 돕는단 말을 하면 자연히 서문세가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시겠죠.”
서문경은 남천웅의 실수를 겸허히 넘어갔다.
이제부터 할 거짓말이 저런 말실수보다 클 테니까.
“제가 무림에서 우연히 얻게 된 보물이 있습니다. 중경의 옥화산이 거깁니다. 산 중간이 비어 있었지요.”
“그런 산이 있었나?”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물론, 검치와 적마의 싸움으로 옥화산이 무너져서 진위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산이 무너진 흔적을 보면 중앙이 비어 있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 터.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기 마련이다.
남궁세가와 결별하고 싶은 남천웅에겐 아주 달콤한 거짓말이 되겠지.
“그때 얻은 보물이라면 남궁세가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서문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말을 쏟아 냈다.
당연히 서문이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만약 나중에 남천웅이 진상을 알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이 있는 한 서문세가가 무림맹을 하수인처럼 다루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사기치는 거긴 한데, 뭐. 내가 원래 착한 놈도 아니고.’
전생에서 남천웅이 농담 삼아 말하지 않았던가?
-남궁세가의 개가 되느니 차라리 너희 집안의 개가 되는 게 일하는 맛이 났을 텐데 말이야! 클클!
미래의 남천웅은 남궁세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일했던 시간을 아까워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기를 쳐서라도 남궁세가를 무림맹에 떼놓고 싶었다.
서문경은 남천웅을 보았다.
전생에 처음 마주했던 그때보다 한참이나 젊었지만, 성급한 말실수를 저지를 만큼 혈기 넘치는 모습.
그는 한참이나 고민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도 떨어질 대로 떨어졌군. 자네 같은 소년의 손을 빌리게 될 줄이야…….”
남천웅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과거에 전대 맹주 낭왕을 보고 얼마나 한심해했던가?
있을지도 모를 마교와 싸우며 빚을 만들고, 나중에 조용히 사라졌다고 비웃었다.
한데 마교는 실제로 있었고.
낭왕이 만든 명분이 무림맹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될 줄이야.
‘무림맹에서 남궁세가만 축출할 수 있다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을 행할 수 있겠지.’
무림의 안정.
낭인이 온갖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동네가 되는 것.
마교를 먼저 치워 내긴 해야겠지만, 무림맹이 남궁세가의 소유물처럼 되는 것보단 나으리라.
남천웅은 서문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도와주게. 나 또한 마교와 함께 싸우는 아군이 될 테니.”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서문경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전생과는 다른, 아주 큰 축이 서서히 돌아가는 것 같았다.
* * *
“천무학관에 있어야 할 후기지수가 왜 무림맹에 온 거지?”
“그러게. 무슨 급한 용무가 있나? 마차는 남궁세가 거던데. 설마…….”
“어허. 말조심하게!”
이미 다 들리고 있는데.
남궁명은 마차에 걸터앉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서문경을 따라다니다 보니 아주 큰 사건에 엮인 기분이었다.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소문도 진짠가 의심할 정도였지.’
마차가 넘어지는 와중에 보이던 침착함.
그리고 청마와 마주하고서 흔들림 없이 허세를 부리던 모습까지.
속으로 망나니라고 여기던 서문경이 아니었다.
분명…… 영웅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대범한 심장을 타고나, 강자 앞에서도 당당한 남자.
‘그에 비해 나는, 그의 삼촌한테 한번 겁을 집어먹지 않았나?’
뒤늦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결국 서문경처럼 청마 앞에서 허세를 부려 위기를 넘길 정도의 그릇은 되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도.
“보나마나 무슨 망나니짓을 하다가 무림맹에 호출당한 거 아닌가?”
“그것 참 가관이군! 서문세가에서 안 데려가고 뭐 하나! 클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야 뒤에서 비웃지만, 남궁명은 알았다.
그가 진무신검을 구했다는 것을.
그런 업적을 세웠음에도 청마를 죽이지 못해 분노하던 것 역시.
‘애초에 나와 그릇이 다른가.’
열등감과 열패감도 가라앉았다.
이제는 순순히 인정하는 것에 가까워져,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지 않나.
“소가주로서 경이가 무림맹주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경청할 필요가 있었는데 말이지.”
남궁명은 실소를 터트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마, 무림맹주 남천웅은 이번 일로 남궁세가의 영향력을 밀어내겠지.
서문세가를 배척하던 무림의 분위기도 한층 가벼워질 것이다.
그리 되면 서문경의 다음 행보는 어찌 될까?
같은 나이인 동기임에도 격이 다르다는 것이, 이제는 초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 아버지가 나한테 가주가 되려거든 비정하라고 한 건가.’
또 추한 모습을 보여서야 남궁세가의 가신에게 면목이 없다.
남궁명은 ‘읏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한 건 마차를 타거나 잠시 애를 돌본 것뿐인데, 머리가 무거웠다.
하루가 아니라 열흘 동안 수련에 매진한 것처럼 피로하니.
“……고검(孤劍)은 무슨.”
인정하고 나니 무력함이 찾아왔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 보니 서문경이 돌아왔다.
그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 그건 아니오.”
“괜히 겸손은.”
서문경이 겸연쩍다는 미소를 짓고는 전음을 보내왔다.
그 내용은 남궁명에게 충격적이었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이번 일로 무림맹주가 너희 가문을 무림맹에서 밀어낼 것 같아. 낭인 출신이라 입이 험할 것 같은데…….
-뭐라고?
-아, 예상이야. 확실한 건 아닌데 그럴 것 같아서 충격 받을까봐 말한 거고.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려봐.
남궁명은 서문경의 표정을 보았다.
단순한 예상이라고 하기엔 확신에 가까운 의지를 담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보기엔 그러했다.
‘명색이 무림맹주가 자기 계획을 줄줄이 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군.’
남궁서겸에게 듣기로 남천웅은 낭왕에 비해 무공이 부족할 뿐 지모나 행동력이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차례 마주한 남궁서겸이 알만한 것이지, 처음 마주쳤을 서문경이 예상할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남궁세가의 체면을 챙겨 주기 위해 미리 경고까지?
‘아니, 이건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오대세가까지 무림맹의 행보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일 거야.’
남궁명은 흔들리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대체 서문경에게 부족한 것이 뭔가?
무공뿐만 아니라 무림의 균형추를 조정할 지모와 세력까지 갖추었다는 말인가?
저게 나이가 동갑인 경쟁자라고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이보게, 내 가문을 견제하려고 그런 건 아니오?
남궁명은 답을 알면서도 물어봤다.
제발 다르게 대답하길 바라면서.
하지만 서문경의 대답은 예상했듯 술술 나왔다.
-그건 아니야. 날 무림에서 쫓아내려고 했던 세력을 막았고, 마교와 싸울 준비를 위해서 움직인 거야.
사리(事理)에 맞았다.
남궁세가가 먼저 ‘소가주의 자존심’을 위해서 서문경을 쫓아내려 했고, 무림맹을 좌지우지하려 했으니.
자길 가로막았으니 치웠을 뿐이라며, 저 말에 자길 이해해달라는 변명이나 구차함이 없었다.
저 면모와 능력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남궁명은 한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미리 말해 줘서 고맙네.”
서문경과 웃으면서 헤어지기 위해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겼다.
신비한 무공사전